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4장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조선인
  • 3.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
  • 선교사의 파견
김경란

16∼17세기에 조선에 들어왔던 포르투갈인 마리이를 비롯하여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 하멜 등은 풍랑 때문에 우연히 조선에 표착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특정한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선교할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유럽인 선교사들이었다. 17세기를 전후하여 동양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새로운 선교 대상국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을 주목하였다. 특히 일본이나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인접 지역인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16세기 이후 일본과 중국에 진출한 유럽의 선교사들은 인접국인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기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273)그리스도교 선교사의 조선 입국에 관한 내용은 조광, 앞의 글, 481∼486쪽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최초로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 입국을 시도한 선교사는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Jesus會) 선교사 가스파르 빌렐라(Gaspar Vilelar)였다. 그는 1571년(선조 4)에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당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일본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는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세스페데스 (Gregorio de Céspedes)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초청으로 조선의 남해안에 건너와 천주교 신자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사(聖事)를 집전하였으나 조선인과 직접 접촉하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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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온 서양인 신부
일본에 온 서양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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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페데스의 서간집
세스페데스의 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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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입국을 시도한 또 한 명의 선교사는 스페인 출신의 후안(Juan)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도미니크회(Dominic會) 선교사로 1601년 필리핀에 도착하여 말레이 어(Malay語)를 익히다가 조선 포교의 적임자로 선발되어 선교사 두 명과 함께 1618년에 조선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입국이 거부되어 두 명은 필리핀으로 회항하고, 후안은 일본에서 체포되어 결국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중국에 들어갔던 예수회 계통 선교사들도 조선 선교를 시도하였다. 첫 시도는 명나라 말기 서광계(徐光啓, 1562∼1633)와 프란체스코 삼비아시(Francesco Sambiasi) 신부가 추진하였다. 서광계는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자신이 청병 사신(請兵使臣)이 될 경우 삼비아시 신부를 대동하고 조선에 들어가 개교(開敎)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청병이 좌절되면서 전교(傳敎) 계획도 무산되었다. 그 후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가운데 조선 선교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아담 샬(Adam Schall)이었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교분을 나눈 인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샬은 서양 학문과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현 세자와 교유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포교하고자 하였다. 그는 프란체스코회(Francesco會)의 안토니오 카바예로 데 산타 마리아(Antonio Caballero de Santa Maria) 신부에게 조선으로 들어가 포교하기를 권고하였고, 이에 산타 마리아 신부는 베이징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샬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산둥 반도(山東半島)를 통해 바닷길로 조선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역시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한 사례가 있지만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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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샬
아담 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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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일본과 중국에 진출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새로운 선교 대상국으로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이 서양과 관계를 맺던 초기에 서양의 탐험가나 상인과 활발히 접촉하였던 것과 분명히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관심은 1784년(정조 8)에 조선에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의 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을 비롯한 조선인의 노력으로 창설되었다. 조선의 교회 탄생과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은 박해에 대해 기록한 글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유럽 사회에 조선의 존재가 점차 널리 알려졌다.

한편 19세기 전반에 조선의 교회는 프랑스인 선교사를 영입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비밀리에 포교 활동을 한 프랑스 선교사는 1836년(헌종 2)에 입국한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을 시작으로 1866년(고종 3)까지 모두 20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은 조선에서 병사(病死)하 였고, 세 명은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과정에서 조선을 탈출하였다. 나머지 12명의 선교사는 1839년(헌종 5)의 기유박해(己酉迫害)와 1866년의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이 직접 접촉하였던 조선인들은 거의 천주교 신자에 한정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선교 과정에서 조선인들과 긴밀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조선에 입국하였던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Paris外邦宣敎會) 선교사들은 서한과 보고서 등을 통해 조선에 관한 사정을 본국 교회에 알려 주었다. 그 결과 유럽 세계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진일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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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
프랑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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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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