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유목적 불신과 복속
  • 강국 이미지와 불신의 착종
이정란

처음부터 심각한 세력 불균형 속에서 시작한 양국의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우선 형제의 맹약 체결 후 사신은 몽골에서만 일방적으로 파견하도록 규정하였다.134)고병익, 앞의 책, 164∼168쪽. 즉 1232년(고종 19)의 외교 문서에 따르면, 몽골은 매년 열 명 이내의 사신을 보내겠다는135)『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 19년 11월조. 내용을 고려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맹약 조건 역시 고려에 매우 불리하였다. 몽골은 고려에 세공(歲貢)을 과중하게 요구하였는데, 공물(貢物)을 걷어 가는 과정에서 고려가 감내하여야 하였던 사신들의 오만한 행동에 비하면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당시 고려에 파견된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무례한 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고려에게 받은 공물을 하품(下品)이라 욕하며 길바닥에 버리기까지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몽골은 어떤 나라와도 “맹약을 맺은 일이 없었으며, 정복만이 있을 뿐이었다.”는136)고병익, 앞의 책, 177쪽.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고려와는 맹약을, 그것도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는 당시 몽골인이 고려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강국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일인 듯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몽골인은 고려를 고구려와 구분하지 못한 채 동일한 역사체로 파악하였고, 그것은 자연히 고려에 대한 강대국의 이미지로 분화되었다. 흥기(興起)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사이 거의 접촉이 없었던 고려에 대해 칭기즈 칸은 고구려적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려를 실제보다 강국으로 파악하였다.

다시 말해 양국이 처음으로 대면하던 시기에 몽골은 정복자의 처지에서 고려를 여타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국 고구려에 대한 오랜 이미지가 착종(錯綜)되어 있었다. 물론 초반의 이러한 복잡한 고려관(高麗觀)은 전쟁을 통해 차츰 해소되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몽골의 주변에 대한 장악의 범위와 강도가 높아질수록 정복자로서 몽골의 위세는 더욱 커진 반면, 고려는 패전과 항복을 거듭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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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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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전쟁(麗蒙戰爭)은 몽골의 입장에서 보면 강한 불신에서 시작되었다. 불신은 1225년(고종 12) 몽골 사신 저고여의 피살에서 불거졌다. 이때의 불신은 유목민으로서 정주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호한’ 감정이 아니었다. 칭기즈 칸의 대리자를 살해한 이국인에 대한 강렬한 불쾌감이었다. 사실 칭기즈 칸에게 대리자 살해는 한 왕조의 패망과 대대적인 몰살을 야기하는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강력한 요인이었다. 1218년 몽골 사절단이 호라즘(Khorezm) 국경에서 첩자로 오인받아 몰살되는 사건이 이후 7년에 걸친 칭기즈 칸의 서정(西征)으로 이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고여의 피살은 30여 년간 지속된 여몽 전쟁의 도화선(導火線)이었고 불신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고려에 대한 의구심에 더욱 부채질한 일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였다. 제1차 여몽 전쟁 패배 이후 고려는 여러 통의 외교 문서를 보내어 상국(上國)인 몽골에게 거듭 충성을 맹세하더니 1232년(고종 19) 6월에 돌연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몽골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배신 행위였다. 배신의 결과는 몰살밖에 없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따라서 몽골은 그 뒤 1232년부터 1259년에 걸쳐 열 차례 내침(來侵)을 단행하였고, 그때마다 고려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출하는 내용의 문 서를 보냈다. 즉, “이와 같은 죄 외에도 너희들이 말을 꾸미고 거짓을 아뢰고 허물을 지어 악함을 드러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원한 하늘의 성스러운 가르침과 유시(諭示)를 보냈을 때에도 너희들은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려고 하였으니, 우러러 하늘의 힘에 의지하여 고려의 성읍(城邑)을 공격하여 깨뜨릴 것이다.”라는137)『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 태종 5년 계사 ; 여원 관계사 연구팀, 『역주 원고려기사』, 선인, 2008, 66쪽. 1233년(고종 20)의 문서나 “너희가 아뢴 일은 갖추어 알겠으나, 너희의 말이 모두 진실하지 않다. …… 너희들이 아뢴 바로는 먼저 일찍이 힘을 다하였다고 하나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는가.”라는138)『원고려기사』 태종 12년 5월 ; 여원 관계사 연구팀, 앞의 책, 91쪽. 1240년(고종 27)의 조서가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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