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2. 원의 이중적 고려관과 중화적 세계관
  • 부정부패와 하급 문명의 나라
  • 노비제 개혁 시도에서 드러난 부정론
이정란

이와 같은 부정적 인식은 양국의 지속적인 교류와 교섭에서 야기된 일이기도 하였지만 원나라가 중국적 화이론으로 무장하게 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화이론은 단순히 고려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고려의 습속을 개변(改變)하려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활리길사(闊里吉思)가 추진한 노비 제도의 개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활리길사가 행성(行省)의 평장(平章)이 됨에 부모의 한쪽이 양인(良人)인 노비는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재상들이 이를 중지시키는 자가 없는지라 김지숙(金之淑)이 말하기를, “세조 황제가 일찍이 첩첩올(帖帖兀)을 보내 국사(國事)를 감독하게 할 때 조석기(趙石奇)란 자가 양인이 되기를 호소하니 첩첩올이 상국의 법을 쓰고자 하여 일을 아뢰었는데, 세조께서 조서를 내려 본국의 옛 습속에 따르도록 하였으니, 이 예가 아직도 그대로 있으므로 가히 변경하지 못할 일입니다.”라고 하니, 활리길사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195)『고려사』 권108, 열전21, 김지숙(金之淑).

원나라가 고려의 노비제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시도는 이미 1271년(원종 12)에 있었다. 당시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가 노비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재위 중 어느 해에 감국(監國)의 자격으로 고려에 파견된 첩첩올이 원나라의 법을 따라 노비의 신분 귀속을 정하려고 하였음을 앞의 글에서 볼 수 있었다. 그 후 1300년(충렬왕 26)에 활리길사의 노비제 개혁 시도가 고려의 강력한 반발로 끝내 추진되지 못하였고, 이후에도 노비제의 개혁 시도는 그치지 않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도 입성론과 함께 노비제 개혁안이 다시 제기되었다.196)장동익, 앞의 책, 1994, 124쪽.

원나라 사람에게 고려의 노비제 개혁은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 들은 고려의 노비제를 단순히 낯설며 이질적인 풍속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이며 없애야 할 요소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원나라 사람들은 여러 번 그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고, 고려인은 틈만 나면 고려 신분제의 엄격성을 강변하여야 했다. 8세 호적(戶籍) 안에 천한 혈통이 없어야만 혼인이나 벼슬 진출에 지장이 없다는 고려 조정의 공식적인 언급 이외에도 고려 신분제에 대한 개별적 차원의 변론을 자료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독로화(禿魯花, 인질)였던 한사기(韓謝奇)의 손자 한중보(韓仲輔)는 소천작에게 “우리나라의 풍속은 (신분 질서가 엄격하여) 무릇 벼슬이나 결혼에 반드시 각각 그 가문이 아니면 하지 않았습니다. 즉, 세가(世家)나 훈귀(勳貴)의 후손이 아니면 관직에 보임되지 않았고, 대대로 의관(衣冠)이 아니면 짝이 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라고197)장동익, 앞의 책, 1994, 171쪽. 변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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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묘 벽화의 인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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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원나라가 끈질기게 고려의 노비제를 개혁하려 하였던 의도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노비제를 주요한 사회 모순으로 보고 노비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개혁을 시도하였다는 감상론적 근거는 차치(且置)하고, 고려의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어 고려 지배층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원나라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화(內地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198)장동익, 앞의 책, 1994, 124쪽. 그러나 그 근원에는 인신(人身)을 구속하는 고려의 후진성에 대한 몽골인의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것은 노비제 개변 문제로 고려 조정과 화합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송환된 활리길사가 황제에게 “(고려는) 예법을 참람(僭濫)하게 쓰고 형벌을 아무렇게나 실시하며, 쓸데없는 관원이 많아 백성의 폐해가 됩니다.”라고199)『고려사절요』 권22, 충렬왕 27년 4월. 한 말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려에 있었을 때 활리길사는 노비제뿐 아니라 여러 행정 제도도 바꾸려 시도하였는데, 그 바탕에 깔려 있던 “고려관(高麗觀)은 제후국으로서 갖춰야 할 예의도 모르고 형정(刑政)에 일정한 원칙이 없으며, 할 일 없는 관원을 많이 두어 백성을 수탈하고 있다.”는200)『고려사절요』 권22, 충렬왕 27년 4월. 것이었다. 이렇게 고려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자국과 다른 고려 노비제의 운영이 그의 눈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활리길사는 고려 노비제의 연원을 정밀하게 따져 보지 않은 채 중국의 관례를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습속이나 신분제의 전통을 감안하지 않은 채 중국식으로 바꾸고자 하였던 그의 개변 시도는, 고려의 옛 습속을 그대로 보존하라고 하였다는 쿠빌라이의 약속을 들먹이며 강하게 반발하는 고려인의 반박에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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