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2. 원의 이중적 고려관과 중화적 세계관
  • 사위의 나라와 독립 왕조
  • 이중적 지위의 일체화
이정란

몽골인에게 이러한 이중적 고려관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 관계는 아니었다. 그것은 원나라 황제가 고려 국왕에게 내려 준 국왕인(國王印)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쿠빌라이는 충렬왕이 그동안 고려 왕으로서 가지고 있던 ‘국왕지인(國王之印)’과 원나라의 부마로서 소지하고 있던 ‘부마금인(駙馬金印)’을 통합하여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이라고 새긴 도장을 1218년(고종 5)에 고려에 하사하였다. 이는 국왕과 부마의 지위가 ‘일체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제국의 외연적 존재인 속국의 국왕이라는 지위와 내포적 존재인 부마라는 지위가 고려 국왕 한 사람에게 일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83)김호동, 앞의 책,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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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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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고려의 이중적 지위는 고려인의 인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고려인이 본조(本朝)를 고려와 원나라를 모두 지칭하는 ‘이중적 국가 개념’으로 사용하였던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184)정구복, 「이제현의 역사 인식」, 『진단 학보』 51, 진단 학회, 1981, 241쪽. 또한 최해(崔瀣, 1287∼1340)가 “본국에서 벼슬하면 본국의 신하가 되고 천자의 조정에서 벼슬하면 천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중한 것인지는 내가 분별하기 어렵다. 옛말에 이르기를 ‘한 나라의 선비도 되고 천하의 선비도 된다.’고 하였다.”라고185)최해(崔瀣), 『졸고천백(拙藁千百)』 2, 「최대감묘지(崔大監墓誌)」 ; 장동익, 앞의 책, 1994, 189쪽. 쓴 글이나, 이곡(李穀, 1298∼1351)이 “무릇 고려라는 하나의 국가의 명령과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는 하나의 성(省)의 권한을 총괄하여 오로지 혼자 결정하기 때문에 고려 국왕을 ‘국왕 승상(國王丞相)’이라고 일컫는다.”라고186)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권9, 「송게이문서(送揭理問序)」. 한 언급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몽골인이나 고려인에게서 보인 고려의 이중적 지위는 항상 양립하는 ‘일체화’된 상태로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부터 상반되며 길항적(拮抗的)인 것이었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진전에 따라 무게 중심이 이동하곤 하였다. 특히 ‘입성 책동(立省策動)’을 전후하여 길항적 성격이 전면으로 표출되었다. 입성 책동은 그동안 유지해 왔던 고려 왕조의 독자적 운영을 정지하고 원나라의 영토 내에 설치된 여러 행성과 똑같은 체제로 고려를 개편하자는 논의이다. 이 논의는 고려인으로서 원나라 황제 옹립에 큰 공을 세우고 충선왕의 위세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홍중희(洪重喜)에 의해 처음 제기한 이래, 고려의 내분이나 원나라의 압제가 심화되는 시점마다 건의되어 고려를 혼란으로 빠뜨리는 양국의 주요 정치 현안이었다. 따라서 입성론(立省論)이 제기될 때마다 원나라 관리들은 평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려관을 표출하였다. 처음 입성론을 제기한 것은 대개 고려 측 인물이었지만, 그것에 찬동(贊同)한 원나라 관리들은 고려의 ‘국호를 없애’거나 ‘나라를 폐하고 군현(郡縣)으로 삼자’는 데까지 논의를 이끌어 나감으로써 ‘속국’으로서의 고려관을 좀 더 현실화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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