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1장 세계에 비친 우리나라 고대의 이미지
  • 2. 일본 사서에 보이는 우리 고대의 이미지
  • 육국사 편찬을 통한 자아 인식의 확립
윤재운

일본 고대의 대표적인 역사서 육국사(六國史)는 나라(奈良) 시대부터 헤이안(平安) 시대에 걸쳐 엮은 여섯 가지의 관찬(官撰) 역사책이다. 한문으로 쓰인 편년체 역사책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서기(續日本書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일본문덕천황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을 이른다.

『일본서기』에서 주변국에 대한 타자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을 보면, 왜국(倭國)의 주변국이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의 대외 관계에서 나타나는 교류를 ‘조공’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 율령 국가(律令國家) 지배층의 타자 인식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임나(任那)에 대한 기사가 많다는 점이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고대 우리나라 관련 기사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나라 사신의 일본 파견에 대해서는 조공사가 아닌 객(客)이라는 표현과 함께 국호를 대당(大唐)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의 인식 차이를 알 수 있다.

<표> 일본 고대의 관찬 사서
서 명 수록 시기 편찬 시기
일본서기(日本書紀) 가미요(神代)부터 696년 720년
속일본기(續日本紀) 697∼791년 797년
일본후기(日本後紀) 간무(桓武), 헤이제이(平城), 사가(嵯峨)·준나(淳和) 천황에 이르는 41년간 840년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833∼850년까지 859년
일본문덕천황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 850∼858년간 879년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858∼887년간 901년
유취국사(類聚國史) 신지(神祗), 제왕(帝王), 후궁(後宮), 정리(政理) 등의 사항을 종류별로 모아 연대순으로 편찬 892년
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 고닌(弘仁), 조간(貞觀), 엔기(延喜) 삼대 연간의 것을 의례, 신지, 불사 등의 내용에 따라 분류한 법령집 인세이(院政, 1086∼1192년) 시대 이전

대외적 타자 인식의 표현은 역사적 자기 인식의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왜의 역사적 자기 인식이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 시점에서 역사적 자기 인식의 형성 지표를 역사서의 편찬에서 찾는다면 왜의 역사적 자기 인식의 형성은 7세기 초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620년에 이르러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 신(臣)·연(連)·반조(伴造)·국조(國造)와 공민(公民) 등의 본기(本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5)『일본서기(日本書紀)』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28년. 한편 ‘일본’ 국호의 성립과 더불어 일본의 역사적 자기 인식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천황’이라는 군주호(君主號)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호는 대외적 외교 관계에서 사용된 호칭인 데 반해, 천황은 국내 정치를 목적으로 한 대내적인 자칭호(自稱 號)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호칭을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료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황 호칭의 성립은 일본적 화이사상의 성립과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천황은 국내에서는 신료와의 상하 관계에 따라 성립되지만, 대외적으로는 번신(藩臣)과 번병(藩屛)의 설정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적 소중화 사상의 성립에는 주변국의 번국화(藩國化)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율령 국가의 이념적 필요성에 따른 번국의 설정과 계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적 타자 인식의 성립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왜에서 일본으로의 국호 변화’와 ‘천황이라는 군주호의 성립’ 사건은 모두 7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왜국의 타자 인식의 변화는 7세기 동아시아 정세에 따른 고대 중국 지역에서의 당나라 성립, 통일신라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즉, 왜의 타자 인식은 660년 백제 멸망에 이은 백제 부흥 운동과 고구려 멸망이라는 정세 와중에 형성되었다. 이는 663년 백강(白江, 백촌강(白村江)이라고도 함. 지금의 금강 하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이 대외적·군사적 긴장 관계를 이용하여 국가 제도와 체제를 급속히 정비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정비는 백제에서 망명하여 온 수많은 백제 지식인층의 협조와 활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天智) 천황은 662년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의 구원 요청에 따라 파견군 파병과 함께 당시 왜에 거주하던 부여풍(扶餘豊)을 백제에 호송하면서 백제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하였다고 한다.6)『일본서기』 덴지 천황(天智天皇) 원년 하 5월. 이른바 왜왕이 백제 왕을 책봉한 것이다. 664년 3월에는 백제 왕 선광(善光)을 나니와(難波) 지역에 머물게 하였다고 하며,7)『일본서기』 덴지 천황 3년 3월. 686년 9월에는 백제 왕 양우(良虞)가 백제 왕 선광을 대신하여 조문을 읽었다고 한다.8)『일본서기』 덴무 천황(天武天皇) 원년 9월 정묘. 이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백제의 멸망과 백제 부흥 운동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통해 일본 국내에서 일본 왕이 백제 왕을 책봉한 일종의 ‘소백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신라가 행한 ‘보덕국(報德國)’의 책봉 행위와 책봉국의 존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이후 일본 율령 국가 지배층의 소중화 사상적 관념을 형성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율령 국가 형성기에 전개된 동아시아 정세의 혼란은 일본의 국가적 제도와 사상을 정비하는 역할을 하였다. 701년(다이호(大寶) 1)에 시행한 다이호 율령(大寶律令) 제정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다이호 율령 제정을 통해 관명(官名)과 위호(位號)를 개정하고 복제(服制)를 제정하는 것은 물론 위호도 고쳐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선진 기술과 지식은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여 당나라에서 직접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개혁을 통해 역사적 자아 인식의 대외적 표현으로서의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관찬 역사서인 『일본서기』이다. 이 사서를 편찬함으로써 일본의 타자 인식이 성립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 고대 국가가 자기를 인식한 지표로는 국호와 왕호의 정립, 역사서의 편찬을 들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