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2. 원의 이중적 고려관과 중화적 세계관
  • 사위의 나라와 독립 왕조
  • 고려관의 이중성
이정란

몽골은 세계 제국을 건설, 운영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자국의 지역 편제와 운영 방식에 따라 이해하였다. 고려를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면서도 한편으로 독립 왕조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몽골인은 고려에 대해 사위의 나라이자 독립 왕조라는 상반된 인식을 가졌다. 우선 몽골인은 고려를 여느 복속국과는 다르게 보았다. 즉, 원나라 사람 우집(虞集)이 “고려는 우리나라에 사위와 장인이라는 인척(姻戚) 관계를 맺음이 있어 왕국으로 관(官) 을 설치함이 천자의 조정(天朝)에 비길 수 있었으니, 이는 다른 속국이 감히 할 수 없는 바였다.”라고177)우집(虞集), 『도원유고(道園類稿)』 권20, 「송헌부장낙명환해동시서(送憲部張樂明還海東詩序)」 ; 장동익, 앞의 책, 1994, 220쪽. 평한 말이나, 1310년(충선왕 2)에 원 무종(武宗)이 “짐이 보건대 오늘날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社稷)을 보유하며 왕위를 누리는 것은 오로지 삼한(三韓)뿐이다.”라고178)『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2년 7월 을미. 한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인은 고려가 여타 복속국과 달리 왕조로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인 역시 “쿠빌라이께서 고려의 옛 풍속을 고치지 않고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게 하였다.”거나179)『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 10년 정월. “지금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라고180)『고려사절요』 권25, 충숙왕 4년 12월. 하여 양국의 관계를 그러한 기조에서 이해하였다.

한편 몽골인은 고려를 자국의 ‘동번(東藩)’, 즉 동쪽 울타리에 있는 속국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천자가 세상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 멀고 가깝거나 크고 작음에 차별이 없다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논리를 고려에게 강조하였다.181)『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 4월 신유 ; 김인호, 앞의 글, 130쪽. 물론 일시동인은 극히 형식적인 차원의 논리여서 그 자체가 고려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근거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를 ‘사위의 나라’로 취급하였던 몽골인의 인식에는 고려의 독자성을 부정할 몽골 질서적 관념이 내재해 있었다. ‘사위의 나라’라는 인식은 고려를 독립 왕조가 아니라 대원 울루스(Ulus, 유목민의 나라라는 뜻)에 편재된 투하령(投下領)의 하나로 보는 것이었다. 사실 몽골 제국은 여러 투하의 복합체 내지 연합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182)森平雅彦,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 朝鮮史硏究會, 1998. 투하는 칭기즈 칸의 가계인 황금 씨족이나 부마(駙馬), 후비(后妃), 공신(功臣) 등이 분립적으로 보유하던 영토나 인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는 충렬왕 이후 원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원나라의 부마가 되었으므로, 몽골인의 처지에서 보면 고려의 영토와 인민은 원나라의 부마가 보유하고 있는 투하령이 되는 셈이다. 결국 몽골인은 고려를 독자성을 지닌 제국의 외연적 존재로 파악하면서도 한편으로 원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편입된 투하로 보는 이중적 고려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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