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5장 개화기에 일본을 본 두 시선
  • 1. 개화기 대일 관계의 단초
허동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執政)한 후 단절되었던 조일 양국 간의 문화 교류는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시작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은 개항(開港)하게 되었고, 일본을 비롯한 주변 열강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방면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침략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에 조선 왕조의 위정자도 변화하는 국제 질서에 대응해 생존하기 위하여 대내적인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열강(列强) 간의 세력 균형을 꾀하였지만, 근대 국민 국가로 진화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1905년(광무 9) 조선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1910년에 조선인은 나라를 빼앗기는 비애(悲哀)를 경험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민(臣民)에서 ‘천황의 신민’이자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민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조선 왕조가 외세의 침탈(侵奪)에 맞서 혁신을 꾀하다 좌절한 1876년(고종 13)부터 1910년까지를 ‘개화기’라고 한다.

1876년의 개항은 조일 양국 간 문화 교류의 역사에서 수혜자(受惠者)와 공급자(供給者)의 위치가 뒤바뀌는 역전 현상이 초래된 시점이자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된 기점이다. 일찍이 1876년부터 1883년(고종 20)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을 공식 방문하였으며, 1881년에는 비공식 일본 문물 시찰단인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이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화된 문물제도와 군사 시설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당시 일본은 소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류를 조선에 기증하고 유학생의 파견을 권하면서 조선의 제도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에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경고하였으며, 1880년에는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중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과 1894년(고종 31)부터 1896년 사이에 추진되었던 갑오개혁(甲午改革) 같은 일본식 근대화 운동에 개입하였다. 나아가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과 명성 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래 수차례에 걸쳐 일어난 의병 봉기 등 반일 세력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상대로 청일 전쟁(1894∼1895)과 러일 전쟁(1904∼1905)을 벌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한마디로 1876년 이래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가면을 쓴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다.351)유영익, 「한·미 관계 전개에 있어서의 일본의 역할」, 『한·미 수교 1세기의 회고와 전망』,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3, 136∼142쪽.

확대보기
낚시놀이
낚시놀이
팝업창 닫기

그 당시 일본을 직접 시찰하거나 유학하여 일본의 근대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개화파(開化派) 인사와,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전통적 지식인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는 민초(民草)가 일본을 보는 시각은 크게 엇갈렸다. 여기에서는 개화기에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서로 엇갈리는 고정 관념이 언제, 어떻게 도입되고 형성되어 갔는지를 크게 부정적 대일 인식과 긍정적 대일 인식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