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몽골인의 무관심과 고려 ‘문명론’
  • 몽골인의 무관심과 오해
이정란

『원사(元史)』 등의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몽골인의 고려관은 몽골 중심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엮어져 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이 전해 주는 고려에 대한 정보는 허술하였다.159)김인호, 앞의 글, 118쪽. 즉,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봉해진 땅”160)『원사』 권208, 열전(列傳)95, 외이(外夷)1, 고려.이라는 중화 제국적 시각을 기조로 하면서도 사실상 이 땅의 역사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였다. 『원사』는 고려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적고 있다. “나라 임금의 성은 고씨(高氏)이니 처음 나라를 세웠다가 당나라 건봉 연간(乾封年間, 666∼668)에 나라가 망하였다. 수공 연간(垂拱年間, 685∼688) 이래 자손이 다시 그 땅에 봉해져 차차 자립할 수 있었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나라의 임금을 대신하여 송악으로 천도한 사람의 성(姓)은 왕씨(王氏)이고 이름은 건(建)이다.”라고 하여 고려가 고구려를 직접 계승한 왕조인 양 잘못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부실한 정보에 기인한 고려관은 개인의 경우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나라 우승상(右丞相)이었던 사천택(史天澤)이다. 1261년(원종 2) 6월에 그가 고려의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묻자 고려의 재상 이장용(李藏用) 등이 당시의 집권자인 김인준(金仁俊)의 성명과 관직을 갖추어 말하였다. 그러자 사천택은 “어찌하여 (관직명을) 막리지(莫離支)라고 호칭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161)왕운(王惲), 『추간선생대전문집(秋間先生大全文集)』 권82∼84 ; 장동익, 『원대 여사 자료집』,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97, 50쪽. 막리지는 고구려의 관직명인데, 사천택이 그것을 김인준의 관직으로 잘못 알고 있던 점만 보아도 그는 분명히 고려와 고구려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는 일찍이)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복속시 킬 수 없었다.”고 한 쿠빌라이의 말에서뿐 아니라, 금나라 사람으로 원나라에 귀화한 학경(郝經)이 지은 시(詩)에서도 엿보인다. 학경은 “(고려는) 나라를 세운 지 1000여 년이 되었고 …… 일찍이 수 양제를 거꾸러뜨리고 당 태종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다.”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시 많은 몽골인이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하여 고려를 고구려와 구분하지 못하거나, 고려를 고구려의 연장체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162)김인호, 앞의 글, 122∼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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