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4장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조선인
  • 3.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
  • 선교사들이 바라본 조선
김경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일본, 중국에 이은 새로운 선교 대상국으로 조선에 기울인 관심을 그들의 기록에 반영하였다. 유럽인 선교사 가운데 조선에 대해 처음 언급한 사람은 조선 입국을 최초로 시도한 빌렐라였다. 그는 1571년 친우(親友)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조선에 대한 그리스도교 선교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이 편지에서 조선의 지리적 위치가 만주로 들어가는 길목임을 밝혀 주었고, 조선인은 백인종이며 맹수의 수렵과 기마에 능하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빌렐라의 조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고 부정확하지만 예수회 계통 선교사들이 조선을 인식하는 데 기여하였다.274)조광, 앞의 글, 503∼504쪽. 빌렐라의 기록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확보한 이후 여러 선교사가 조선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여러 기록이 유럽에서 간행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지리적 위치 및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사실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초기에 참패하였던 사실 등 17세기 전후 조선이 처해 있던 국제적 정세와 조선의 정치에 관한 선교사들의 기록이 유럽의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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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신부들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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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조선에 대한 선교사들의 기록은 조선의 지리적 위치뿐 아니라 조선의 제도와 풍습에 관한 언급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장 바티스트 레지스(Jean Baptiste Régis, 1663∼1738)와 뒤 알드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18세기 이후 주로 중국에 진출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쓴 조선에 관한 책자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는 선교사이자 탁월한 지리학자였던 레지스가 있었다. 그는 강희제(康熙帝)가 중국 전도(全圖)를 만드는 일을 유럽의 선교사들에게 일임하였던 시기인 1708 년 지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레지스를 비롯한 예수회 신부들은 중국 전도를 작성하기 위한 8년에 걸친 방대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베이징을 시작으로 만주(滿洲), 헤이룽 강(黑龍江), 산둥(山東), 후난(湖南), 난징(南京), 저장(浙江), 푸젠(福建),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후광(湖廣) 지방의 지도가 완성되었다.

레지스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 방문하였던 지방이나 그가 알고 있던 지방에 대한 관찰을 정리하였고, 중국에 대한 지리학적 관심의 연장에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조선에 관한 기록-조선에 관한 지리적 고찰-』을 남겼다. 이 책은 영국 왕실에서 주관하여 간행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자료 총서인 『항해·기행기 총서』 안에 영역(英譯)되어 1767년에 간행되었다.275)조광, 앞의 글, 509쪽. 레지스의 기록은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뒤 알드에게 전해져 널리 알려졌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뒤 알드는 1741년 『중국 통사 : 중국 제국, 타타르, 조선 그리고 티베트에 대한 지리적·역사적·연대기적·정치적·자연적 묘사와 그들의 독특한 관습·풍습·의례·종교·예술 그리고 과학에 대한 정밀한 기술』을 런던에서 발간하였다. 이 책 4권에 조선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내용의 상당 부분이 레지스 신부에게 받은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 책은 18세기 유럽인에게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책이었다.276)뒤 알드, 앞의 책.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 해당하는 ‘조선 왕국에 대한 지리적 관찰’은 레지스에게 받은 자료를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나머지 2, 3부에 해당하는 ‘조선의 약사’, ‘조선의 풍물’ 역시 레지스에게 받은 자료와 중국 정사에 나오는 조선에 대한 기록을 이용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 기록은 중국인이 저술한 자료를 활용하여 조선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함으로써 『하멜 표류기』에 서술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롭게 밝혀 주고 있다. 또한 레지스가 “나는 조선의 첫 번째 마을에서 4리그(12마일) 이상 나가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타르인(청나라 사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이라고 서술 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중국의 문헌 자료뿐 아니라 중국인에게 직접 들은 조선에 대한 정보도 함께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277)뒤 알드, 앞의 책, 25쪽. 따라서 조선에 대한 레지스와 뒤 알드의 기록은 직접 관찰을 통한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을 위한 조사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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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알드의 『중국 통사』
뒤 알드의 『중국 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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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기록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입국하기 이전에 조선에 대해 미리 학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즉, 선교사의 사전 학습용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레지스의 자료를 바탕으로 뒤 알드가 펴낸 책에 조선이 어떤 식으로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19세기 이후 조선에 입국하였던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뒤 알드는 레지스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먼저 “만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동타타르라는 고대 국가와 북쪽으로 접경”한 조선의 국경 지대 및 “동쪽과 남쪽으로 여러 섬이 떠 있는 바다가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였다. 북쪽으로 대륙과 연결되어 반도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조선이 섬나라가 아닌 대륙과 연결된 반도국(半島國)임을 명시하였다. 또한 조선의 지형적 특성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가운데 하나인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과 두만강이 방어막 역할을 해 주고 있음을 언급하였다.278)뒤 알드, 앞의 책, 23∼24쪽.

뒤 알드의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조선과 중국의 관계였다. 이 부분의 서술은 특히 중국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조선의 사절들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대표”로 여기고 있었고, “중국 사회의 2등급으로도 대접받지 못하였다.”라는 서술을 통해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설명하였다.279)뒤 알드, 앞의 책, 26쪽.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중국 황제의 인가(認可)가 있다면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새로운 선교 대상지인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포교할 수 있는 방법을 중국 황제의 인가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의 언어가 중국어와 전혀 다르다는 점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새로운 선교 대상지의 언어에 대한 파악이 사전에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서술은 2부로 편성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지만, 이것 역시 중국인 세 명의 저술을 토대로 발췌한 것이다.280)뒤 알드, 앞의 책, 35쪽. 즉, 『세계의 현장』의 저자 친교쿠 뤼주(Tsien Kiokiu Loui Chu), 『지리·지지(地理地誌) 개요』의 저자 강유기(Quang Yu Ki), 『세계 지리 조사』의 저자 탕칭티오(Tang Ching Tio)의 저술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조선 민족의 기원을 비롯하여 기자(箕子)의 동래(東來)와 위만 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의 설치, 부여, 고구려, 고려의 역사 등을 언급하였다. 뒤이어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였는데, 특히 임진왜란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뒤 알드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저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조선이 중국의 종속국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 역시 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서술하였다.

한편 뒤 알드는 조선의 통치 제도 및 사회 제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먼저 조선의 행정 구역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조선은 40개 이상의 군과 대도시를 관할하는 8개의 도(道)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33개의 부(府)와 큰 마을들, 48개의 주(州)와 중간 단위의 마을들, 70개의 현(縣)과 작은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특히 8개의 도에 대해서는 각각 그 지역적 특성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행정 구역 구분 및 통치는 중국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중국인 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의 토양 조건과 특산물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조선은 매우 살기 좋은 나라”이며, “쌀, 옥수수, 기장과 다른 곡물 등 생활에 필수적인 작물을 매우 많이 생산”하는 나라로 설명하였다. 특히 “인삼, 검은담비, 튼튼하고 질긴 저지(楮紙)”는 조선의 특산물이며, 종이의 경우 중국의 종이보다 훨씬 우수하여 고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조선의 복식(服飾)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중국의 마지막 황실시대에 유행하였던 대명(大明)이라는 중국풍을 본뜬 것”이라 하여 중국과 유사한 것으로 언급하였다.281)뒤 알드, 앞의 책, 24∼28쪽.

뒤 알드는 조선인의 기질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조선인은 대체로 합리적이며 쾌활하며 유순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무(歌舞)의 자질이 천부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동시에 “중국어를 잘 이해하며 즐겁게 배운다.”라고 평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기질 역시 중국의 고문헌에 나오는 평가와 유사한 것으로 볼 때 중국의 자료 또는 중국인의 말을 토대로 서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282)뒤 알드, 앞의 책, 61쪽.

이와 같이 레지스의 조사와 중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쓴 뒤 알드의 기록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와 다르거나 중국인의 인식이 깊게 투영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 당시 유럽인에게 매우 유용한 책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 조선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게 필수 지침서인 동시에 당시 유럽인에게 조선이라는 존재를 인식시키는 주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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