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5장 개항기 외국 여행가들이 본 조선, 조선인
  • 3. 오리엔탈리즘과 왜곡된 조선 인식
  • 정치의 후진성
홍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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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한국 정착민
시베리아의 한국 정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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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후진성을 표상하는 주요 주제는 매관매직(賣官賣職), 정치적 무능력 등이었다. 정치적 부정부패는 조선 사회의 발전에 최대 장애로 지목되었는데, 그 대표적 관행은 매관매직이었다. 위정자들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관직을 팔았고, 고위 관리들은 왕에게 영향력을 얻어 친척과 친구들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를 통해 관리가 된 사람들은 나라의 월급을 축내고 뇌물을 거두는 일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또 관리들의 재직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관할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갈취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따라서 “관아(官衙) 안에는 조선의 생명력을 빨아 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고”, “관리들은 살아 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거머리”라고 비판하였다.431)비숍, 앞의 책, 110, 349∼350, 492, 511쪽.

관료들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최상층 계급인 양반들의 행태 또한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새비지-랜더는 양반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은 항상 무 엇을 먹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하면서, 부자들은 그들의 삶을 그러한 식으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소비한다고 비판하였다.432)새비지-랜더, 앞의 책, 139쪽. 양반들은 생업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되지만, 친척들이 부양하거나 아내가 바느질과 빨래로 남몰래 일하여 먹고살아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양반층의 존재는 조선의 미개성(未開性)을 드러내는 대표적 징표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433)비숍, 앞의 책, 126쪽 ; 새비지-랜더, 앞의 책, 179쪽 ; 박지향, 앞의 글,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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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대신의 행차
외무대신의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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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의 최고 권력자이자 통치권자인 고종(高宗)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고종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던 외국인 여행가들이 느꼈던 공통적인 인상은 온후한 성격의 소유자로 친절하고 호의적이라는 것이다.434)조지 커즌, 앞의 책, 111쪽 ; 지크프리트 겐테, 앞의 책, 223∼224쪽 ; 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112쪽. 특히 겐테는 “말할 때마다 우러나오는 왕의 다정함은 원래 매력적이고 활달한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고 하면서 백성에게 유익한 일에는 고무(鼓舞)되며 보기 드문 담화술(談話術)을 타고난 인물로 평하였다.435)지크프리트 겐테, 앞의 책, 223쪽. 또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새로운 문물의 발명에 예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왕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436)조지 커즌, 앞의 책, 112쪽. 그 덕분에 서울은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도시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437)지크프리트 겐테, 앞의 책, 198∼199쪽. 겐테에 따르면 베이징, 도쿄, 방콕, 상하이와 같은 어떤 대도시에도 한양처럼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곳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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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진
고종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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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의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물론 고종이 나랏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근면하여 어떤 분야의 업무에도 익숙하였고 보고문, 상소문 등을 꼼꼼히 검토하였다고 한다. 호기심도 많아 비숍이 알현할 때 나눈 주요 대화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정보나 왕실 비용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중국·시베리아 견문을 비롯하여 시베리아, 일본 철도의 리당(里當) 건설비,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감정, 영국의 관리 등용 제도, 영국 귀족의 지위와 권리, 영국의 왕실 재정 관리 등 다양하였다. 특히 왕실 비용에 대해서는 많은 질문을 집요하게 퍼부어 비숍이 난감해하였을 정도였다.438)비숍, 앞의 책, 301∼302쪽. 이는 왕실 재정을 비롯한 모든 재정 관련 업무를 탁지부(度支部)에서 일원적으로 관할하기로 한 갑오개혁(甲午改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조치가 재정 운영의 합리화를 도모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왕실의 권력 약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종으로서는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나랏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고종의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우유부단하고 결단력과 추진력이 없다는 것이었다.439)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254쪽. 이에 대해 비숍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어떤 일을 단단히 그러쥐고 밀어붙일 만한 능력이 없다. 너무나 선하고 선진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감동적이다. 그가 좀 더 강인한 성격과 의지를 가지고 무가치한 자들에게 그리 쉽게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격의 박약함은 그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440)비숍, 앞의 책, 300∼301쪽. 최고 통치자로서 고종이 망국(亡國) 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경우, 오리엔탈리즘 내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왜곡될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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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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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명성 황후(明成皇后)에 대해서는 대체로 카리스마 있고 지적이며 세련된 미모의 여성으로 기억하였다. 그녀는 궁궐뿐 아니라 조선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각인되고 있었다.441)조지 커즌, 앞의 책, 112쪽 ; 새비지-랜더, 앞의 책, 181∼182쪽. 비숍은 명성 황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媒介)하였는데도 느껴지는 놀랄 만한 말솜씨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비숍은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과 왕뿐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사람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442)비숍, 앞의 책, 298쪽. 그러나 잘 알다시피 명성 황후는 일본 세력의 견제와 왕권 강화를 위해 친러책을 도모하다가 이를 견제하려는 일본에 의해 시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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