•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4. 조사 시찰단이 남긴 역사적 교훈
  • 실패로 끝난 근대로의 개혁
허동현

조사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문명개화’의 충격은 위정자와 식자층에게 전해져 이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조사 시찰단의 일본 파견은 개인을 넘어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 반향을 이끌어 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이다. 또 조선과 일본의 문화 교류사에서 역전 현상이 일어난 전환점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사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수립한 국민 국가 수립론과 동도서기론은 1880∼1890년대 조선이 추진한 개화와 자강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자 이를 추동한 쌍두마차였다. 개화기에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근대화 모형이 중국식과 일본식 혹은 동도서기론과 국민 국가 수립론이었다고 할 때, 돌이켜 보면 후자가 훨씬 바람직한 모델이었다. 전자는 서양 기술의 우월성만을 인정하고 그 기술 문명을 꽃피운 토대인 서구 근대 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었다.

당시 일본 근대를 모델로 하는 국민 국가 수립을 도모한 조사들이 서양 기술의 우월성만을 인정한 동도서기론자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은 이후 조선 근대화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위정척사파 지식인과 달리 서구 문물의 수용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 동도서기론자들도 일본을 시찰하면서 얻은 근대 문물과 제도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시각이 크게 변하면서 조선에 국민 국가를 수립할 필요성을 자각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후쿠자와 유키치도 1862년 유럽을 둘러볼 당시 서구의 근대 산물인 민주주의의 기본 제도와 관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350)福澤諭吉, 『福翁自羇』, 慶應義塾, 『福澤諭吉全集』 7, 岩波書店, 1970, 107∼108쪽.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국가들을 둘러보면서 익힌 새로운 견문을 바탕으로 근대적 계몽사상가로 거듭났다.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접하면서 습득한 지식과 정보가 당장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세계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마찬가지로 동도서기론을 제기하였던 조사들 가운데 몇몇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본격적으로 일본 지향의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도모한 갑오개혁에 각각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박정양은 학부대신(學部大臣)과 총리대신(總理大臣), 이헌영은 내부대신(內部大臣), 엄세영은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으로 활약하였다. 갑오개혁의 추진 기구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는 이들 동도서기론자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일본의 집권적 조정과 유사한 집단 지도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당시 지방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선거에 의한 향회(鄕會)의 구성도 이들이 호평하였던 일본의 부현회(府縣會)와 비슷한 제한적 지방 자치 제도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도 장기적으로 국민 국가를 수립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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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민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어윤중의 이상은 왜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어윤중과 동일한 이상을 꿈꾸던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의 힘을 빌려 무모하게 일으킨 갑신정변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더욱 심해진 중국의 간섭과 보수 세력의 반동에서 찾을 수 있다.

갑신정변 이후 조사 시찰단의 조사와 수행원이었던 어윤중, 유길준, 윤치호 등은 갑신정변의 동조자로 몰려 한직(閑職)으로 밀려나거나 숙청되었으나, 갑오개혁을 계기로 정치 전면에 재등장함으로써 자신들의 국가 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이들은 국가 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내각 중심 의 입헌 군주제(立憲君主制)와 제한적 대의 정치(代議政治) 도입, 경찰 제도의 창설, 법제의 근대화, 상비군(常備軍) 양성을 꾀하였다. 아울러 경제 통합의 방안으로 왕실 재정의 정리를 통한 정부 수입의 증대, 징세법(徵稅法) 개량, 새로운 세원(稅源)의 발굴, 정부 주도의 민간 상공업 진흥 등을 도모하는 한편, 이에 필요한 재정 수요를 일본에서 차관하여 조달하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국민 통합을 위해 전통적 신분 제도 철폐와 근대적 학교 제도의 보급을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 육성하고자 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을 폐지하는 등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들 역시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원을 받아 국민 국가를 수립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이 실현하고자 한 국민 국가 수립 방안의 이면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방조하거나 옹호한 면이 많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또한 일본 침략군과 야합(野合)한 친일 개화파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외세 의존적 개혁의 몰주체성(沒主體性)은 갑신정변을 포함한 19세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집권 조정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공통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윤중이 일본을 모델로 입안한 국민 국가 수립론은 갑신정변에서 애국 계몽 운동에 이르는 시기에 국민 국가 수립을 도모한 운동 주체들이 구현하려 했던 조선형 국민 국가의 원형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에게는 일본 모델이 비록 인민 주권론에 기초하여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상정하였던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왜곡한 변형된 국민 국가였을지라도, 당장 실현 가능하고 성공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개화기에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구상한 국민 국가의 통치 형태는 인권이 사상(捨象)되어 있다는 점에서 1948년 이후 남북한에서 발달한 권위주의적 정부, 특히 1960년대 남한의 권위주의형 군부 독재 정부와 유사하다. 특히 어윤중이 입안한 집권적 조정이 주도하는 위에서부터의 근대 국가 수립 전략과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 개발 전략은 5·16 군사 정변 세력이 실행한 국가 건설 또는 경제 개발 전략의 원형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역사적 시공을 뛰어넘은 이들의 국가 발전 전략은 서구 근대의 보편을 도입하려 하지 않고 비민주적 특징을 갖는 일본형 국민 국가를 발전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끝으로 메이지시대 일본형 국민 국가를 창출한 세력은 상상된-타자화된-서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면서 일본 고대에서 일본적 전통의 복고-창출-를 도모함으로써 서구 근대 보편과 차이가 있는 일본 근대를 만들어 냈다. 예컨대 일본은 서구 기독교에 대체할 문화 통합의 기제로 일본적 전통에서 명맥만 유지하던 신도와 천황제를 재창출해 냈다. 이와 같이 메이지 조정이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자국 고유의 신도를 보호, 육성함으로써 기독교의 침투를 막으려고 한 데 비해, 어윤중을 비롯한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은 기독교를 유교를 대체할 수 있는 국민 교화와 부국강병의 효과적 수단으로 보고 수용하는 데 호의적이었다. 기독교를 보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후 조선과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파 양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남을 지적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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