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2. 송나라 사대부의 고려 인식
  • 부필, 증공의 친고려 정책
김난옥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 관계는 국내·국외 정치 상황에 따라 기복이 있었으며, 송나라 관료의 고려에 대한 인식도 그에 따라 좌우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더구나 북송대 이른바 구법당(舊法黨)과 신법당(新法黨)의 외교 노선은 동아시아 정세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며, 고려에 대한 태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이후 공식적인 여송 관계는 한동안 단절되었다. 하지만 1071년 양국 간 공식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의 공백기에도 경제적·문화적 교류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사무역(私貿易)이 활성화되어 매년 50명 내외의 중국 상인이 고려에 들어왔으며,54)김상기, 「여송 무역 소고」, 『동방 문화 교류사 논고』, 을유 문화사, 1964, 189∼193쪽. 불승(佛僧), 의관(醫官), 내투인(來投人)을 비롯한 인적 교류와 각종 서적 및 음악의 교류도55)전해종, 앞의 글, 1989, 103∼108쪽. 비교적 활발하였다. 공식적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경제적·문화적 방면의 교류를 통해 실질적인 우호 관계가 지속되었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공식적 외교 관계가 단절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고려와의 우호 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주요한 배경은 송나라가 북방, 특히 거란을 제어하기 위한 방어책을 수립하는 데 있었다. 다음은 1044년(정종 10)에 추밀원사(樞密院使) 부필이 ‘하북 지역을 지키는 12가지 방책(河北守禦十二策)’으로 제시한 내용 가운데 고려와 관련된 부분이다.

옛날에 외환(外患)이 있으면 이적(夷狄)으로 이적을 치는 것을 중국의 이로움으로 여겼습니다. …… 거란이 힘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자 고려가 역시 힘써 싸웠지만 후에 부득이하여 신하가 되었습니다. 거란은 그것이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항상 힘써 제어하였지만, 고려는 끝내 조정(송나라)에 귀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조정에서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이 헤아리기에 거란은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까 의심하여 끝내 모든 무리를 이끌고 감히 남하할 수 없을 것입니다.56)『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부필은 고려가 송나라에 귀순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처지를 납득하는 한편, 양국 간 외교 정상화가 거란을 방어하는 중요한 방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의 도움을 얻는다면 거란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좋은 계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송나라가 북방을 지키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제시된 것으로, 결국 이이제이의 군사적 대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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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필의 주장은 군사적 대응책의 일환으로 당시 어려운 송나라의 처지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양국 관계의 복원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송나라 조정 내부에서 고려와 연합하여 거란을 방어하자는 견해를 경계하는 관료가 다수였으며, 서하의 자립으로 송나 라는 소극적 방어 체제로 외교 정책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1038년(정종 4)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한 서하는 송나라의 서북 지방을 공략하였으며, 이후 송나라는 잇따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점차 수비 위주의 전략으로 변경하였다. 나아가 송나라는 상당한 양의 비단, 은, 차를 서하에 증여하고 국경의 요지에 각장(榷場)을 설치하여 그들의 경제적 요구를 해소하여 주었다. 또한 거란의 공물(貢物) 증액 요구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여송 무력 연계론은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57)신태광, 「북송 변법기의 대고려 정책」, 『동국 사학』 37, 동국 대학교 사학회, 2002, 652∼655쪽.

이후 신종이 즉위하여 대외 경략책을 추진함에 따라 연려제요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다음은 나증이 상소한 내용이다.

희녕(熙寧) 2년(1069)에 전(前) 복건로 전운사(福建路轉運使) 나증이 천주인(泉州人) 황진이 갖추어 올린 문서에 의거하여 말하였다. “황진이 일찍이 장사꾼으로 고려에 가니 예빈성에 머물게 하면서 정성을 보이며 성화(聖化)를 흠모하였다고 하였답니다. 선조 이래로 조정에 조공하였으나 천성 연간(天聖年間, 1023∼1031)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로 오랫동안 술직(述職)을 하지 못하였으니 사신을 황진과 함께 보내고자 하나 의례에 어긋날까 감히 파견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예빈성의 공문을 보내왔으니 자세히 살펴보고 시행하기 바랍니다.”58)나준(羅濬),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 6, 서부(敍賦) 하(下) 시박(市舶) ; 장동익, 『송대 여사 자료 집록(宋代麗史資料集錄)』,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0, 117∼118쪽.

나증의 상소는 고려가 송나라와 통교할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즉, 고려가 송상 황진을 통해 국교 재개를 타진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양국 관계가 공식적으로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이전에 부필이 하북을 방어하는 계책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와 연합하여 거란을 도모하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신종이 수용하여 양국 관계가 회복되었다.59)『송사』 권487, 외국3, 고려. 이른바 연려제요론에 입각한 양국 우호 관계의 증진책이었다.

아울러 신종대 여송 관계는 신법(新法) 추진의 중심인물인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개혁 방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왕안석의 대외 경략책에는 고려와의 우호를 통한 거란 견제, 즉 연려제요책을 복원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으므로,60)신종과 왕안석이 계획을 세워 추진한 대외 강경책의 요점은 애초 목표로 삼았던 연운 16주의 탈환이 당시 송나라의 군사력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므로, 먼저 요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서하를 경략하고 여세를 몰아 요나라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왕안석의 대외 경략책은 요나라, 서하 등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당시 관료의 일반적 성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송나라가 고려 사신을 초치(招致)한 것은 이러한 대외 경략책의 한 가지였다. 이범학, 「소식의 고려 배척론과 그 배경」, 『한국학 논총』 15, 국민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2, 95∼97쪽 참조. 여송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생길 상황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법당의 대외 강경책은 민생 안정을 우선시하는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 거란과의 친선을 강조한 한기(韓琦, 1008∼1075)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인종 때에는 고려와 연합할 것을 주장하였던 부필도 기존 견해를 바꾸어 전쟁을 하지 말자는 ‘식병론(息兵論)’에 가세하기에 이르렀다.61)신태광, 앞의 글, 658∼662쪽.

이처럼 여송 관계는 시대 상황에 따라 기복이 있었는데, 송나라는 문종 후반에서 선종 초반에 해당하는 원풍 연간(元豊年間, 1078∼1084)에 이르면 고려에 대하여 우대 정책을 두드러지게 펼친다. 당시 친고려적인 대표적 인물로는 증공(曾鞏, 1019∼1083)을 들 수 있다.

가만히 보건대 고려는 만이(蠻夷) 가운데 문학에 통하여 자못 지식이 있으므로, 덕으로 품어야지 힘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렵습니다. …… 송나라가 건국한 건륭 연간(建隆年間, 960∼962) 이래로 그 왕 왕소(王昭, 광종) 이후 여섯 왕이 계속하여 조공과 술직을 닦아서 사신이 서로 이어졌는데, 그 중간에 강성한 오랑캐의 압박으로 천성 연간(1023∼1031) 이후에는 비로소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가 즉위하여 덕화(德化)가 사방에 미치니 그 나라가 소식을 듣고 감히 편안히 쉬지 않고 강력한 오랑캐로 인한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넓은 바다의 험난함을 걱정하지 않고서 토산물(土産物)을 바치러 5년 동안에 세 번이나 이르렀습니다. …… 오는 자에게는 병(兵)으로써 위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신이 생각하기에 덕으로서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62)『원풍류고(元豊類藁)』 35, 주장(奏狀), 「명주의사고려송견장(明州擬辭高麗送遣狀)」 ; 장동익, 앞의 책, 321∼322쪽.

이 글은 양국 관계 회복 이후 고려 사신단이 중국에 도착하여 명주(明州)에서부터 경사(京師)로 가는 도중에 경과하는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후하게 접대할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는 건의 중에 나온 내용이다.63)장동익, 앞의 책, 323쪽. 증공의 이러한 견해는 신종이 고려 국왕에게 보낸 국서(國書)에서 외교적 수사를 넘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다. 아울러 증공은 고려를 호평하면서 고려 사절이 상납하는 비용이 막대하므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64)신채식, 앞의 글, 1204∼1205, 1216∼1220쪽.

고려에 대한 송나라의 우호적인 태도는 실질적으로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원풍 연간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고려의 사신이 통과하는 주(州)마다 모두 관사를 신축하고 따로 창고를 만들어 공물을 보관하였으며, 처음 도착하면 태수가 근교까지 마중 나오고 전송할 때도 마찬가지일 정도로 양국이 더욱 친근해졌다. 하지만 고려 사절이 통과하는 주현에서 사선(私船)이나 물자를 민간에서 징발(徵發)하는 과정에서 피해가 막대하여 종종 사회 문제로 비화(飛火)되기도 하였다.65)이에 대해서는 신태광, 앞의 글, 665∼666쪽 ; 김성규, 앞의 글, 46∼48쪽 참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나라 관료의 친고려적 인식은 대외 정세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고려는 문물제도가 정비된 국가이고, 군사적 위력이 아닌 덕으로 교화하여야 할 대상이라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성에서 친선 관계의 회복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필, 증공 같은 송나라 관료의 친고려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이제이의 전략이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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