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3. 『고려도경』에 나타난 고려의 모습
  • 문명과 ‘중화’의 관점에서 본 고려의 문물과 정치 제도
김난옥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송나라 사람이 저술한 대표적인 고려 견문록(見聞錄)은 서긍의 『고려도경』이다.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여러 방면의 연구자들이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고려도경』의 출판 연대는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보다 100년 정도 이르다. 더구나 『송사』에 실려 있는 고려에 대한 묘사는 상당 부분 『고려도경』을 인용한 것이며, 원대에 『송사』를 수정할 때에도 『고려도경』은 중요한 참고서의 하나였다.77)장건, 「송대 문헌 중의 고려 사회」, 『이화 사학 연구』 28, 이화 사학 연구소, 2001, 60∼61쪽.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에 정사(正使)인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允迪)과 부사(副使) 부묵경(傅墨卿)을 수행하여 고려에 온 제할인선예물관(提割人船禮物官) 서긍이 저술한 견문록이다. 서긍은 석 달이 넘는 사행(使行) 일정과 한 달 남짓한 체류 기간 동안 견문한 고려의 역사, 정치, 경제, 종교, 풍습 등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해지고 있다.78)『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저술 배경, 판본 등에 대해서는 차주환, 「해제」, 『국역 고려도경』, 민족 문화 추진 위원회, 1977 ; 장건, 앞의 글 ; 조동원, 「선화봉사고려도경 해제」, 『중국 송나라 사신의 눈에 비친 고려 풍경 고려도경』, 황소자리, 2005 참조.

서긍은 사신 임무 가운데 하나가 파견된 지역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 여 기록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79)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서문(序文). 신이 듣기에 천자는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朝會)가 끝난 후 천하의 도서(圖書)를 뜰에 펼쳐 놓는다. 이를 통해 만국에서 모여든 왕공후백(王公侯伯)을 모두 살피게 된다. 그러므로 담당 관리가 보관하는 것은 유별나게 엄격하며 사신의 직분은 이것을 급선무로 여긴다. …… 이것을 통해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은 곳에서 고고히 팔짱을 끼고 지내는 존귀한 천자가 멀리 만 리 밖 사정을 손바닥 위에서 가리키듯이 환히 살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수레를 타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자는 도서 작성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하물며 고려는 요동에 자리 잡고 있어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불러올 수 있는 가까운 제후국(諸侯國)도 아니어서 도서 작성은 매우 어렵다. 실제 귀환한 후에는 황제의 명에 따라80)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서문. 『고려도경』을 조정에 납부하였다. 따라서 황제에게 보고할 것을 전제로 저술한 『고려도경』은 단순한 개인적 견문록을 뛰어넘어 공적인 자료로서의 역할이 이미 기대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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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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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은 고려에 가기 전에 이미 『계림지(雞林志)』를81)『봉사계림지(奉使雞林志)』 30권은 1102년(숙종 7)에 송나라 사절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왔던 왕운(王雲)이 지은 것이나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원나라 때 도종의(陶宗儀)가 수습한 저자 불명의 『계림지』 일부가 남아 있는데, 왕운의 저작으로 추측된다. 여기에는 특히 불사(佛事), 승려, 생산물, 식화(食貨)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이 매우 간략하기는 하나 고려의 풍습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견문기의 일부 내용이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도 인용되고 있다. 아울러 손목(孫穆)이 편찬한 『계림유사(鷄林類事)』의 일부가 도종의의 『설부(說郛)』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려의 풍토, 제도, 방언 등에 관한 서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장동익, 앞의 책, 464∼474쪽 참조. 보았는데, 내용이 치밀하지 못하고 모습을 그린 책도 아니었지만, 자신이 사신으로 가면서 참고로 도움 받은 바가 많았다고 하였다.82)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서문. 따라서 서긍은 이미 고려에 가기 전에 견문록 저술을 전제하고 이를 위해 상당한 준비를 거쳤음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므로, 더욱 이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였을 것이다.

서긍은 고려와 송나라의 같은 점과 차이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양국의 동질적 요소의 존재 여부는 대체로 중국 문명 ‘중화(中華)’에 의한 교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가 하는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고려의 문물과 정치 제도가 어느 정도 ‘문명화’가 되었는지였으며, 이는 결국 중국과 동질적인 부분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비교로 이어졌다. 이러한 비교는 다시 고려의 문명화 정도에 대한 가치 평가의 척도가 되었다.

이처럼 고려 인식의 출발점이자 바탕에 깔려 있는 관점은 고려가 이른바 ‘중화’ 문명에 어느 정도 교화되었는가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또 다른 ‘오랑캐’인 북방 국가와의 비교를 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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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여정
서긍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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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듣기에 오랑캐의 왕들은 대개 속임수와 힘으로 자신을 높인다. 그래서 이름이나 호(號)를 별나고 괴이하게 하여 선우(單于), 가한(可汗)이라 하나 부를 만한 것은 없다. 오직 고려는 기자(箕子)가 들어오면서부터 덕을 베풀어 제후(諸侯)에 책봉되었는데, 후세에는 점차 쇠퇴해졌다.83)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 건국(建國).

서하와 거란은 모전(毛氈)과 천막에 살며 항상 수초(水草)를 쫓아서 또는 기온의 변화에 따라서 옮겨 다니므로 애초에 정해진 도읍이 없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옛 기록에 실린 바와 같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모자라나마 농업에 힘을 쏟지만 자급자족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인데, 그들의 풍습은 음식을 아끼되 궁실(宮室)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84)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5, 궁전(宮殿)1.

신이 듣기에 오랑캐 나라에서는 이마에 그림을 새기고 양반 다리를 하거나 머리를 풀고 문신을 하며 짐승처럼 살고 노닌다 하니, 어찌 제대로 관아(官衙)를 세우고 관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고려만은 그렇지 않다. 의관(衣冠)의 예의와 군신 상하 간에 찬연한 법도가 있어 그에 따라 서로 대한다.85)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1, 조례(鏌隷).

이 기록은 고려를 여타 오랑캐와 비교하여 교화 정도를 평가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고려는 오랑캐 가운데 하나인데도 다른 오랑캐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즉, 고려는 국왕 칭호도 괴상하고 궁궐도 일정하지 않으며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도 풀어 헤치고 다니는 야만인이 아니라, 예의와 법도가 엄연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타 오랑캐에 비해 문물제도가 사뭇 정비된 나라로 인식하는 밑바탕에는 ‘중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초는 기자의 동래(東來)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고려에서는 기자가 봉해지면서 이미 밭갈이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복식(服飾)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86)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7, 관복(冠服).

고려는 본래 기자의 팔조법금(八條法禁)으로 교화된 땅이지만, 병기(兵器)가 매우 간단하고 무딘 것이 어찌 천성 때문이겠는가.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병기가 날카롭지 못하면 단지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려 사람의 병기는 조잡하고 간단하니, 이것이 여러 차례 흉노에게 패배하여도 맞서 싸우지 못한 까닭이다.87)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3, 병기(兵器).

신이 듣기에 옛 기록에서는 동이족(東夷族)이 소반을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에서도 여전히 그렇다. 제작한 것을 살펴보면 고졸(古拙)하고 소박하여 매우 기꺼워할 만하다. …… 잔치를 준비할 때에도 왕골이나 버섯으로 만든 궤석(几席)과 비슷한 것이 많다. 이것은 모두 기자의 훌륭한 교화에 물들어 비슷하게 된 것으로 삼대(三代, 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유풍(遺風)이다.88)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0, 기명(器皿)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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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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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려는 이미 기자에게서 교화를 받았기 때문에 예의지국(禮儀之國)이 될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입장이다. 밭갈이, 누에치기, 법률뿐 아니라 심지어 그릇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자에게서 받은 교화로 말미암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고대부터 한반도는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문물을 정비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자 이후에도 꾸준히 ‘중화 문명’의 깊은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어 송나라에 이르러서도 지대한 은혜와 교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황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을 베풀어 만국(萬國)을 모두 내조하게 하였다. 고려를 돌보면서 신성한 은혜를 입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조정에서 인재를 엄격히 선발하여 천자(天子)의 명령으로 (고려를) 어루만졌으니 융숭한 은혜와 두터운 예의는 전에 없던 일이다.89)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서문.

신이 우러러 생각하기에 신종 황제는 중국의 문물제도를 크게 베풀어 먼 나라까지 감싸 안았다. 그래서 보배를 공물로 바치며 중국으로 향하는 자가 배를 타고 계속 이르렀다. 그런데 고려에 대해서는 특별히 예우하였으므로,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천자의 명대로 그들을 위무(慰撫)하면서 천자의 뜻을 베풀었던 것이다.90)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5, 궁전1.

서긍은 중국이 주변국을 덕으로 교화하고 있다는 자부심 속에서, 특히 고려에 대한 관심과 은혜가 더욱 두드러졌음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교화로 말미암아 고려는 점차 관부(官府)의 설치나91)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6, 관부(官府). 송나라의 교화가 점차 퍼지자 관부를 설치하되 (송나라의 제도에 따라) 명칭을 정하였다. 하지만 관직에 취임해 업무를 맡는 경우에는 여전히 고려의 풍속을 따르므로 이름만 있을 뿐 실제는 맞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송나라를) 받들려는 뜻은 가상하다고 할 만하다. 의복 제도의 개선에 이 르기까지92)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7, 관복. 우리 송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사신을 보내므로 자주 평상복을 내렸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면서 천자의 총애를 입어 복식 제도가 개선되어 우리 송나라의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게 되었으니, 변발(辮髮)을 풀고 섶을 바꾸는 데 그친 것만이 아니다. 송나라의 제도를 따랐다고 하였다.

아울러 유학의 발전과 예의범절 역시 중국 문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정화 연간(政和年間, 1111∼1117)부터 학생 김단(金端) 등을 송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는데, 은사(恩賜)로 급제(及第)하였다. …… 이 때문에 지금은 유학을 업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대개 중국을 흠모하는 바로 말미암은 것일 뿐이다.93)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9, 민서(民庶) 진사(進士).

고려 관리는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무릎을 구부리며 공손히 절을 하고, 일에 대해 말할 때는 무릎걸음으로 나아가서 손을 올리고 얼굴을 낮춘 채 이를 경청한다. 중국의 오랜 교화가 없었다면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94)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1, 조례.

고려에서 유학이 발전하게 된 이유가 중국을 흠모하기 때문이며, 관리의 공손한 인사 예절 역시 중국의 오랜 교화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보면 서긍은 무엇을 보든지 간에 긍정적인 부분은 모두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속단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한편 고려가 중국과 서로 빈번히 사절을 파견하여 민간 문화와 풍속이 서로 혼합되었으며, 침투된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문화 방면에서 중국 유교 문화의 전통이 고려에 전파되어 고려인의 의식 상태, 일상생활, 행동에까지 침투되었다는 점은 당시 여금(麗金) 관계와 비교해 볼 때, 여송 관계는 문화적 측면에서 상당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하기도95)장건, 앞의 글, 69쪽. 한다. 물론 이것이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문화적 친밀감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친화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우월감의 표현이라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서긍은 중국의 영향을 중시하면서도, 그 교화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근래에 사절로 고려에 이를 때마다 화려한 의례 용구(儀禮用具)와 많은 의장병(儀仗兵)을 모두 갖춘 채 조서(詔書)를 맞이하고 사절을 인도하였으니 그 의례가 매우 충실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번 행차는 예종(睿宗)에 대한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북이나 피리 등을 지참하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니, 예를 알고 있다 할 만하다.96)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4, 절장(節仗).

고려는 왕씨(王氏)가 왕이 된 이래로 대대로 송나라의 울타리가 되었다. 그리고 송나라 황제의 진무(鎭撫)하는 은덕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송나라 사절이 고려를 방문할 때마다 장막(帳幕)을 설치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이 화려하고 찬란하였다. …… 이와 같이 의례에 쓰인 물품이 예의에 맞으니 황제를 즐겁게 하려는 고려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97)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8, 공장(供張)1.

6위군(六衛軍)은 나름의 의물(儀物)을 갖추고 있다. 예법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다른 오랑캐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볼만하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거처하고자 하면서 누추(陋醜)하다고 여기지 않은 까닭이다. 하물며 기자가 봉해진 나라로서 중국의 두터운 돌봄을 받은 나라임에 있어서랴.98)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9, 의물(儀物)1.

고려는 국상(國喪) 기간 중에 근신하는 방법과 송나라 사절단을 응대하는 의례 절차나 행동에서 예법을 제대로 알고 시행하는 수준 높은 나라로 묘사되었다. 비록 6위군의 의물에서 부족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공자가 거처하고자 하였던 예의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 속에서도 중국의 은덕이 두텁다거나 기자가 봉해진 나라라는 점 등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일정 부분 평가 절하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아예 교화의 정도가 단지 모방에 그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도 비루(鄙陋)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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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궁성도
개경 궁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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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궐(門闕) 제도 역시 옛 제후의 예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여러 차례 상국(上國)을 방문하여 무턱대고 모방하였기 때문에 자질이 부족하고 기술이 졸렬(拙劣)하여 결국 투박하고 누추하다고 한다.99)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 문궐(門闕).

병법에 이르기를 “병기가 날카롭지 못하면 단지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려 사람의 병기는 조잡하고 간단하니, 이것이 여러 차례 흉노에게 패배하여도 맞서 싸우지 못한 까닭이다.100)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3, 병기.

이 글은 상당히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고 있다. 고려 궁궐 제도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비루함을 지적함과 동시에 병기가 조악하여 이민족에게 패 배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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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궁궐터 전경
고려 궁궐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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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려가 다른 오랑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국가이지만, 중국의 찬란한 문화에 비해서는 아직 저급하다는 우월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의 문물과 정치 제도는 나름대로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지만, 중화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분석이다. 이는 중국적 문명, 곧 중화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민족 문화에 대한 비하 내지 멸시가 상당 부분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송나라 사람의 고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인식은 고려의 ‘문명’을 중국의 ‘중화’라는 기준으로 저울질함으로써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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