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3. 『고려도경』에 나타난 고려의 모습
  • 고유와 ‘야만’의 관점에서 본 전통 사상과 풍습
김난옥

서긍은 전반적인 문물제도뿐 아니라 고려인의 경제생활, 사상, 풍습 등에도 상당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고려의 고유한 사상이나 풍습에 대한 이해 방식은 중국 문명의 교화 정도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도경』의 여러 곳에서 고려의 풍토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다음은 이에 대한 서긍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이 발달하고 예의 바른 나라로 불린다. …… 그러나 실제로는 난잡스러운 오랑캐의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예기(禮記)』를 따르는 것이 매우 적다. 남자의 머리 두건은 당나라의 제도를 약간 본받고 있으나, 부인이 땋아 쪽진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은 오히려 좌수(髽首)나 변발과 완연히 같은 모양이다. 귀인이나 벼슬아치 집안에서 혼인할 때는 예물을 쓰지만, 백성은 단지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 또 부유한 집에서는 아내를 서너 명이나 맞이하는데, 조금만 맞지 않아도 헤어진다.

자식을 낳으면 다른 방에 거처하게 하고, 아이가 병을 앓으면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약을 들이지 않는다. 죽으면 염만 할 뿐 관(棺)에 넣지 않는데, 왕이나 귀족이어도 그러하다.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 지내는 도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두는데 봉분(封墳)도 하지 않고 묘표(墓表)도 세우지 않는다. 개미나 땅강아지,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지만 사람들은 이를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은밀한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불교를 좋아하며, 종묘의 제사에도 승려를 참배시켜 범패(梵唄)를 부르게 한다. 범패에는 간간이 이해되지 않는 말도 섞여 있다. 욕심이 많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성행하며 길을 다닐 때는 바삐 걷는 것을 좋아한다. 서 있을 때는 뒷짐지는 자가 많고 부인이나 비구니가 다 남자처럼 절을 한다. 이런 것들은 매우 해괴한 짓들이다.101)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2, 잡속(雜俗)1.

서긍은 고려의 고유한 사상이나 풍토에 대해 다분히 비문명적이라는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가 오랑캐 가운데에는 문물과 예의가 발달한 나라라고 하면서도 상투를 틀거나 머리를 묶어 내려뜨리는 중국 주변 종족의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부잣집에서 아내를 서너 명이나 맞이한다는 것은 아마 처첩(妻妾)을 분간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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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 부분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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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과 장례 풍습에 대해서는 자식이 병을 앓아도 약을 처방하지 않으며 죽은 후에도 제대로 매장하지 않는 풍토를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 의학 기술이 후진적이라는 인식은 『송사』 「고려전」에도 나타나 있다. 고려에서는 의학에 대해 알지 못하였는데, 예종이 송나라에 의관(醫官)을 청한 후에야 비로소 의술에 능통한 자가 나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역시 자국 중심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음사(淫祀)와 부처를 혹신(惑信)하는 풍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고려에서 종묘 제사에 승려가 참여하여 범패를 부르는 관례(慣例)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고려 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불교 국가로서 승려를 왕사(王師), 국사(國師)로 존숭(尊崇)하며, 승직(僧職)과 승계(僧階) 조직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승려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도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고려가 음사를 행하고, 부처를 혹신하는 태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하였다.102)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7, 사우(祠宇). 신이 듣기에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며 믿고 음양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을 먹지 않는다. 비록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지친(至親)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주문(呪文)으로 화가 일어나지 않게 할 따름이다.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하여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무리 지어 노래를 부르며 즐기고 귀신, 사직(社稷), 후직(后稷)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 또한 풍속에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매우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 또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온 나라에서 두루 베풀어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귀신에게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들여 은 1,000냥을 모으며, 나머지 물건도 이와 비슷한데, 그것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는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고유 신앙과 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며, 중세 사람의 미신적인 신앙 행위는 꼭 고려에만 국한되는 사실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고려가 중국의 제도를 약간 본받아 문신하고 양반 다리를 하는 오랑캐보다는 개화되었지만, 여전히 중국에 비해 야만적인 풍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103)장건은 여느 송나라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긍 역시 송나라를 중심으로 여기고 고려 사회의 좋은 측면은 중화를 모방한 결과라고 여기고, 민간 습관 가운데 중국과 다른 부분은 누습패속(陋習敗俗)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그가 봉건 사회의 문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파악하였다. 장건, 앞의 글, 69쪽 참조. 이 역시 중국 중심적인 사고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인데, 사실상 서긍이 고려의 풍습에 대해 익숙하지 않거나 미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는 오히려 고려의 풍습이 상당히 개방적임을 보여 주는 묘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특히 가족생활에서 부부간의 이합(離合)이 자유로운 부분이나, 여자가 남자처럼 절을 하는 풍습은 상대적으로 구속력이 덜한 결혼 생활 내지 의례 방식에서 남녀가 별로 차이가 없는 고려 사회의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서긍은 전반적으로 고려를 사회적·경제적 발전 정도가 상당히 뒤떨어지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고려의 전통에 따르면 외국 사신이 올 때마다 큰 시장(市場)을 벌이고 수많은 물건을 나열한다.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호화롭도록 힘쓰며, 금은 물품은 모두 왕부(王府) 물건이어서 그때그때 펼친 것이지 대체로 풍습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숭녕 연간(崇寧年間, 1102∼1106)과 대관 연간(大觀年間, 1107∼1110)에는 사신이 여전히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있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대체로 고려의 풍속은 가게가 없다. 다만 해가 떠 있는 동안 허시(虛市)를 개설할 뿐이어서 남녀노소나 관리와 공기(工技)가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교역한다. 화폐 제도는 없으며 저포(苧布)나 은병(銀甁)만으로 값을 계산하고 한 필이나 한 냥에 미치지 못하는 자그마한 일용품은 쌀을 이용하여 치수를 헤아려 지불할 뿐이다. 그런데 백성은 오랫동안 익숙하여 자기들은 편리하다고 여긴다. 그동안 조정에서 화폐를 하사하였지만 현재는 모두 창고에 넣어 두고 가끔 내어 관속(官屬)에게 보여 주어 가지고 놀게 할 뿐이다.104)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무역(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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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철전과 동전-건원중보(乾元重寶) 앞면
고려시대 철전과 동전-건원중보(乾元重寶)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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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중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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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통보(海東通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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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중보(海東重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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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통보(三韓通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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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중보(三韓重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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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四民)의 업(業) 가운데 선비를 귀하게 여기므로 고려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은 매우 많고 땅은 평탄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은 장인(匠人)에 미치지 못한다. 주군의 토산물은 모두 관아에 들어가므로 상인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시장에 가서 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바꾸는 정도에 만족한다. 그러나 고려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女色)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녀 간의 혼인에서도 가볍게 합치고 쉽게 헤어져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105)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9, 민서.

고려는 상공업이 낙후된 사회로 그려졌다. 이러한 인식은 『송사』 「고려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고려가 화폐를 주조한 이후에도 민간에서는 물물 교환이 편리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또한 농업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농민의 생활이 수공업자나 상인에 미치지 못하며, 상행위 역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하는 정도에 그친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서긍은 고려의 형벌이나 풍습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

고려 풍속은 원래 인자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도 관대히 다스리는 경우가 많아 산도(山島)에 유배를 보낸다. 사면할 때는 경과한 시기에 따라 죄의 경중을 따진 후 용서한다.106)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6, 관부 영어(囹圄).

고려의 형벌이 관대함을 설명함과 동시에 유배지나 사면 등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서긍의 관심 영역이 넓었음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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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의복-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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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의복-평민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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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의복-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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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의복-평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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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은 생활 풍습 가운데 의복에 대해 꽤 자세히 기록하였다.

갑옷은 위아래가 연결되어 마치 소매가 큰 옷처럼 보이는데 이상한 모습이다. 금빛 꽃으로 장식한 모자는 거의 두 자에 이르나, 비단으로 만든 푸른 옷에 느슨한 허리띠는 사타구니까지 내려온다. 아마도 고려인은 선천적으로 키가 작기 때문에 높은 모자와 비단으로 장식하여 자신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107)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1, 장위(仗衛)1.

두건 하나의 값은 쌀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재물이 없고,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는 죄수와 다름없다고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죽관(竹冠)을 만들어 쓴다.108)서긍, 『산화봉사고려도경』 권19, 민서 주인(舟人).

부귀한 집안의 처첩은 치마를 만들 때 7∼8필까지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우 가소롭다.109)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婦人) 천사(賤使).

대체로 고려의 백성은 가난하고 풍속은 검소하다. 그런데 도포(道袍) 하나의 값이 거의 은 한 근이나 되니, 항상 빨아서 다시 물들여 쓴다.110)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1, 조례 이직(吏職).

의복을 갑옷, 두건, 치마, 도포의 종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이어서 염색에 대해서도 부연하고 있다. 그런데 두건과 도포가 비싸서 대나무로 두건을 만들어 쓰고 옷은 항상 빨아서 다시 염색해 쓸 정도로 가난한 삶을 표현하였다. 반면 여인들이 옷감을 많이 써서 치마를 만드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고려인이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높은 모자를 쓴다는 것은 중국인의 키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가 없어서 뭐라 반박할 수 없지만 발상 자체가 특이하다.

나라 안에 밀이 적다. 모든 밀은 장사치들이 경동로(京東道)를 통해 수입하여 면 가격이 대단히 비싸므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에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더욱 웃기는 일이다.111)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2, 향음(鄕飮).

음식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밀의 값이 비싸 나라에서 금지한다며 가소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생활 풍습에 대해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경박함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치스러움을 비난하는 등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고려의 전통적 사상과 민간 풍습이 아직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서긍의 인식은, 고려가 중국에 비해 규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지나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왕성(王城)이 크다고 하나 땅은 메마르고 산은 가파른 데다 평평하거나 넓지 않다. 이 때문에 백성들 거처의 형세와 높낮이는 벌집이나 개미구멍 같으며 띠를 베어 지붕을 엮어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이다. 집 크기는 서까래 두 개를 세워 놓은 정도에 불과하다.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집을 세운 경우도 조금 있지만 열에 한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112)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 민거(民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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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전경(松都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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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서긍이 고려를 얼마나 왜소한 이방(異邦)으로 파악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서긍은 고려의 문물제도가 중국에서부터 교화되어 발달한 것이며, 이는 기자에서부터 시작되어 당시 송나라에까지 이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궁궐이나 정치 체제 등 여러 면에서 아직 충분히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고려도경』의 다른 부분 기록과 논리적으로 상충(相衝)되기도 하였다.

신이 듣기에 사이(四夷)의 군장(君長)은 산곡(山谷)에 의지하다가 수초(水草)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수시로 옮겨 다니는 것을 편리하며 적절하다고 여겨서 애초부터 국읍(國邑)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세우고 읍주(邑州)에는 집과 거리를 만들었으며, 높은 성첩(城堞)으로 주위를 둘러 중화를 본받았다. 이야말로 옛날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어서 중화의 유풍과 유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송나라 조정에서 간혹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보살피는데, 그 국경에 들어가다 보면 성곽이 우뚝하여 사실 업신여길 수 없다.113)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

서긍은 고려가 다른 사방의 오랑캐와 달리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세웠으며, 성곽이 우뚝하여 감히 업신여길 수 없을 정도의 문물 체제를 정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처럼 왕성, 궁궐 등에 대한 상반된 서술은 이미 여러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긍의 기본적인 인식, 즉 고려는 거란이나 여진과 달리 중국의 교화를 받아 ‘중화’가 상당히 진전된 나라이지만, 송나라에 비해서는 여전히 비루하고 열등한 문화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문명화된 오랑캐’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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