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몽골인의 무관심과 고려 ‘문명론’
  • 자기 확신적 고려 ‘문명론’
이정란

몽골인은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멸시하는 고려인의 인식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때로는 스스로 ‘열등감’을 표출하거나 고려의 문물제도를 부러워하였다. 예를 들어 1278년(충렬왕 4)에 쿠빌라이는 고려 왕에게 “짐은 글을 알지 못하는 ‘거친 사람(麤人)’이고, 그대는 글을 아는 ‘정밀하고 세밀한 사람(精細人)’이다.”라고169)『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 4년 7월 무술. 말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보면 쿠빌라이가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는 듯하지만, 문맥을 보면 충렬왕이 문명인으로 자부하고 있는 사실을 비꼰 말이라 여겨진다. 즉, 너는 글을 아는 정밀한 사람이지만 “내 말을 잘 들어 보아라.”라 며 이어지는 말과 훈계가 그 점을 보여 준다. 정주인의 눈에 비친 자신에 대한 멸시를 도리어 자신이 직접 언급함으로써 힘의 우위에 있던 자신의 위치를 상대로 하여금 자각하게 하고, 나아가 상대가 가진 문화적 우월감의 허망함을 깨닫도록 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흔도(忻都)에게서도 엿보인다. 흔도는 고려인이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한족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몽골인을 멸시하며 살육을 일삼는 종족으로 여기는 사실에 대하여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인의 노복(奴僕)이 된 까닭이다.”라고170)『고려사』 권104, 열전17, 김방경(金方慶). 역설하였다. 흔도 역시 힘의 압도적인 우월성을 과시하고 그것이 하늘의 뜻임을 강조함으로써 고려인의 쓸데없는 문화적 우월감에 일침(一針)을 놓았던 것이다. 결국 고려를 글을 아는 문명의 나라라고 한 말은 열등의식(劣等意識)의 표출이 아니라 힘의 절대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몽골은 스스로를 ‘한없이’ 비하할 수도, 고려를 ‘한없이’ 높여 줄 수도 있었다. 자국의 압도적인 무력과 천명에 대한 정확한 자각(自覺)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문명론’적 고려관을 내세울 수 있게 한 이면에는 몽골인의 무한한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몽골인이 고려의 문명성이나 문명 의식을 앞서와 같이 비꼬기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1271년(원종 12) 5월에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된 조양필(趙良弼)과 초천익(焦天翼)은 당시 고려에서 과거 합격자를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성대한 일이다. 우리가 고려에서 과거제가 실시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이번에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난리가 일어났는데도 고려의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이다.”라고171)『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12년 5월 경인. 하였다. 금나라의 세족(世族) 출신인 조양필 등이 고려의 과거제 실시에 대해 이처럼 언급한 것은 당시 유목인이 그만큼 고려의 문명 지 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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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량 급제첩(張守良及第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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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양국의 교섭과 접촉이 지속됨에 따라 점차 깊이와 내용을 달리하게 되었다. 특히 개별적 교류를 통해 고려 문화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피상적 수준에 머물던 몽골인의 고려관에 구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자연히 고려관의 변모를 불러왔다. 즉, “고려의 문물과 제도는 한나라와 당나라를 사모하여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중원과 같다.”는172)학경(郝經), 『능천집(陵川集)』 권19, 가시(歌詩), 고려탄(高麗歎) ; 장동익, 앞의 책, 1997, 46쪽. 정도의 인식에서 개개인의 학식을 평가하고 대비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은 행적과 문장이 널리 알려져 그의 시가 원대의 시문집에 많이 등재되고 소순(蘇洵)에게 비길 정도였는데,173)왕운, 『추간선생대전문집』 15, 칠언 율시(七言律詩), 화고려참정이현보(和高麗叅政李顯甫) ; 장동익, 앞의 책, 1997, 125쪽 1264년(원종 5)에 원나라에 입조하였을 때 쿠빌라이가 그를 특별히 우대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당시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交遊)하여 해동 현인(海東賢人)이라 칭송을 들었는데, 개중에 그의 초상에 배례(拜禮)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원대의 대표적인 문장가 왕악(王鶚)은 고려의 김구(金坵, 1211∼1278)가 지은 표문(表文)을 보고 탄복하여 서로 시문을 주고받 았다고 한다.174)장동익, 앞의 책, 1994, 200∼202쪽.

한편 당시 고려 관인(官人)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던 쿠빌라이는 때때로 고려인에게 정책을 자문하기도 하였는데,175)『고려사』 권105, 열전18, 정가신(鄭可臣) ; 권109, 열전 22, 박전지(朴全之) ; 권110, 열전 23, 김태현(金台鉉) ; 장동익, 앞의 책, 1994, 190, 205쪽. 고려 문명에 대한 몽골의 이러한 높은 평가는 사실 개인의 학식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려의 기술자는 한인(漢人)에 비해 우수하고 유학자는 모두 경서에 통달하고 있다.”라고176)『원사』 권159, 열전46, 조양필(趙良弼) ; 장동익, 앞의 책, 1994, 190쪽. 표현할 만큼 고려인과 고려의 문화 전반에 대한 평가와 궤를 같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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