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1. 동아시아 정세와 여송 관계
  • 우호 관계의 재개와 국제 정세
김난옥

고려와 송나라의 국교는 1071년(문종 25)에 이르러 재개되었다. 이때 거란은 이미 힘을 잃어 가고 있었고,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송나라가 고려와 통교하여 거란을 견제하고자 하는 외교 정책을 펴고 있었기44)이병도, 「대송 관계」, 『한국사』 중세편, 을유 문화사, 1961, 389쪽 ; 전해종, 「대송 외교의 성격」, 『한국사』 4, 국사 편찬 위원회, 1974, 335∼336쪽.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가 복원되기 이전에 이미 양국에서 우호 관계의 회복 조짐이 나타났다. 특히 문종은 송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45)이는 문종이 변화하는 국제·사회 환경에서 국정 운영상 왕의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제(官制), 전시과(田柴科) 제도의 개정 등과 아울러 송나라, 요나라, 거란과의 대외 관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채웅석, 「11세기 후반∼12세기 전반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와 고려」,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 질서』, 일조각, 2006, 138∼140쪽 참조). 1058년(문종 12) 탐라와 영암에서 목재를 베어 큰 배를 건조하여 송나라와 통교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는 거란을 자극할 수 있고, 이로 인한 공역(工役)으로 백성들이 피폐해질 것이며, 이미 우리의 문물 예악(禮樂)이 흥성하고 중국 상인의 왕래가 잦기 때문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46)『고려사』 권8, 세가8, 문종 12년 8월 을사. 문종의 시도는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지만, 그동안 단절되었던 여송 관계의 국면이 전환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송나라에서도 대외 관계상 고려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였다. 이는 군사적으로 막강한 위력을 가진 거란 때문이었다. 거란의 압박을 받아 세폐를 증액하게 되자 송나라는 거란에 대응할 목적으로 연려제요론(聯麗制遼論)을 제기하였다. 고려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제어하려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이러한 연려제요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부필(富弼, 1004∼1083)이었다.

고려와 송나라는 저마다의 필요성에 따라 두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바라면서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1069년(문종 23)에 고려 예빈성(禮賓省)에서 송상(宋商)47)고려와 송나라 관계에서 송상(宋商)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1012년(현종 3) 상인 육세녕(陸世寧) 등을 시작으로 북송이 멸망하는 1126년까지 기록상 총 94회에 걸쳐 도래하고 있으며, 한 차례에 내항한 인원은 20∼150명에 달하였다(전해종, 앞의 글, 1989, 94∼99쪽 참조). 황진(黃眞)48)『고려사』 권8, 세가8, 문종 22년 추 7월 및 24년 추 7월조에는 ‘송인 황신(宋人黃愼)’으로, 『송사』 권331, 열전(列傳)90, 나증전(羅拯傳)에는 ‘상인 황근(黃謹)’으로 기록되어 있다.을 통해 송나라의 관료 나증(羅拯)에게 외교 관계 재개를 타진하였으며, 나증이 다시 황제의 밀지(密旨)를49)『고려사』 권8, 세가8, 문종 22년 추 7월 신사. “송나라 사람 황신이 와서 왕을 알현하고 이르기를, ‘황제께서 강회양절형호남북로 도대제치발운사(江淮兩浙荊湖南北路 都大制置發運使) 나증을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고려는 옛날부터 군자의 나라라고 칭하고 조상 때부터 우호를 부지런히 닦았는데 후세에 이르러 단절된 것이 오래되었다. 지금 들으니 그 왕이 현인이라 하니 사람을 보내어 밝게 깨우치게 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시매 이에 나증이 아뢰어 황신 등을 보내므로, (이에) 와서 천자(天子)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접대를 후하게 하였다.” 황진에게 주어 고려에 보내와 국교 재개의 길을 마련하였다. 마 침내 1071년에 고려에서 김제(金悌)를 사신으로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 외교 관계가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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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문자명 동경(女眞文字銘銅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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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송나라의 고려 사절에 대한 예우가 서하와 동격으로 격상되었다.50)『송사』 권487, 외국(外國)3, 고려 희녕 2∼3년. “고려의 예빈성(禮賓省)에서 복건 전운사(福建轉運使) 나증에게 공첩(公牒)을 보내어 이르기를, ‘우리 고려가 궁벽하게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면서도 멀리 중국을 연모하여 조상 때부터 항상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왕래하기를 바랐습니다. …… 오랫동안 (요나라의)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비우호적으로 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술직(述職)을 어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 지금 황진(黃眞), 홍만(洪萬) 등이 서쪽으로 귀국하는 편에 공문을 부치니 답장을 받아 보고서 즉시 예를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 나증이 이 사실을 아뢰자, 조정에서 의논한 사람들도 거란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 위하여 고려와 우호를 맺어야 한다고 하니, 신종이 그렇게 하도록 윤허하고 …… 휘(徽, 문종)가 마침내 민관시랑 김제(金悌) 등 100여 명을 파견하니, 그들을 하국(夏國)의 사신들과 똑같이 대우하도록 조칙하였다.” 아울러 고려 사절에 대한 숙박, 연회, 이동 등 영송(迎送) 절차가 마련되고 관련 시설이 증치(增置)되는 등 우대책이51)김성규, 앞의 글, 46∼52쪽. 구체화되었다. 마침내 휘종 때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거란에 대해서만 적용하던 국신사(國信使) 칭호를 고려 사신에게도 사용하게 하고 의례는 서하보다 상위에 두도록52)『송사』 권487, 외국3, 고려 정화 연간(政和中). 변경하였다.

이후 양국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2세기 초에 여진족이 일어나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양국 관계는 또다시 변동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여진인의 야만성(野蠻性)을 지적하면서 송나라가 여진과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만류하였다.53)김상기, 「고려와 금·송과의 관계」, 『국사상의 제 문제』 5, 국사 편찬 위원회, 1959 : 『동방학 논총』,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74, 576∼578쪽. 그런데도 송나라는 여진과 연합하여 1125년(인종 3)에는 거란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곧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변경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 등을 납치한 정강의 변란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북송시대는 막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여송 관계의 흐름은 변화와 굴곡을 겪었다. 그리고 고려와 송나라 양국의 입장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건국 초기 이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한 송나라는 고려를 통해 강성한 북방 국가를 견제하려는 이른바 연려제요의 목적을 이루려는 성향이 강하였다. 고려도 군사적인 목적이 없지 않았으나,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려는 문화적 욕구가 좀 더 우선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양국 관계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각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변동되었다. 결국 이러한 국제 정세 및 외교 관계의 변동은 당시 사람들의 타자 내지 타국에 대한 인식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의 저자인 서긍이 고려를 찾은 때는 1123년(인종 1)으로 북송 말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려도경』에 비친 고려의 모습과 그에 대한 서긍의 인식은 양국 관계의 지나간 역사와 당시 정치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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