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1. 동아시아 정세와 여송 관계
  • 국교 수립과 단절
김난옥

이방인의 눈에 비친 타국의 모습은 실제 경험한 당사자의 가치관, 성향, 의식 등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간에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러한 경향은 중세 사회가 현대보다 더 클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10세기부터 12세기 중국인이 바라본 고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정세나 여송(麗宋) 관계 등에 대한 고찰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고려와 송나라 양국의 외교 관계는 962년(광종 13)에 고려가 먼저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송나라에 파견함으로써30)『고려사(高麗史)』 권2, 세가(世家)2, 광종 13년 ; 『송사(宋史)』 권1, 본기(本紀)1, 태조 건륭 3년 11월 병자. 시작되었는데, 조광윤(趙匡胤)이 오대(五代)의 후주(後周)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태조로 즉위한 지 2년 만이었다. 이보다 앞서 고려는 후주와 잦은 교류를 통해 중국식 정치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국신물(國信物)의 교환을 통한 공무역(公貿易)도 성행하였다.31)김상기, 「고려 광종의 치세」, 『국사상의 제 문제』 2, 국사 편찬 위원회, 1959, 90쪽. 광종대의 왕권 강화책은 후주 세종 때의 정책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아 시행되었다.32)이기백, 「고려 초기 5대와의 관계」, 『한국 문화 연구원 논총』 1, 이화 여자 대학교, 1960 : 『고려 광종 연구』, 일조각, 1981, 140쪽. 따라서 고려와 후주의 긴밀한 관계는 여송 관계로 순조롭게 이어질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대개 10세기부터 12세기 고려와 북송 간의 외교는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의 관계로 표현한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국내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가 초래되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 양국 간 외교 관계의 흐름은 거란, 여진 같은 북방 국가의 흥기(興起)와 쇠퇴 등에 따른 동아시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외교 관계가 지속되거나 단절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런데 여송 관계는 굴곡이 있기는 하였으나 남송에 비해 북송 때 좀 더 긴밀하게 유지되었다. 1127년 북송은 여진이 건국한 금나라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납치당하는 정강(靖康)의 변란이 발생하자 남하하여 남송을 세우게 되었다. 고려 역시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여송 관계는 북송대에 비해 멀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은 북송 말기에 저술한 것으로 대개 북송 시기의 고려관(高麗觀)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와 북송 관계의 흐름은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양국이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962년부터 거란의 고려 침입 이후 공식적인 국교를 단절하는 994년까지이다. 제2기는 양국이 외교 관계를 복구하는 1071년(문종 25)까지이며, 제3기는 이때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126년(인종 4)까지이다.33)전해종, 「고려와 송의 교류」, 『국사관 논총』 8, 국사 편찬 위원회, 1989 ; 『동아시아사의 비교와 교류』, 지식 산업사, 2000, 85∼89쪽 ; 신채식, 「송대 관인의 고려관」, 『변태섭 화갑 기념 사학 논총』, 삼영사, 1985, 1200쪽 ; 박용운, 「고려·송 교빙의 목적과 사절에 대한 고찰」 상·하, 『한국학보』 81·82, 일지사, 1995·1996 ; 『고려 사회의 여러 역사상』, 신서원, 2002, 150쪽 참조.

제1기의 양국 관계는 비교적 순탄하게 지속되었다. 고려는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듬해인 963년(광종 14)부터 송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으며, 고려 국왕으로는 처음으로 광종이 송나라의 책봉을 받은34)『송사』 권487, 외국3, 고려. 이후로 이른바 조공-책봉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송 관계는 거란의 흥기라는 변수에 의해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이 발생하면서 여송 관계는 중단 위기를 맞이하였다. 고려는 이듬해에 원욱(元郁)을 송나라에 보내 거란의 침 입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송나라는 자국의 북방 사태가 겨우 평안해졌으므로 경솔하게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35)『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13년 6월. 양국 관계가 단절되었다. 사실 군사적 제휴 요청은 송나라에서 먼저 한 적이 있었다. 송나라는 오대시대(907∼960)에 후진(後晉, 936∼946)이 나라를 세울 때 거란의 도움을 받은 대가로 떼어 준 연운(燕雲) 16주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군사 원조를 요청한 일이 있었지만,36)『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4년 하 5월. 결과적으로 고려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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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는 이유로 “고려가 자국과 땅을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는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 본래 목적이 고려와 송나라의 교빙(交聘) 관계를 고려와 거란의 관계로 대치(代置)하려는 데 있었음을37)김상기, 「단구와의 항쟁」, 『국사상의 제 문제』 2, 국사 편찬 위원회, 1959, 127쪽. 보여 준다.

하지만 거란의 요구 때문에 여송 관계가 공식적으로 단절된 직후에도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비공식적으로 양국 간의 교류를 지속하였다. 거란은 이에 대한 불만과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와 소손녕(蕭遜寧)의 담판 결과로 고려에 넘긴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고 이곳의 탈환을 절실하게 원하였다.38)방동인, 「고려 전기 북진 정책의 추이」, 『한국의 국경 획정 연구』, 일조각, 1997.

결국 거란은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에 제2차 고려 침입을 단행하였다. 이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의 통교(通交)를 철저히 막음과39)김상기, 「단구와의 항쟁」, 『국사상의 제 문제』 2, 국사 편찬 위원회, 1959, 134, 138쪽.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돌려받으려는40)이용범, 「여단 무역고」, 『동국 사학』 3, 동국 대학교 사학회, 1955, 31∼36쪽. 목 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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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자명 동경(契丹字銘銅鏡)
거란자명 동경(契丹字銘銅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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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제2차 전쟁을 종결하는 협상에서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친조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 대신 1014년(현종 5)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빙을 요청하였다.41)『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권83,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 12월 정묘에는 1014년(현종 5)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이 길을 막아 오랫동안 통할 수 없었으니, 황제 존호(尊號)와 정삭(正朔)을 내려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가 실제로 송나라의 연호를 쓴 것은 1016년부터이다(『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7년).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018년에 거란의 제3차 침입이 발발하였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친 양국은 화약(和約)을 맺었으며, 이후 대체적으로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 결국 1022년(현종 13)에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다시 거란의 연호인 태평(太平)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42)『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3년 4월.

결국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출현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구도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였다. 대체로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일원적인 책봉 체제가 새로운 역학 관계에 의해 변동되었던 것이다. 즉, 1004년(목종 7) 거란의 성종은 군대를 대거 동원하여 송나라로 진격하였으며, 군사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송나라는 서둘러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송나라는 요나라에 해마다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세폐(歲幣)로 바치기로 하고 형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요나라는 송나라와 대등한 관계로 격상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려는 거란의 강압으로 마지못해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의 책봉을 받았으며, 후대에 서하(西夏, 1032∼1227)는 송나라와 요나라 모두에게 책봉을 받았다. 따라서 이는 기존에 중국 중심으로 형성된 일원적 책봉 체제가 부정되고 이원적인 형태로 변질, 분할된 것으로43)김성규, 「고려 전기의 여송 관계」, 『국사관 논총』 92, 국사 편찬 위원회, 2000, 38∼39쪽.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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