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5장 개화기에 일본을 본 두 시선
  • 2. 부정적 일본 인식
  • 일본은 서양을 따라 하는 오랑캐이다
허동현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일본은 왜(倭)로, 일본인은 ‘왜의 무리(群倭)’라는 비칭(卑稱)으로 불릴 만큼 조선에게 일본은 부정적 타자(他者)였다.352)고병익, 「‘군왜(群倭)’와 기화요초(琪花瑤草)」, 고병익 외,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 관계』, 문학과 지성사, 1992, 53∼56, 71쪽. 개항 이후에도 대다수 조선인들은 문화의 중국화 정도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을 통해 일본을 인식하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일본을 금수(禽獸)와 야만의 나라로 깎아내렸다. 이 관점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은 중화 문화권에서 이탈(離脫)하여 서구의 양이(洋夷)를 따라 하는 야만국(野蠻國)에 지나지 않았다.

개화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을 묵수(墨守)하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지식인은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이적관(夷狄觀)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한 일본을 서양과 매한가지인 오랑캐로 보았다. 이후 점차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서구 중심 국제 질서가 도래하면서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부정적 대일 인식은 조선 조정의 위정자 사이에서 점차 힘을 잃어 갔다. 그러나 서구화한 일본을 비롯한 서양인과 서양 문명 전체를 배척하는 화이관적 세계관의 영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 았다. 일본과 일본 문화를 야만시하는 화이사상에 입각한 이적관은 1896, 1905, 1907년에 일어난 항일 의병(抗日義兵)을 이끈 유생 의병장, 1894년 척양 척왜(斥洋斥倭)를 외친 동학 농민군과 같은 민초들에게 개화기 전 기간에 걸쳐 지속된 일본에 대한 고정 관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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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초상
최익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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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때 일본은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배외(排外) 운동과 항일 운동을 철저히 분쇄하였다. 일본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군함을 파견하여 흥선 대원군 지지 세력을 진압한 청나라를 지원하였고, 군대를 동원하여 동학 농민군과 항일 의병 운동을 탄압하고 수천의 애국적 동학 농민군과 의병을 살상하였다. 이처럼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냄에 따라 보수적·배외적 성향의 위정척사파 선비들과 흥선 대원군, 동학 농민군의 마음속에 침략자란 인상이 깊이 각인되었다.

먼저 위정척사파 유생들의 일본관을 알아보자. 김평묵(金平默, 1819∼1888)은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올린 상소에서 “왜는 서양 도적의 앞잡이지 결단코 전일(前日)의 왜가 아니다.”라는 왜양일체론에 의거해 침략성을 통박(痛駁)하였다.353)김평묵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침략성의 증거로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왜는 서양의 앞잡이로 이미 양인과 굳게 결합하여 중국에 횡행한 지 몇 년이 되었다. 둘째, 왜가 양박(洋舶)과 양포(洋砲)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왜와 서양이 기물을 통용함을 알 수 있다. 셋째, 수호하기 위해 4000의 병력을 이끌고 오는 것은 고금의 사행(使行)에 없던 일로 서양이나 하는 짓이다. 넷째, 청나라의 자문(咨文)에 따르면 1866년 강화도에 침입한 양적은 자주 사신을 보내어 우리를 위협한 왜인이다.”(김평묵(金平默), 『중암집(重庵集)』 권5, 대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代京畿江原兩道儒生論佯倭情迹仍請絶和疏), 2∼3쪽, 민족 문화 추진 위원회, 『한국 문집 총간』 319, 민족 문화 추진 위원회, 2003, 102∼103쪽 ; 오영섭, 『화서 학파의 사상과 민족 운동』, 국학 자료원, 1999, 106쪽 재인용).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896년(고종 33)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에 올린 상소에서 “개화 이후부터 선왕의 법제를 모두 고쳐서 한결같이 금수의 지휘를 따르고 중화를 이적이 되게 하고 인류를 금수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개국(開國) 이래 없었던 큰 변란입니다.”라고 하였으며,354)최익현(崔益鉉), 『면암집(勉菴集)』 1,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6년 2월 23일, 민족 문화 추진회, 1977, 148쪽. 1899년 1월에 올린 상소에서는 갑오개혁 때 단행된 일본식 개혁에 대해 “소중화(小中華)를 소일본(小日本)으로 바꾸어 놓고 ‘그 명(命)이 오직 새롭다.’고 말한다면, 오랑캐를 추종하는 수치감을 속이고 소중화를 혁 파함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속이는 행위일 뿐입니다.”라고 일본을 본뜬 개혁을 부정적으로 보았다.355)최익현, 『면암집』 1, 재소(再疏) 1899년 1월 30일, 민족 문화 추진회, 1977,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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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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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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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동학 농민군도 왜양일체론에 의거해 일본을 서양 제국과 한통속인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 보았다. 이는 1893년 호남 지방 동학 교도들이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제출한 호소문과 보은 집회(報恩集會)에서 ‘척왜양(斥倭洋)’을 기치로 내걸고 조정에 올린 ‘문상(文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왜적과 양적이 심복(心腹)에 들어와 대란(大亂)이 그 극에 달하였습니다. 우리의 국도(國都)를 보면 이미 이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진년의 원수와 병자년의 치욕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고,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가 짐승의 근거지가 되어 500년 종사(宗社)가 장차 망하고 그 터전이 기장 밭이 되고 말 것이니, 인의예지(仁義禮智) 효제충신(孝悌忠信)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하물며 왜적이 뉘우치는 마음도 없이 재앙을 일으킬 마음만을 품고 있어 바야흐로 그 독을 뿌려 위험이 닥쳐왔는데도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별일 없다고 하고 있는데…….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왜와 양을 치는 데 목적이 있으니 이 어찌 대죄(大 罪)가 되리오. …… 또 왜와 양이 우리 임금을 위협함이 극에 달하였는데 조정에 이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즉 ‘왕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을 뿐이라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의(義)는 어디에 있습니까. …… 우리가 비록 향곡(鄕曲)의 천한 몸이지만 어찌 왜양이 강적임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유교를 받든 역대 임금들의 교화를 받아 모두 ‘왜양을 치고 죽는다면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하니 이는 국가가 경하할 일이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356)日本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日本國際聯合協會, 1936 ; 『일본 외교 문서』 5(한국편), 태동 문화사 편, 1981, 457쪽 ; 국사 편찬 위원회, 「취어(聚語)」, 『동학란 기록』 상, 국사 편찬 위원회, 1959, 117쪽.

이러한 화이론적 왜양일체론에 의거한 적대적 일본 인식이 유생이나 동학 농민군만이 아닌 대다수 민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음은 1893년(고종 30) 3월에 일본 공사관 앞에 나붙은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에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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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송되는 전봉준
압송되는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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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인들 보아라.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사이에 인간이 위치하면서 경계가 만들어져 나라가 생기니 이때부터 삼강(三綱)이 정해지고 오 륜(五倫)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세상의 중심에 거처하며 살아가는 데 인륜을 아는 것을 사람이라 이르고, 인륜을 모르는 것을 이적이라 일컬었다. 때문에 중국의 문물은 멀리 이적에까지 통하고 성인(聖人)의 교화는 땅끝에까지 미쳤다. …… 너희도 비록 변방(邊方)이지만 천도(天道)를 똑같이 받았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미 인도(人道)에 처하였으면 각기 나라를 다스리고 각기 생산을 보존하여 강토를 영구히 보존하며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양육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탐람(貪婪)된 마음을 품고 남의 나라에 들어와 공격으로서 장기를 삼고 살육으로서 근본을 삼는 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종국에는 무엇을 하려는가.357)日本外務省, 「朝鮮國東學黨ノ擧動ニツキ情報ノ件」, 『日本外交文書』, 日本國際聯合協會, 1936 ; 태동 문화사, 앞의 책, 1981, 423쪽.

특히 이러한 화이론에 입각한 일본에 대한 적대 의식은 조선에 널리 퍼져 있었고 공감대가 넓었다. 이는 청일 전쟁 때 일본을 침략 세력으로 규정하고 물리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이 국왕의 이름을 빌려 전국의 유생과 동학 농민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종용한 다음과 같은 밀서(密書)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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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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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선대 왕조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백성으로서 선왕의 은덕을 저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금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붙어서 궁궐 안에는 한 사람도 상의할 사람이 없다. 짐은 외롭게 홀로 앉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할 따름이다. 지금 왜구가 대궐을 침범하여 화가 종묘사직에 미쳐서 명이 조석(朝夕)을 기약하지 못할 지경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너희들이 만약 오지 않으면 밀려오는 화환(禍患)을 어찌하겠는가. 이를 교시하노라.358)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역사학보』 27·28, 역사학회, 1962, 13쪽.

이처럼 화이론에 입각한 적대적 일본 인식은 개화기 전 기간에 걸쳐 개화파를 제외한 흥선 대원군, 유생과 같은 보수적 지식인층과 일반 민초 및 동학 농민군에게 널리 유포된 보편적 대일 인식이었다. 이는 왕조와 운명을 함께한 유학자 황현(黃玹, 1855∼1910)이 자결하면서 남긴 유서에도 잘 나타난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을 보고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느님이 주신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 읽던 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가만히 죽으면 진실로 통쾌하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359)최승효, 『국역 황매천 및 관련 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 문화사, 1985,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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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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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화이론적 일본관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1880년대 이후 서양과 일본의 앞선 기술과 농법 등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수용한 개신 유학자가 늘어나면서 화이론적 일본 인식은 유교 지식인 사이에서조차 점차 힘을 잃어 갔다. 또한 동학 농민군 세력도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친일 세력으로 변질되었고, 천도교 측은 서양의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여 일본과 서양을 야만시하던 기존의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천도교 제3대 대도주(大道主) 손병희(孫秉熙)는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사와 교유(交遊)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청년 신도들의 일본 유학을 권장하는 등 기존의 부정적 일본관을 폐기하기에 이르렀다.360)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 사업회,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 사업회, 1967, 6∼7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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