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1장 세계에 비친 우리나라 고대의 이미지
  • 2. 일본 사서에 보이는 우리 고대의 이미지
  •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보이는 우리나라 고대의 이미지
윤재운

먼저 『일본서기』의 우리나라 관련 자료는 대개 일본 내에서의 우리나라 사람 관련 자료와 우리나라 내에서의 일본인 관련 자료인데,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반도 제국(諸國)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신의 행적과 관련한 기사들이 있고, 둘째, 이른바 ‘귀화인(歸化人)’, 즉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 살고 있는 이주민과 관련한 기사가 있다. 셋째, 사신이나 장군 등으로 한반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간 왜인의 견문 및 경험담이 있으며, 넷째,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의 ‘백제 삼서 (百濟三書)’에 근거하여 백제나 가야의 상황을 서술한 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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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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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외국 자료라고 하면 첫 번째의 파견 사신 기사와 세 번째의 외국 견문이 한반도 관계 기사의 주류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일본 자료에는 두 번째의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으로 이민한 기사와 네 번째의 ‘백제 삼서’ 기사가 많고, 일본인이 우리나라로 이민한 기사는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서기』를 세 시기로 나누어 보면 우선 부레쓰기(武烈紀) 이전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대략 4세기에서 5세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 건수는 총 19회에 달한다. 이주민 가운데에는 사람이 아닌 신(神)도 있으나, 이는 신만의 이동이라기보다는 신을 모시는 사람들의 이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태의 근본 원인은 한반도 내에서 삼국 및 가야 사이의 세력 정립(鼎立)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많은 전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패배하거나 시달리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개척된 일본 열도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은 삼국 관계에 다시 작용하면서 연고 있는 사람 및 기술자 초청, 적대 지역 주민의 노획(虜獲)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이주민을 수용하였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많은 사람이 이민을 갔다는 기사는 『일본서기』 4세기에서 5세기경의 우리나라 관계 사료로서 가장 특이한 것임이 틀림없다. 자발적 이민자의 모국(母國)은 삼국 및 가야에 골고루 분포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고구려나 백제 사람으로 표현된 이들 다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대인 옛 대방군 지역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라인이나 가야인으로 표현된 사람들은 대부분 신라와 가야 접경지대인 낙동강 연안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4세기 후반은 고대 국가로 성장한 삼국 및 가야 사이에 세력 정립을 이루는 과정에 많은 전란이 일어났다. 그때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승자였고 백제와 가야는 패자였다. 그러므로 전쟁에 패배하거나 전화(戰禍)를 입은 한강 북부 지역의 백제인과 낙동강 유역의 가야인 상당수가 일본 열도로 대거 피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라에 대한 기사는 일본에 떠도는 설화를 정리한 것이므로, 대체로 부정확하고 허황하여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실상 많지 않다. 그러나 왜국이 신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가 왜국과의 교역에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왜국에 적극적으로 조공하였으며, 왜국은 백제에 여러 곳의 땅을 주고 왕위를 잇게 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백제와 왜국 간의 관계의 요점이다. 이때 왜국이 주었다는 땅이 주로 남해안과 서해안의 해변이나 큰 강가의 교통 요지였다는 점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왜국과의 교역 거점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 내에서 세력을 확장할 때 왜국을 끌어들였는데, 이것을 왜인이 과장하여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고구려는 객관적 대상으로서, 때로는 왜국을 무시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반면 임나, 즉 가야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이는 이 기사가 모두 가야 멸망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정립 이후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5세기까지의 대왜 관계는 가야가 주도하거나 중개하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본서기』에는 후대의 친백제적 관점만이 전 시대를 점철(點綴)하고, 가야와의 밀접한 관계는 편린(片鱗)으로만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일본서기』에 나타난 한반도 각국은 모두 왜국과 교류 관계를 맺고 있되 성격은 각기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비교적 소극적이었고, 백제는 적극적이었으며, 고구려는 소원한 상태였고, 가야는 빈번하 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이 부실하다.

이상의 교류 사실에는 4세기에서 5세기 당시 한반도 삼국의 재력이나 기술 수준이 왜국보다 한 단계 높았다는 점이 전제로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삼국이 왜국의 문명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과 대조적인 것으로, 양국 사서의 기록은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하여 왜국은 백제와 신라 문화의 도움을 받으며 고대 문화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의 내용 가운데 두 번째 시기는 게이타이(繼體)·긴메이기(欽明紀)로, 507년부터 571년까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자발적 이민 건수가 2회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한반도가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 열도에 이미 들어와 있던 한반도계 이주민에게는 커다란 변동이 있었다.

6세기에 이주민이 많지 않았던 이유는 삼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정립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 간에 지속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는 하였으나 국가의 존망(存亡)을 건 전쟁은 아니었다. 고대 국가로 성장한 삼국이 조세원(租稅源)으로서의 주민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에 백성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또 562년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체가 멸망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큰 전쟁 없이 신라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유망민(流亡民)은 발생하지 않았다.

백제가 왜국과 교류한 실태를 보면 512년부터 555년까지 43년 동안에 22회, 즉 2년에 1회꼴로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백제 성왕이 사비(泗沘)로 천도(遷都)한 538년 이후 554년 사망할 때까지 16년 동안에는 사신을 16회 파견하여 교류가 급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왜국과 교섭할 때 왜계 백제 관인(官人)을 활용하여 더욱 효과를 높였다. 이들은 원래 왜국의 유력 씨족이었으나 백제의 관료로 고용되 어 주로 백제 사신으로서 양국을 왕래하였다. 이때 이들은 백제의 선진 문물을 자신의 일족(一族)에게 전하고 그 대가로 그들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오는 역할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신라가 왜국과 접촉한 것은 함안(咸安)의 안라국(安羅國)을 병합한 것으로 추정되는 560년과 이듬해인 561년이었다. 그러나 왜국의 적대적 태도를 확인한 신라는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라파사산(阿羅波斯山)에 축성하였다. 562년(진흥왕 23) 신라는 대가야마저 병합하고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왜국에서는 이들을 강제 억류하였다. 이로 인해 이 시기의 양국 관계는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570년(평원왕 12)에 단 한 번의 대왜 사신을 파견하였을 뿐이다. 가야는 왜와 한반도 사이의 전통적인 중개 무역권을 행사하면서 독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백제가 보유한 문물의 양과 수준을 따라갈 수 없었던 탓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백제는 왜국에 대한 원거리 교섭에 치중함으로써 가야를 자연스럽게 부속시킬 수 있었으나, 왜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거대하고 독립적인 중앙 정권을 이루고 있던 왜국을 정면으로 상대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매우 더디고 비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서기』의 비다쓰기(敏達紀) 이후 기록에 나타난 한국 고대 이미지를 살펴보자. 비다쓰기 이후란 『일본서기』 권20 비다쓰(敏達) 천황 원년(572)부터 권30 지토(持統) 천황 10년(696)까지를 말한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 이후 백제에서 왜국으로 망명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은 그들 사이의 친근성을 반영한다. 그 가운데 60여 명이 일본의 중앙 관료로 대폭 영입된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대등한 대왜 교류가 있었다. 고구려의 대왜 사절 파견은 573년부터 682년까지 110년간 총 28회였다. 570년의 사신단 표착 이후 570년대는 모색 단계로 보이고, 605년과 625년 사이에는 불교 전수를 매개로 하여 초보적인 교섭이 이루어졌다. 640년 이후에는 사신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구려는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에 망명한 안승(安勝)의 무리가 세운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575년부터 671년까지 96년 동안 총 35회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고구려보다 7회가 많은 숫자이다. 신라는 574년부터 695년까지 121년 동안 총 49회였다. 이는 고구려보다 21회 많고, 백제보다 14회 많은 사절 파견이었다.

비다쓰기 이후에 나타나는 삼국의 대왜 사절 파견 횟수를 보면 고구려는 28회, 백제는 35회, 신라는 49회로 신라가 가장 많다. 그러나 670년 이후의 사절 파견을 제외하고 동일한 조건에서 비교해 보면 고구려는 20회, 백제는 32회, 신라는 31회로 백제와 신라는 비슷하고, 고구려는 그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대왜 교섭 경쟁에서 백제가 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신라도 외교력을 통하여 백제 멸망 전까지 왜국이 삼국 관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백제 부흥군은 마지막 순간에 셋으로 갈려 한 부류는 백강 입구에서 고구려로 도망하였고, 한 부류는 주류성에 있으면서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였으며, 한 부류는 주류성에서 빠져나와 왜국으로 도망하였다. 그에 반하여 고구려의 멸망이나 고구려 부흥군의 실상에 대해서는 거의 전하는 것이 없어 『일본서기』의 백제 편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제 부흥군에 대한 내용은 다른 기록에 없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속일본기』는 720년에 편찬한 『일본서기』에 이어 797년에 두 번째로 편찬한 일본기를 말하며, 일본국에 대해 기록한 편년체의 역사서이다. ‘일본기’란 원래 중국에 대해 일본의 역사서를 나타내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었다. 『일본서기』에 이은 정사인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등 에 일본기의 이름을 넣어 부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속일본기』 등의 문헌에 나타난 일본과 신라, 발해의 관계는 한마디로 종주국과 번병, 부용국(附庸國)의 종속 관계였으며, 일본 지배층은 중국 왕조의 주변 제국에 대한 책봉 관계를 모방하여 신라, 발해에 중화 의식을 표방하였다.

먼저 『속일본기』에 나타난 신라에 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 신라와 일본은 백강 전투 이후 668년에 외교 사절을 교환하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이 시기에 신라는 당나라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므로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어 후방의 안전을 꾀하고 백제 유민의 일본 원조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일본은 백강 전투로 당나라와 적대 관계가 되어 30여 년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신라를 통해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일본의 율령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7세기 말에 외교 관계를 재개하였으나, 이후 일본 지배층이 신라를 ‘번국’으로 인식하여 양국은 점차 대립 관계가 되었다.

참고로 당나라에는 황제가 자신의 의지를 번국의 왕에게 전달하는 문서로서 책봉에 사용하는 책서(冊書), 위로제서(慰勞制書)인 조서(詔書)와 논사칙서(論事勅書) 등이 있었다. 위로제서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황제경문모(皇帝敬問某)’이며, 다른 하나는 ‘황제문모(皇帝問某)’이다. 논사칙서는 ‘칙모(勅某, 성명, 국왕, 왕)’로 시작하는 서식이다. 위로제서와 논사칙서 가운데 위로제서가 격이 높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황제경문모’로 시작하는 서식이 정중하며 상대를 평가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일본 왕은 명목적이고 형식적이지만 신라 왕을 번국 왕으로 인식하여 ‘천황경문모왕(天皇敬問某王)’으로 시작하는 외교 문서를 사용하였다. 나아가 일본은 신라에 번국 왕이 제출하는 상표문(上表文)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구두로 일본에 조공국이라 말할지라도 그것을 명문화(明文化)하여 증거가 될 만한 문서를 제출할 리는 만무하였다.

730년대에서 740년대에 걸쳐 양국의 외교 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752년(경덕왕 11)에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 공조사(貢調使) 대사 김훤(金喧), 송왕자사(送王子使) 김필언(金弼言) 등이 일본에 갔다. 이 사절은 기존과 달리 공조사이며, 모두 7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그 가운데 김태렴 등 370여 명이 입경(入京)하였다. 『속일본기』 752년 6월 14일조에 따르면 김태렴 일행은 조물(調物)을 바치며, “신라국은 먼 옛날부터 대대로 (일본) 국가에 조공을 바쳐 왔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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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이지(東大寺) 다이부쓰덴(大佛殿)
도다이지(東大寺) 다이부쓰덴(大佛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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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렴을 비롯한 상급 관인의 목적은 헤이조쿄(平城京)의 여러 사원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을 참배(參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사절을 수행한 것은 신라 상인(사절 일행의 중하급 관인 가운데에는 상업적 행위를 하는 인물도 상당히 있었다)이었는데, 그들은 일본 지배층과 교역 관계를 맺었다. 즉, 신라 측의 김태렴은 ‘도다이지 참배’와 ‘교역’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700여 명의 대규모 사절을 이끌고 구주(口奏, 공식 문서를 제출하지 않고 말로만 아뢰는 것)라는 편법으로 입경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문서로 남아 있지 않는 한 본국 정부로부터도 추궁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교역이 가능한 것은 다자이후(大宰府) 등에 신라 상인이 빈번히 왕래하였음을 말해 준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 상인이 빈번히 내왕하였으나 그 전조는 8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속일본기』 759년 9월 정묘조에 따르면 다자이후에 칙령을 내려 “근년에 신라에서 귀화하는 배들이 끊이지 않는데 부역의 고통을 피하 기 위해 멀리 무덤이 있는 고향을 버리고 와, 그 생각함을 말하면 어찌 돌아보고 그리워함이 없겠는가.”라는 기록에서 750년대, 즉 경덕왕 말년부터 많은 신라인이 다자이후를 왕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속일본기』는 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실제로 그들은 일종의 상인층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신라인이 다자이후에 정착하여 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호족층과도 본격적인 교역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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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유적 전경
다자이후 유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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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발해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살펴보자. 신라는 『속일본기』 초기인 8세기 초부터 번(藩)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발해는 750년대 이후 번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선 『속일본기』의 편찬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간무(桓武) 천황은 쇼토쿠(稱德) 천황계의 황통과 다른 덴지(天智) 천황계로, 새로운 왕조의 창시자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간무 천황은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750년 이후의 『수사(修史)』 권21∼40을 먼저 편찬하였다.

또 하나는 신라와 일본 간의 갈등, 긴장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750년대 이후 신라와 일본 양국은 석차(席次) 문제 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여 사절을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강경책을 취하였다. 일본 지배층은 신라에 이어 발해마저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졌을 것이며, 이것이 발해에 대한 강경책을 취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앞서 언급한 신라와 같은 위로조서(慰勞詔書)의 형식, 즉 ‘천황경문발해군왕(天皇敬問渤海郡王)’으로 시작하는 외교 문서를 사용하였다. 같은 열국(列國)의 군주(제후)로 인식하여 선린 우호(善隣友好)를 요청하고 있는 대무예(발해 무왕)에 대해 일본 측은 발해 왕을 완전히 신하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후 발해 왕의 계(啓)와 일본 천황의 위로조서를 서로 교환하였으나, 국교 개시부터 양자 간에 발생한 인식의 차는 그 후 발해의 사신이 지참한 문서의 서식과 문언(文言)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대한 발해 측의 대응은 『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같은 책 권18, 828년 정월 2일의 관부(官符)는 외국에서 건너온 상인과의 교역에 관한 일반적인 법률로 생각되나, 발해에 관한 관부와 함께 열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나 신라를 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금령(禁令)이 발포(發布)되었다는 것은 현재 발해사의 도착을 통해 사무역이 전개되었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이전부터 국가 간의 교역 시스템을 능가하는 교역이 행해지고 있어 이를 염려하여 국가가 직접 금령을 내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신라는 8세기 중엽부터 다자이후를 중심으로 상인이 왕래하며 사무역을 전개하였으나, 발해는 지리적인 관계로 신라와 같은 사적 경로를 찾지 못하였다. 따라서 발해는 일본 측의 만류에도 공적인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상을 통해 보았을 때, 일본은 신라와 발해에 대해 상당히 명분에 집착한 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당나라의 중화 의식을 모방한 소중화 의식에 입각하여 신라와 발해를 번국으로 보는 관념이나 당나라 황제의 중화 의식을 모방하여 신라나 발해를 하위에 두려는 외교 문서로 일관한 점 역시 그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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