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유목적 불신과 복속
  • 몽골의 정복자적 위세와 형제 맹약
이정란

몽골의 타자에 대한 인식은 고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인은 고려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고려는 ‘하늘이 승인한’ 몽골의 세계적인 유목 지배를 달성하기 위해 극복하여야 하는 목표물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양국 간에 대등한 상호 인식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다. 인식의 괴리(乖離)와 일방적 인식이 있을 뿐이었다. 이는 강동성(江東城, 압록강 하구에 있던 성)에서 이루어진 양국의 첫 만남에서부터 엿보인다. 1218년(고종 5)에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고려와 몽골 양국이 강동성에서 합동 작전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몽골 측 원수 합진(哈眞)과 고려 장수 김취려(金就礪)가 형제가 되기를 맹약(盟約)하였다.

그런데 이 합동 작전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합의된 행위가 아니었다. 당시 몽골 장수 합진과 찰랄(札剌)은 동진국(東眞國, 1216년 금나라의 요동 선무사(遼東宣撫使)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자립하여 세운 나라)의 장수와 함께 ‘거란 토벌’을 명분으로 고려 땅에 마음대로 군사를 주둔시켰다. 또한 강동성에서 군량 보급로가 막혀 곤란해지자 “황제께서 거란병이 너희 나라에 도망해 있는 지가 3년이나 되었는데 (너희들이) 거란을 능히 쓸어 없애지 못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고자 하셨다. 그러니 너희 나라는 군량을 도와주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거나, “황제의 명령이니 적을 물리친 후에는 조약을 맺어 형제가 되도록 하라.”는130)『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5, 고종 5년 12월조. 내용의 외교 문서를 고려에 보내왔다. 몽골이 필요하여 펼친 작전인데도 오히려 고려를 도우러 온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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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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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스스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국 땅에 군사를 함부로 들여놓은 이국인(異國人)을 달갑게 여길 수 없었다. 이에 형식상 당시까지 고려의 상국(上國)이었던 금나라까지 들먹이며 몽골의 제안을 회피하려고 하였다.131)고병익, 「몽고·고려 형제 맹약의 성격」, 『백산 학보』 6, 백산 학회, 1969 : 『동아 교섭사의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70, 158∼160쪽. 하지만 고려는 현실적 물리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던 탓에 연합 작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입장은 “이때에 몽골, 동진이 비록 적을 쳐부수고 우리를 구원한다고 명분을 내세웠으나, 몽골은 이적(夷狄, 오랑캐)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하고 사나우며, 일찍이 우리와 우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132)『고려사절요』 권15, 고종 5년 12월조. 당시 기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몽골의 일방적이며 정복자적인 태도는 그들의 동방(東方) 전략의 일환이었는데도 강동성 작전을 고려에 대한 시혜(施惠) 차원의 일인 양 포장한 것에서도 엿보였지만, 고려와의 맹약 체결 이후에 보여 준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의 행동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고려에 파견된 몽골 사신 포리대완(蒲里帒完)은 고려 왕이 자신을 직접 맞이하지 않는다고 하여 말을 탄 채 궁궐로 들어갔고, 융복(戎服, 전투복)을 입고 활과 화살을 찬 채 전상(殿上)에 올라가 고려 왕을 알현하였다. 심지어 왕의 손을 직접 당겨 자신의 품속에 있는 외교 문서를 꺼내 전달하였다. 그러고는 고려 왕에게 고개만 까딱거리며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133)『고려사(高麗史)』 권22, 세가(世家)22, 고종 6년 정월. 이때 양국이 맺은 형제 관계는 외교 관례상 평등한 우호 관계를 상징하였지만 양국의 실질 관계는 정복-피정복이라는 일방적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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