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4장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조선인
  • 2. 표류한 서양인들이 이해한 조선
  • 조선에 표류한 서양인들
김경란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 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의 동방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때 동방 진출의 선두에 선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포르투갈은 16세기 초엽에 말레이 반도의 믈라카(Melaka)를 점령하였고, 중엽에 중국 마카오(Macao)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스페인은 1519년 세비야(Sevilla)를 출발한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1521년 남미 대륙 남단에서 태평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필리핀을 발견하였는데,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무역의 기지로 삼았다. 이와 같이 16세기 중엽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진출하여 17세기 초까지 이 지역 전 해역에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해상 무역을 독점하였다.244)김기혁,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한국사』 37, 국사 편찬 위원회, 2000.

17세기를 전후하여 중국과 일본 나가사키를 오가던 서양 상선이 난파하여 조선에 표착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조선에 상륙하였던 서양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582년(선조 15) 마리이(馬里伊)가 제주도에 표착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곧 명나라로 이송된 것이다. 당시는 포르투갈 상인만이 이 지역의 해상에서 활동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마리이는 포르투갈인으로 추정된다.245)홍이섭, 「서울에 왔던 구미인」, 『향토 서울』 1, 서울 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1957. 17세기에 들어서 서양인의 조선 표착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는데, 1604년(선조 37) 스페인 출신 후안 멘데스(Juan Mendes)가 첫 번째 사례이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일본의 나가사키에 가기 위해 일본 함선에 승선하였다가 난파되어 조선 수군에 포로로 잡혔는데 이후 명나라로 송환되었다.

멘데스 이후에 조선에 표착한 서양인은 주로 네덜란드인이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네덜란드인은 동양 무역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압하고 패권을 장악하였다. 네덜란드는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중국, 일본, 인도 등 아시아와의 교역 중심지로 인도네시아 자와(Pulau jawa) 섬에 바타비아(Batavia, 지금의 자카르타)를 건설하여 활발한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주변의 해안을 항해하는 서양인은 네덜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박연(朴燕)이었다.246)그의 조선 이름은 박연(朴燕·朴延)이다. 이 밖에도 기록에 따라 호탄만(胡呑萬)이라고도 하였는데, 모두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의 음역(音譯)으로 보인다. 朴은 벨테브레이에서, 燕은 얀 야너스에서 각각 취음(取音)한 것이며, 胡呑萬 역시 벨테브레이의 음역으로 보인다(김양선, 「인·효 양조 난인의 표도와 한·중·일 삼국의 외교 관계-야소종문 문제를 중심으로-」, 『향토 서울』 30, 서울 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1967). 박연의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이며, 네덜란드 리프(Riip) 지방 출신으로 1626년(인조 4)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던 중에 경상도 경주 근해상에 표류하게 되었다.247)기록에 따라서는 표도지(漂到地)를 제주로 보기도 하였다. 이때 그의 동료 디레크 히아베르츠(Direk Gijsbertz), 얀 피에테르츠(Jan Pieterz)와 함께 담수(淡水)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육지에 상륙하였다가 주민들에게 발견되었다.

박연 일행은 경주로 압송되었고 경주 부사는 그들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것을 알고 동래에 있는 왜관(倭館)으로 보냈다. 그러나 왜관에서는 그들이 일본 표인(漂人)이 아니라는 이유로 돌려보냈고, 이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부산에 억류되어 있었다.248)김양선, 앞의 글, 1967.

처음 경주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경주부에 끌려갔을 당시 박연 일행은 상당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기록을 통해 박연 일행이 처음 표착하였던 당시의 상황과 그들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박연은 남만국(南蠻國) 사람이다. 숭정(崇禎) 무진년(戊辰年)에 우리나라에 표도(漂到)하였다 …… 또 말하기를,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高麗人)은 인육(人肉)을 구워 먹는다고 들었다. 그들이 표도하였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군졸들이 횃불을 높이 들고 와서 살피자, 배 가운데 사람들이 이 불은 우리를 구워 먹기 위해 지핀 것이라고 말하며 울었으니, 곡성이 하늘에 미칠 정도로 컸다. 얼마 후에 비로소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는데, 대개 남만의 풍속에서는 밤에 다닐 때는 모두 등불을 들고, 횃불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249)정재륜(鄭載崙), 『한거만록(閑居漫錄)』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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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접왜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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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의 『한거만록(閑居漫錄)』에 실린 박연 표착 당시의 기록이다. 정재륜은 효종의 부마(駙馬)로서 박연을 가까이에서 접촉한 인물로 추정되며, 그가 지은 『한거만록』의 기록은 박연 일행에 대한 조선 측 기록 가운데에서 가장 이른 것이다. 이 자료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먼저 박연이 조선을 여전히 고려라는 명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만 하여도 조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인은 인육을 먹는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군졸들이 지핀 횃불을 자신들을 구워 먹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던 것이다. 당시 서양인은 인육을 먹을 정도로 야만적인 비문명 국가로 조선을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 역시 당시 서양인이 조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부산에 억류되어 있던 박연 일행은 1628년(인조 6)에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인조에게 본국으로의 귀환을 호소하였다. 풍랑 등의 이유로 외국 선박이 조선 해안에 표박하는 경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본국이나 그들의 목적지에 송환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였다. 중국이나 일본의 선박이 표박하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관례를 적용하였다. 박연 일행이 처음 경주 인근에 표박하였을 때, 경주의 지방관이 박연 일행을 동래의 왜관으로 보낸 것은 그들의 목적지가 일본 나가사키였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관에서는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부산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왕에게 귀환을 호소하였는데도 박연 일행은 끝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명나라와의 관계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국내에 중대한 사건이 생기면 명나라에 보고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고하여야 했다. 그런데 박연이 한양으로 이송되기 직전인 1627년(인조 5)에 청나라의 침입을 받았고, 육로로 베이징(北京)에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억류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듯하다. 이후 박연 일행은 훈련도감(訓鍊都監)에 편입되었고, 박연은 항왜(降倭)와 표한인(漂漢人)으로 구성된 부대의 장(將)이 되었다. 이들은 1636년(인조 14)에 발발한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였는데, 박연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전사하였다. 혼자 살아남은 박연은 조선인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조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자국(自國)의 풍토, 법률 등을 소개하고 서양의 화포 제조술에 관한 지식을 조선인에게 전하기도 하였다.250)김양선, 앞의 글, 1967.

조선에 표박하였을 당시 박연은 조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 다. 조선이라는 국가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연이 일본, 류큐(琉球), 베트남 등지를 여러 차례 다니면서 얻은 견식(見識)이 상당하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존재는 서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 역시 서양에 대한 이해 정도가 매우 낮았으며, 박연을 통해 비로소 서양 세계에 대해 진전된 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박연은 조선에서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조선을 서양 세계에 알리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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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한 스페르베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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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존재를 서양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린 사람은 네덜란드인 하멜이다. 하멜과 그 일행은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선 스페르베르호(Sperwer號)에 승선하여 타이완(臺灣)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섬에 설치된 네덜란드 무역관으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의 해안가에 표착하였다. 함께 승선하였던 64명 가운데에서 36명만이 살아남았고, 그들 대부분도 부상이 심한 상태였다. 하멜 일행은 처음에는 그들이 표착한 곳이 무인도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표착한 이 튿날 현지 주민들에게 발견되었으며, 급기야 수많은 무장 병사에게 포위되어 심문을 받기에 이르러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을 당시 하멜의 기록을 보자.

약 2,000명의 군인이 몰려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말을 타고 있었고 일부는 말을 타지 않은 채 마치 전투 대열처럼 우리의 천막 앞에 늘어섰다. 우리 일행 가운데 서기와 수석 조타수, 두 명의 수부 등 네 명이 그들의 대장 앞에 이르자 그는 우리 일행의 목에 각기 방울이 달린 깃을 달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마치 우리의 고국에서 양이 달아나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목에 방울을 달아 놓는 것과 같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우리 일행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환호를 질렀다. …… 오후가 되자 그들은 여러 명이 손에 밧줄을 들고 다시 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모두 목매달아 죽이는 줄로만 알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밧줄로 난파한 우리 배로 달려가더니 그들에게 유용한 물건을 건져 올리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안심하였다.251)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24∼25쪽.

대규모 무장 병사에 둘러싸여 심문을 받던 하멜 일행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조선인과의 첫 대면을 시작하였다. 하멜 일행은 앞서 조선에 표착하였던 박연 일행처럼 고려인은 인육을 먹는다는 식의 극단적인 인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역시 조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심을 느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의 표착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하멜 일행의 표착에 대한 당시 조선 측의 기록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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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의 이동 경로
하멜 일행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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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명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 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000령(領)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吉利是段, 크리스천)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 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 나가사키)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었기 때문이다.252)『효종실록』 권11, 효종 4년 8월 6일 무진.

당시 제주 목사였던 이원진은 하멜 일행의 표박 사실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서양의 물품, 항해 목적지 등에 대해 보고하였고,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이들보다 앞서 조선에 표박하였던 박연을 파견하였다. 하멜 일행과 박연의 만남은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박한 지 2개월 후에 이루어졌다. 조선에 대한 정보 부재로 인한 공포심과 언어의 불소통, 문화적 이질감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하멜 일행에게 박연과의 만남은 안정감을 되찾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박연을 통해 하멜 일행에 대한 기본적 조사를 마친 조선 조정은 이듬해인 1654년(효종 5)에 하멜 일행을 한양으로 이송하였다.

하멜은 제주도에서 한양에 이르는 이송로(移送路)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제주를 떠난 하멜 일행은 해남, 영암, 나주, 장성, 정읍, 태인, 금구, 전주, 여산, 은진, 연산, 공주를 차례대로 거쳐 경기도에 이르렀고 곧이어 한양에 도착하였다. 한양으로 이송된 하멜 일행은 당시 국왕이던 효종 앞에 불려 갔다. 하멜 일행을 직접 대면한 효종은 이들에 대한 호기심을 표하며, 노래나 춤 등 네덜란드의 풍속 놀이를 해 볼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서양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왕뿐 아니라 한양의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하멜 일행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이들의 훈련 모습이나 춤 등을 청하여 보았다. 당시 조선인에게 서양 세계와 서양인은 매우 낯선 존재였으며, 한두 명도 아닌 수십 명의 서양인을 한꺼번에 대면하는 것은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양에는 하멜 일행이 괴물처럼 생겼으며, 심지어 물을 마실 때는 코를 젖힌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 정도로 낯선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의 호기심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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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의 한양 이송로와 탈출 경로
하멜 일행의 한양 이송로와 탈출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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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이송된 직후 하멜 일행은 상당한 후대(厚待)를 받기도 하였다. 박연의 지휘 아래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백미(白米) 70근에 상응하는 급료를 받았고, 조선어로 개명한 이름, 나이, 국적, 지난날의 직업 등을 새긴 호패(號牌)와 화승총(火繩銃)을 소지하였으며, 왕이 하사한 포목으로 한복을 지어 입어 외견상으로는 조선 사회의 정식 구성원으로 대우받았다. 또한 소속 관청에서 실시하는 하례(賀禮)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지켜야 할 고관에 대한 경의 표시인 관례(官禮)에 이르기까지 여러 예법과 구체적인 조선 사회의 모습을 소개하는 교육이 박연의 통솔 아래 이루어졌다. 일종의 현지화 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253)지명숙, 「하멜 일행의 한국 체류, 적응 및 이해」, 『동방학지』 122,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2003.

차츰 조선 사회에 적응해 가던 하멜 일행은 청나라 사신에게 귀국을 호소한 사건을 계기로 지방으로 이송되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표류 사건이 청나라에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체류하는 동안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에 감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던 효종은 조선의 군사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그런데 각각 남산(南山)과 북산(北山)으로 불리던 헨드리크 얀스(Hendrik Jansz)와 헨드리크 얀스 보 스(Hendrik Jansz Bos)가 탈출하여 청나라 사신이 지나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다가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 귀국을 호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54)『효종실록』 권14, 효종 6년 4월 25일(기묘). 그러나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옥사(獄死)하였고, 나머지 일행은 전라도로 이송되어 군역을 지거나 그 밖의 각종 잡역(雜役)에 시달리면서 구걸로 연명하였다. 이후 1666년(현종 7)에 하멜을 포함한 여덟 명이 조선을 탈출하기까지 전라도의 하층민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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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는 하멜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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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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