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2. 송나라 사대부의 고려 인식
  • 한기, 소식의 고려 배척론
김난옥

북송 시기에 부필과 증공처럼 친고려적 입장을 취한 관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반고려적 논의가 더 두드러졌다. 1071년(문종 25)에 고려와 송나라가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회복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미 양국 간 우호 관계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1075년(문종 29)에 한기는 친선 관계의 회복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고려는 거란에 신속(臣屬)하고 조정에 조공을 끊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난번 절로(浙路)에서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여 다시 오게 되었지만 고려는 작은 나라이니 어찌 능히 거란의 강성함을 당하겠습니까. 고려가 오거나 말거나 송나라에게는 손익(損益)이 없는데 만일 거란이 알게 되면 조정이 장차 저희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니 거란의 의심만 사게 됩니다.66)『속자치통감장편』, 희녕 8년 4월 병인.

한기의 고려관 역시 송나라의 현실적 이익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는 송나라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거란의 의심을 받아 송나라가 곤란한 지경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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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려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는 철종대 이후 더욱 고조되었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소식(蘇軾, 1037∼1101)의 오해론(五害論)이다. 그는 고려 사신이 매번 올 때마다 조정과 회절(淮浙) 지역이 내려 준 영송례(迎送禮)와 연회에 드는 비용이 10여만 근이나 되는 데 비해 송나라는 터럭만큼도 이로움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섯 가지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고려에게서) 얻은 바의 공헌물(貢獻物)은 모두 노리개로나 쓸 만한 무용지물(無用之物)이나 (송나라가) 소비하는 바는 모두 내탕(內帑)의 쓸모 있는 것들로서 백성의 고혈(膏血)이니 그 해로움의 첫째입니다.

(고려 사절이) 이르는 곳마다 말과 물품을 빌리고 통행 과 시장을 어지럽히며, 관사를 수리하고 장식하는 데 민력(民力)의 수고로움을 배가하니 이것이 두 번째 해로움입니다.

고려가 얻은 바의 사여품(賜與品)을 만약 거란에 나누어 보내지 않았다면 거란이 어찌 그들이 (송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묵인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이는 도적의 병사를 빌리고 군량을 보태 주는 것이니 세 번째 해로움입니다.

고려가 명분으로는 의(義)를 사모하여 내조(來朝)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로움을 위한 것이며, 본심을 헤아려 보면 끝내 반드시 북쪽 오랑캐에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랑캐는 충분히 고려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절이 이르는 곳마다 산천 지형(山川地形)을 그림으로 그려 허실을 엿보고 있으니 어찌 선의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해로움입니다.

경력 연간(慶曆年間, 1041∼1048)에 거란이 맹약(盟約)을 깨고자 할 때 먼저 당박(塘泊)을 증치(增置)한 것을 중국의 허물로 삼았는데, 지금 그 나라를 불러들여서 해마다 조공하게 한다면 그 허물은 당박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거란이 공순(恭順)하여 감히 일을 만들지 않지만, 만일 다른 교활하고 걸출한 오랑캐가 나타나서 이것을 구실로 삼으면 조정에서는 어떻게 여기에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해로움입니다.67)소식(蘇軾), 『소동파전집(蘇東坡全集)』 주의집(奏議集) 13, 「논고려매서이해차자 삼수(論高麗買書利害箚子三首)」 ; 장동익, 앞의 책, 308쪽.

이처럼 소식은 고려와의 제휴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해로움으로 고려의 조공품은 무용지물인 반면 송나라에서 회사(回賜)하는 물품은 귀중품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으로 부적절한 교환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두 번째 해로움으로는 고려 사절이 도래하여 이동하는 과정에서 민력을 소모하고 민간을 소란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는 고려와의 통교가 송나라에게 외교적·군사적으로 불리함을 초래한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소식은 고려가 송나라에게 받은 물품이 오히려 거란 쪽으로 흘러 들어갈지 모른다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고려 사신이 군사적·지리적 정보를 누설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한편으로 고려와의 외교 교섭이 거란의 의심을 사서 평온한 송요 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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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입극도(蘇東坡笠屐圖)
소동파입극도(蘇東坡笠屐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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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소식의 오해론에 대해서는 소식이 정치적으로 구법당에 소속되어 있어 신법당이 진행한 연려제요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의도가 강하며, 문화적으로는 중화주의(中華主義)를 바탕으로 한 편협한 화이론(華夷論)에 얽매여 소국(小國)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려는 의도에서68)신채식, 앞의 글, 1216쪽.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요나라나 서하에 대한 소식의 적대적인 자세로 보면 고려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소극적이며 온건한 차원에 그치고 있으므로, 그의 고려 배척론은 요나라 등 강대국의 압박에 대한 반발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69)이범학, 앞의 글, 83∼84쪽. 제기되었다.

소식의 고려 배척론 역시 연려제요책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송나라의 연려제요책은 요나라를 자극하여 1072년(문종 26) 양국 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결국 송나라가 700여 리의 땅을 요나라에 넘겨주는 획계 교섭(劃界交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078년(문종 32) 송나라는 큰 배 두 척을 새로 건조하여 사신을 고려에 파견함으로써 여송 관계를 강화하였다. 소식의 고려 배척론은 바로 신법당의 이러한 대외 경략책의 집착과 그 일환으로서의 고려 사신 초치(招致)와 과도한 환대, 그로 말미암은 물의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었다.

한편 소식은 ‘걸금상려과외국장(乞禁商旅過外國狀)’에서 해상(海商)의 고려 왕래 금지를 주청하였는데,70)소식, 『소동파전집』 주의집 8 ; 장동익, 앞의 책, 304∼307쪽. 이것을 조정이 채택하여 실제로 고려 방면의 해상 항해에 제한을 가하였다. 이는 신법당이 해외 무역을 장려한 것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이유는 구법당의 득세와 함께 이들이 지닌 대외관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배타적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71)이범학, 앞의 글, 90∼91, 100∼101쪽 참조.

소식의 고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의천(義天)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항저우(杭州)의 정원 법사(淨源法師, 1011∼1088)에게 이어졌다. 의천은 정원이 입적하자 수개(壽介) 등 제자 다섯 명을 복건(福建) 상인 서전(徐戩)의 배편으로 보내어 제사 지내고, 아울러 송나라 황제와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장수를 위하여 황금 탑 2좌(座)를 보냈다. 이에 대해 소식은 고려가 다른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신이 그들의 의도를 가만히 보건대 이성(二聖, 철종과 선인 태후)께서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지 수년이나 되었으나 감히 쉽게 조공하지 못해 후한 이로움을 상실하였지만, 다시 사신을 보내려 해도 황제의 뜻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정원의 제사를 명목으로 하여 금탑(金塔)을 헌납하여 조정을 시험해 보아 자기들을 대우함이 후할지 박할지 알아보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72)소식, 『소동파전집』 주의집 6, 「논고려진봉장(論高麗進奉狀)」 ; 장동익, 앞의 책, 298∼300쪽.

혜인원(惠因院)의 죽은 승려 정원은 본시 용렬한 사람이었으나 단지 복건의 해상들과 자주 왕래하여 상인이 고려에 가서 망령되게 떠들고 다님으로써 의천이 멀리서 와서 배우기에 이르렀으며, 이로 인해 혜인원은 시주의 이득을 크게 얻었으나 회절 지역의 관아와 민간 모두가 소란스러웠습니다.73)소식, 『소동파전집』 주의집 6, 「논고려진봉이장(論高麗進奉二狀)」 ; 장동익, 앞의 책, 301∼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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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소(華嚴經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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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소(華嚴經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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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항주 지사(杭州知事)였던 소식은 제사만 허락하고 황금 탑을 돌려보내려 하였으며, 서전을 구속하고 잇따라 글을 올려 복건의 교활한 상인이 멋대로 고려와 교통하여 이익을 챙긴다며 비난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 조금만 후하게 대우하면 탐욕한 마음이 다시 열려 조공을 분분히 바쳐 반드시 무궁한 후환이 될 것이라는74)이에 대해서는 최병헌, 「대각 국사 의천의 도송(渡宋) 활동과 고려·송의 불교 교류 : 진수 정원(晉水淨源)·혜인사(慧印寺)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단 학보』 71·72, 진단 학회, 1991, 360∼365쪽 참조. 극단적인 단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후인 1092년(선종 9)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재직 중이던 소식은 고려에서 많은 서적을 구해 가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기도 하였다.75)『송사』 권487, 외국3, 고려.

한편 원풍 연간의 고려에 대한 정책과 의천에 대한 환대를 연계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의천은 송나라에 오기 이전부터 정원 법사와 교류해 왔는데, 당시 정원 법사는 신법당 관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천과 정원의 각별한 교유(交遊)는 항저우 혜인원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계승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았다. 의천의 입송(入宋)이 송나라 조정의 초유(招誘)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나 이러한 호기(好機)를 여송 관계 강화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결국 고려의 왕자라는 신분으로 국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의천을 송나라 조정에서는 의도적으로 포섭하여 양국의 실질적인 관계 증진 을 모색하였다는 주장이다.76)이범학, 앞의 글, 103∼107쪽 ; 신태광, 앞의 글, 670∼672 및 674쪽.

한기나 소식이 고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대체적으로 송나라의 실익 여부와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관료 처지에서 자국의 외교적 입장이 타국에 대한 태도를 좌우하는 기본적 요소가 된다는 점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송나라 관료의 고려관은 각자 지향하는 정치적 노선이나 선호하는 대외 정책에 따라 때로는 부정적으로, 때로는 긍정적 인식으로 나타났다.

북송 말기에 고려를 방문하여 『고려도경』을 저술한 서긍 역시 관료라는 현실적 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는 북송 시기 전반에 걸쳐 전개된 여송 관계의 흐름을 분명히 파악한 상태에서 고려에 왔을 것이므로, 『고려도경』에 나타난 고려의 모습은 단지 한 개인의 관점 내지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부필, 증공의 친고려적 성향과 한기, 소식의 고려 배척적 관점은 『고려도경』 곳곳에 스며 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더군다나 『고려도경』은 시대적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풍부한 자료의 보고(寶庫)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려도경』은 송나라 사람의 고려관에 대한 직접적이며 집약적인 내용으로서 여송 교류사를 분석하기 위해 주목하여야 할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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