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5장 개항기 외국 여행가들이 본 조선, 조선인
  • 3. 오리엔탈리즘과 왜곡된 조선 인식
  • ‘정당화’된 식민지, 조선
홍준화

조선은 동아시아의 관문이자 요충지로서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커즌은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는 조선을 ‘땅 뺏기 놀이의 땅’이라고 표현하였다.443)조지 커즌, 앞의 책, 156, 178쪽. 마침내 일본은 1894년(고종 31) 청일 전쟁을 도발하였고, 조선은 삽시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일본은 전쟁 명목으로 ‘조선의 독립’, ‘내정 개혁’ 등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였다.444)비숍, 앞의 책, 518쪽 ; 조지 커즌, 앞의 책, 427쪽. 그러나 외국 여행가들은 이 러한 일본의 침략 행위를 묵인하였고, 조선의 내정 개입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조선이 너무 허약하고 부패하여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개혁을 위해서는 소위 ‘문명국’이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비숍은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정치는 야만적이고 잔인하였지만, 거시적으로는 조선의 진보와 정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평가하였다.445)비숍, 앞의 책, 492쪽. 커즌 역시 일본의 내정 개혁 개입을 “마치 거부하는 환자에게 먹기 싫은 약을 강권하는 의사의 직업적인 성실성에 비유될 만한 성격”이라고 치켜세우고, 노골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倂合)하고 일본 방식대로 통치한다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고 있다.446)조지 커즌, 앞의 책, 409, 416, 420∼421쪽 ; 정연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서양인의 한국관-상대적 정체성론, 정치 사회 부패론, 타율적 개혁 불가피론-」, 『역사와 현실』 34, 한국 역사 연구회, 1999. 그런데 커즌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하였던 것은 영국의 러시아 남하 정책 저지라는 전략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조선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즉, “훌륭한 소형 함대에서 식량을 공급하고 피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수많은 항구를 가지고 있으며, 부의 다양한 잠재적 자원을 물려받은 풍요로운 조선이 만일 적대국(러시아)에 의해 점령된다면 중국해 전 해상과 심지어 태평양에서조차 영국의 상행위와 이해관계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될 것”이기447)조지 커즌, 앞의 책, 173쪽.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지배 계획은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의 견제 때문에 결코 쉽지 않았다.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는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고, 조선 왕실은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개입은 일본이 전쟁을 도발하면서 가장 우려하였던 부분이기도 하였다. 커즌은 이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조선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음을 예견한 바 있다. 즉, “일본은 성공적으로 조선이 중국에 기대는 것을 막았다. 조선이 러시아에 의존한다면 일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에 기대는 것을 묵인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전쟁은 조선을 전쟁 전보다 더 심각한 수준으로 동아시아의 화약고(火藥庫)로 만들 어 버렸다.”는 것이다.448)조지 커즌, 앞의 책, 427∼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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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 파천(俄館播遷)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러일 경쟁시대가 도래하였지만, 1904년 2월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 또한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 도발과 더불어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조선 침략 전쟁도 동시에 시작되었다. 일본의 군사적 위협 속에 2월 23일 한일 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고, 그 결과 조선의 행정권·군사권이 박탈되고 외교권이 제한되었다. 또한 군령(軍令)을 공포하여 일본의 군사 활동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처벌하고 진압하였다. 군용지(軍用地)와 철도 용지를 마련하기 위해 한반도 전역에서 방대한 양의 토지를 침탈(侵奪)하였으며,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로 징발(徵發)과 징용(徵用)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행위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조선인들은 일제의 군용 철도 운행을 방해하거나 전복(顚覆)하고, 투석(投石) 행위 등으로 저항하였다. 또한 보안회(保安會)를 결성하여 일본의 토지 침탈에 항거하였으며, 유생들은 의병 운동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국내의 저항이 있었음에도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외국인들 의 시각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적 행위와 수탈을 개혁으로 호도(糊塗)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행위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고 미화하였다.449)러일 전쟁,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이 추진한 정책에 대한 외국의 시각, 특히 독일인의 시각에 대해서는 이지은, 앞의 책, 263∼282쪽 참조. 그러나 1904년 12월 무역상으로 가장하고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스웨덴 기자 그렙스트는 이들과 조금 다른 시각에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부산항을 통해 조선에 도착한 그는 일본 거류지를 접하고, 그들의 침략 계획을 절감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인들이 조선에 적응하지 않고 그들의 풍속을 유별나게 그대로 심어 놓은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의 멸망을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의 제반 기반 구축이 조선인의 개혁된 장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450)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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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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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렙스트의 조선관도 오리엔탈리즘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조선을 “노동을 수치로 알며 게으르고 무식하고 걸인이 많은 나라”라고 하거나, 조선의 백성들은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나태하여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다.”는 등 소위 동양의 정체성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하는 관용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렙스트는 일제의 침략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 방 문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면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제 일본의 조심스럽던 행위는 아주 노골적으로 변하였다. 코레아는 사실상 일본의 보호령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일본이 철도, 우편, 무역, 해운을 온통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코레아 우체국의 코앞에 일본 우체국이 버티고 서 있었고, 국도 주위로는 무장한 일본 경찰들이 순찰을 다녔으며, 도시에서는 일본 경찰들이 자신들 기분 내키는 대로 코레아 군졸들을 다루다가 비위에 거슬리면 바로 엉덩이를 질러 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451)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257쪽.

한편 한양에 체류한 지 이틀째 되던 날에는 우연히 일본 군인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즉, 일진회 회원들의 집회를 저지하는 조선 군대와 수백 명의 일본 군인 및 경찰 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조선 군인들이 밀리자 주변에 있던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도와주기 위해 투석에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조선인들을 향해 일본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였던 것이다.452)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257∼262쪽. 또한 농부 세 명이 토지를 강제로 일본인에게 빼앗긴 것에 대한 항거로 철로를 부수려다가 발각되어 무참히 총살당한 장소도 가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통해 그는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일본에서 받았던 좋은 인상을 수정하게 되었다.453)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267∼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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