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5장 개화기에 일본을 본 두 시선
  • 3. 긍정적 일본 인식
  • 일본은 따라 배워야 할 이상적 모델이다
허동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 나름의 국민 국가를 이루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 국가로 거듭났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조선인에게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된 부정적 타자가 아니었다. 전세는 역전되어 세계의 신조류(新潮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 한 개 화파 지식인에게 일본은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외교 사절이나 시찰단 또는 유학생으로 일본의 발전상을 체험한 이들은 기존의 화이관적 이적관에서 벗어났다. 1882년(고종 19)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효가 남긴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은 이를 잘 대변한다. 개화파에게 일본은 이제 문화적 열등자인 왜(倭)라는 비칭이 아니라 따라 배워야 할 화(和)라는 존칭으로 다가왔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독립 협회를 이끈 개화 세력에게 근대 일본은 따라 배울 이상적 모델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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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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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일본의 서구화된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어윤중은 “일본 사람들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히 감행하므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나라의 체모를 세울 수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낡은 관습에 연연해 허송세월하며 날을 보낸다. 이로써 천하를 보면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행하는 자가 성공한다.”고 하여 일본의 근대화 정책을 높이 평가하였다.382)어윤중(魚允中), 『수문록(隨聞錄)』, 허동현, 『조사 시찰단 관계 자료집』 13, 국학 자료원, 2000, 7쪽.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金玉均)을 회고하며 “그는 구미의 문명이 일조일석(一朝一夕)의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 사이의 경쟁적 노력에 의한 점진적 결과로 수세기를 요한 것이겠는데, 일본은 한 세대 동안에 그것을 달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일본을 ‘모델’로 청하려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김옥균은 일본의 경험을 조선 근대화의 청사진(靑寫眞)으로 삼으려 하였다.383)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민태원, 『갑신정변과 김옥균』, 국제 문화 협회, 1947, 82쪽.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인 박영효도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한 일본에서 올린 상소에서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취하여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이웃에 한 나라가 있어서, 우리 조선과 같은 인류로 똑같이 비와 이슬의 혜택과 해와 달의 빛을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아도 땅덩어리 의 넓이에 크고 작음의 차이가 심하지 않고, 생산되는 물화(物貨)의 많고 적음의 차이도 심하지 않으나, 다만 일을 하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개명(開明)의 도를 취하여 문화와 기예를 닦고 무장(武裝)을 갖추어, 다른 부강한 국가들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어리석고 우매하며 술에 취하고 미친 것과 같아서, 세계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여 온 천하로부터 모욕을 자초하고 있으니, 이것은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동입니다. 신(臣)이 비록 배우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고 세계 사정에 어두우나, 이러한 조선의 사정은 부끄럽고 근심되는 바입니다. 또 천하의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이 어리석음과 우매함, 술 취함과 광기의 나라라는 것을 보게 한다면, 진실로 뜻있는 자 중에 그 누가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384)김갑천 옮김, 「박영효의 건백서(建白書)-내정 개혁에 대한 1888년의 상소문-」, 『한국 정치 연구』 2, 서울 대학교 한국 정치 연구소, 1990, 252쪽.

김옥균, 박영효, 어윤중 등은 메이지 일본을 모델로 한 국민 국가 수립 운동을 주도한 개화파 인사들이다. 이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근대화 운동을 주도하면서 국가 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내각 중심의 입헌 군주제와 제한적 대의 정치(代議政治) 도입, 경찰 제도의 창설과 법제의 근대화, 상비군(常備軍) 양성을 꾀하였다. 아울러 경제 통합의 방안으로 왕실 재정의 정리를 통한 정부 수입의 증대, 징세법(徵稅法) 개량, 새로운 세원(稅源)의 발굴, 정부 주도의 민간 상공업 진흥 등을 도모하는 한편, 이에 필요한 재정 수요를 일본에서 빌린 차관으로 조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이들은 국민 통합을 위해 전통적 신분 제도 철폐와 근대적 학교 제도 보급을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 육성하고자 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을 폐지하는 등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확보하려고도 하였다. 한마디로 이들은 일본을 모델로 한 국민 국가를 조선에 세우려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385)최영호, 「갑신정변론」, 『한국사 시민 강좌』 7, 일조각, 1990, 61∼75쪽 ; 유영익, 『갑오경장 연구』, 일조각, 1990, 204∼219쪽 ; 왕현종, 『한국 근대 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 비평사, 2003, 427∼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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