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2장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 4. 송나라 사람의 타자적 인식과 고려
김난옥

고려에 대한 송나라 사람의 인식은 개인에 따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다. 부필, 증공 같은 관료의 친고려적 태도는 강대한 거란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대외 관계의 전환에서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결국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며, 북송 시기에 제기된 연려제요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편 고려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한기나 소식 역시 송나라 국내의 정치 동향이나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송나라 관료의 친고려적·반고려적 태도는 자국의 실익을 염두에 둔 정치가로서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이나 방향의 차이에 따라서, 혹은 대외 정세를 파악하고 외교적 문제를 타결하는 방식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상반된 인식이 드러났다.

『고려도경』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저술할 때 서긍은 사신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천자가 만 리 밖 사정을 환히 살필 수 있도록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자는 도서 작성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114)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서문. 생각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고려도경』의 저술 동기였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서긍은 고려에 체류한 기간이 상당히 짧았는 데도 고려의 정치 체제, 풍속 등의 실정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고자 하는115)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서문. 한나라 장건(張騫)은 대월지(大月氏)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13년 뒤에야 귀국하여 자신이 지나친 나라들의 지형과 물산에 대해 겨우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둔한 신은 재주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데다 고려에 머문 기간은 겨우 한 달 남짓이었고, 객관(客館)을 제공한 다음에는 군사가 지키므로 객관을 나선 것이 대여섯 번에 불과하였다. 수레가 달리는 동안이나 연회하는 도중에 눈과 귀가 미친 부분에서는 13년이나 오래 머문 것과 같지는 않지만, 고려의 건국, 정치 체제, 풍속, 사물 가운데 그럴듯한 것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으므로 그림과 목차의 배열에서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감히 박학(博學)을 자랑하여 과장이나 경박(輕薄)으로 황제의 귀를 더럽히려는 것은 아니며, 고려의 실정을 수집하여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사신의 임무를 조금이나마 면해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가능한 한 이루려 하였다.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서긍의 저술에서 고려에 대한 타자적 인식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바로 ‘동문(同文)’ 항목이다.

우러러보건대 우리 송나라가 크게 통일하여 만방(萬邦)에 임하므로 중국이 앞서고 오랑캐가 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비록 고려 땅이 바다 너머에 위치하여 큰 파도가 막고 있어 구복(九服)의 땅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삭(正朔)을 받고 유학을 받들며 음악은 한결같이 조화롭고 도량형(度量衡)은 그 제도가 똑같다. …… 옛사람이 문자가 같고 수레에서는 바퀴 사이의 너비가 같다고 말한 것을 이제 (고려에서) 보겠다.116)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동문(同文).

일차적으로 서긍은 중국 문명이 주변국을 교화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으며 고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고려는 여느 오랑캐와 본질적으로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중국의 선진 문화에 동화되거나 동화되고자 하는 모습을 중시하고 있다. 정삭, 유학, 음악, 도량형이 송나라와 똑같다는 것은 송나라의 지배 영역에 고려가 포섭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12세기 당시 고려가 책봉 관계를 맺어야 하는 나라가 송나라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117)조동원, 앞의 글, 35쪽.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적 토대 위에 비록 고려가 송나라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나라는 아니더라도 이른바 ‘문자가 같고 바퀴 너비가 같은’ 사례로서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 송나라, 거란 사이의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에서 여송 양국 관계에 대한 진단을 나름대로 내리고 있다.

거란이 금나라에게 곤욕을 치르자 고려에서는 마침내 거란의 연호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조정에 (정삭을) 명해 줄 것을 미처 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송나라) 정삭을 감히 사용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간지(干支)로만 해를 표시할 뿐이어서 곧 정삭에 관한 요청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조정에서 고려를 보면 저토록 멀지만, 거란에서 고려를 보면 이처럼 가깝다. 하지만 거란에 복속하였던 것은 항상 무력에 곤란을 당하였을 때였으며, 거란의 느슨함을 엿보다가 곧바로 항거하였다. 성스러운 송나라를 섬기게 되자 한결같이 간절하고 충직하였으며, 견제 때문에 원하는 바와 같을 수 없을 때에도 정성스러운 뜻이 금석(金石)처럼 견고하였다.118)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동문 정삭(正朔).

즉, 고려가 거란에 복속한 것은 어디까지나 군사적 역학 관계에 따른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이었고, 실제로는 송나라에 대한 태도가 금석처럼 견고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서긍의 고려에 대한 인식119)박지훈은 서긍의 고려에 대한 인식을 중립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박지훈, 「송대 사대부의 고려관」,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최소자 교수 정년 기념 논총), 서해 문집, 2005, 31∼33쪽). 하지만 부필이나 소식처럼 분명하게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적으로 서긍의 태도는 자국 중심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중립적인 입장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역시 당시 국제 정세나 고려에 대한 송나라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송사』 「고려전」에는 서긍이 고려에 오기 전해인 1122년(예종 17)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고려가) 왕휘(王徽, 문종)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 않았으나 거란의 책봉을 받고 거란의 정삭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에 대해 한 해에 조공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거란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에서는)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인데 남조(南朝, 송나라)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의) 사신이 거란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악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한 일에 대하여 힐책하자, 고려는 표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의 내용은 대 략 “중국에게는 삼갑자(三甲子) 만에 한 번씩 조공하고 대방(大邦)에게는 해마다 여섯 번씩 조공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고려가) 마침내 화를 모면하였다.120)『송사』 권487, 외국3, 고려 선화(宣和)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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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 금니 대보적경(紺紙金泥大寶積經) 사성기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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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 문수원 중수기(淸平山文殊院重修記) 탁본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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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회복한 이후에도 거란의 책봉을 받았다는 이유로 송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그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로 표기한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여송 관계를 이해하려면 거란이라는 제3국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잘 보여 준다. 송나라나 고려 모두 자국의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져 외교 관계를 펼쳐 나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요컨대 송나라의 친고려적·반고려적 관료를 막론하고 그들이 고려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디까지나 ‘나’를 중심에 놓고 상대를 평가하는 타자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구나 『고려도경』의 저술 동기, 배경, 목적 등을 고려할 때, 이는 사적인 기록물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공식적 입장을 우선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서긍이 고려를 인식하는 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식의 바탕에 중국 문명 내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자만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세를 떨치기는커녕 강성한 북방 국가에 의해 존망이 위태로운 위기를 느끼는 현실 속에서 ‘문명 중심국’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고려관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고려도경』 곳곳에 묘사되었다고 판단된다.

송나라 사람의 고려에 대한 인식은 여타 이민족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의 고려 인식이 좀 더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상대의 국세(國勢)에 따라 화이관(華夷觀)을 철저히 적용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하였다.

요나라의 경우에는 중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는 송나라를 압도하는 요나라의 국력을 현실적으로 인정한 것일 뿐 원칙적으로 화이관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공개적으로 양국 간에 교환하는 국서 등 공식 문서에는 대거란(大契丹)이나 형제지국(兄弟之國) 등을 사용한 반면, 비공식적인 글에서는 송나라의 우월한 지위를 강조하여 노(虜), 융로(戎虜), 북로(北虜)나 승냥이, 올빼미, 짐승 등과 같은 원색적으로 이민족을 멸시하는 용어를 많이 썼다.

한편 서하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대체적으로 서하는 송나라에 비해 국세가 현저히 약한 편이었지만, 송나라 측에서도 서하에게 때로 패배하는 등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서하에 세폐를 지급하면서 평화 관계를 지속하는데도 요나라와 달리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공순하지 않은 번신(藩臣)으로 간주하였다.121)박지훈, 「송대 이민족 국가에 대한 인식」, 『외대 사학』 12, 한국 외국어 대학교 사학 연구소, 2000, 497∼511쪽. 이것은 군사적 역학 관계가 중요한 인식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2세기 송나라 사람의 고려 인식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은 자명하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가 정립(鼎立)하던 시기에 고려는 중국을 다투는 두 개의 강력한 힘인 송나라와 요나라의 균형을 조절하는 균형추 같은 존재였다. 고려가 송나라와 연합하면 요나라의 중국 진출이 좌절되고, 고려가 요나라의 진영에 가담하면 요나라의 중국 진출을 저지할 수 없을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송나라와 요나라는 고려를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였는데, 요나라는 주로 군사적 수단에 의존한 반면 송나라는 외교적으로 대응하는122)김한규, 「거란과 여진이 요동과 중국을 통합한 시기의 한중 관계」, 『한중 관계사』 I, 아르케, 1999, 386∼387쪽. 방향으로 전개하였다.

이처럼 송나라 사람은 자국 중심적 화이관에 투철하였는데, 고려 역시 자국의 문물이 중국에 못지않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북조(北朝, 거란)와 우호 관계를 맺어 변방에 위급한 일이 없게 되어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어 있으니,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지난 경술년에 보내왔던 거란의 문죄서(問罪書)에 이르기를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서로는 송나라와 왕래하니, 이는 무슨 꾀를 쓰고자 함인가?”라고 하였으며, 상서(尙書) 유참(柳參)이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 일을 물을 만큼 시기하는 듯하니, 만약 이런 일이 누설(漏泄)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입니다. …… 더구나 우리나라는 문물 예악(文物禮樂)이 흥성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상선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배가 들어오고 있으니, 실로 중국에서는 도움 받을 일이 없습니다. 거란과의 관계를 영구히 단절하지 않으려면 사절을 교환해서는 안 됩니다.123)『고려사』 권8, 세가8, 문종 12년 8월 을사.

물론 이와 같은 배경에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을 좀 더 중시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물을 꼭 송나라에서 수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긍심도 있었다. 즉, 여송 관계가 고려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양국 간 외교를 재개할 만큼 문화적인 욕구가 강하지 않다는 당시 인식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려가 송나라와 거란을 대국으로 인식하였지만, 형세(形勢)에 따른 이소사대(以小事大)라는 외교 관행에 따른 책봉과 사대 속에서 능동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는124)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 『한국사 학보』 20, 고려 사학회, 2005, 62∼74쪽.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려인의 송나라에 대한 인식은 다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 동방은 오래전부터 당풍(唐風)을 좇아 문물 예악이 모두 그 제도를 준수하고 있지만, 지역이 다르고 풍토가 다르며 사람들의 성품 역시 각각 다르므로 굳이 같게 할 필요가 없다.125)『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6년 하 4월.

지금은 북쪽 오랑캐가 땅을 바쳐서 귀화하고, 서쪽 송나라는 인(仁)을 친(親)히 여겨 화친을 맺었습니다.126)『동문선(東文選)』 권104, 「함녕절어연치어(咸寧節御宴致語)」.

첫 번째 인용문은 훈요 10조(訓要十條) 가운데 하나로, 태조는 고려가 전통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따르지만 풍토가 다르다고 하면서 고유성 역시 중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고려의 독자적 문명에 대한 일종의 자신 있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인용문은 한안인(韓安仁, ?∼1122)이 지은 국왕 생일 연회의 치어(致語)인데, 여기에서 오랑캐는 귀화하고 송나라와는 화친을 맺었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중국 왕조에 대한 자주적이며 우호적인 인식 속에서 그들을 화친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며, 자국의 문화를 비하하며 중국 문화를 숭상하여 중국을 ‘중화’로 지칭하는 화이론적 세계관과는127)노명호,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 천자」, 『한국사 연구』 105, 한국사 연구회, 1999, 29∼33쪽.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물론 고려 내에도 ‘소중화적(小中華的)’ 태도를 견지하는 사대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북송대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현저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금나라가 흥기(興起)하여 다시금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나, 몽골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송나라 사람의 고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는 중화 문명에 의해 개화된 예의지국, 문물지국이라는 평가를 하면서도, 실제적인 정치 체제와 풍습 등에는 여전히 ‘비문명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화도 어디까지나 중국의 문화에 교화된 ‘중화’적 형태에 대한 긍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 고려인은 송나라에 대해 대체로 친선 관계, 우호 관계에 기초하여 ‘비교적’ 대등하게 인식하였다. 송나라 사람이 고려를 ‘중화’가 덜 되어 아직 ‘야만적’인 대상으로 인식한 데 비해, 고려인은 자국의 문화가 나름대로 문물이 정비되고 고유한 풍토를 가진 것으로 인식하였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타자에 대한 엇갈린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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