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6장 일제와 서양인이 본 식민지 조선
  • 1. 근대 서양의 ‘동양’에 관한 인식
류시현

평면으로 된 세계 지도를 작성할 때 항상 자국(自國)을 중심에 놓는다. 유럽을 지도 중심에 놓으면 아시아 지역은 지도 오른쪽 끝에 위치한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던 이러한 지도에 익숙한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는 세계 지도의 동쪽에 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에게 가까운 동쪽 지역을 근동(近東), 지금의 아랍 지역을 중동(中東)이라고 불렀으며, 동북아시아 지역의 우리나라, 중국, 일본은 극동(極東, far east)이라고 불렀다. 즉, 서양인의 지리적 인식 속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은 거리상 가장 먼 곳이다. 멀어서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곳의 정보를 쉽게 접하거나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였고, 따라서 대상 지역을 미지의 대상 내지 신비로운 곳으로 만들었다.

조선을 서양에 제일 먼저 알린 책은 1668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발행된 『하멜 표류기(Narrative and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7세기 당시 조선 사회의 사실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종류의 공상이나 연상 또는 꾸며 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쉽게 여행할 수 없는 곳인 조선은 이렇듯 상상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산업 혁명’ 이후 교통, 통신의 발달은 유럽인으로 하여금 장거리 여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미지의 세계인 조선은 점차 서양에 알려졌다. 개항 이후 서양인이 조선을 직접 방문하고 본격적으로 많은 기행문, 여행기 등을 남기면서 ‘상상하였던’ 조선의 이미지는 점차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들이 묘사한 조선과 조선인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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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심의 세계 지도
유럽 중심의 세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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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지식 생산은 생산자의 주위 환경에 지배된다. 동양 혹은 조선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유럽인이나 미국인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상 지역을 바라보았고, 이들의 여행기는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서양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서양인은 동양 혹은 조선에 관해 ‘문명(文明)과 야만(野蠻)’ 같은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의 논리를 반복 재생산하였다. 예를 들면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은둔국’, ‘은자의 나라’와 같은 조선에 관한 인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과 조선인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과 양태는 단순히 몇 가지의 논리 및 도식화로 정리되었다.454)서구인의 동양에 관한 전형적인 이미지 형성과 관련하여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동양-그 이질성, 상이성, 이국적인 관능성-과 결부된 비유적 표현은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르네상스를 통하여 전달되어 온 그러한 표현의 특징을 일반화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 단정적이고 자명한 것들이다. 사용되는 시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다. 그것들은 반복과 강제를 인상 지운다.”라고 보았다(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 문고, 1991, 127쪽). 즉, 서양인이 묘사한 조선과 조선인은 ‘실체’라기보다는 서양인이 어떻게 보았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를 대상으로 서양인이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인상이 지속되거나 바뀐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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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가 본 동양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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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시기와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식민 지배를 합리화 혹은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한다고 주장하였고,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연구를 통해 부정적인 ‘조선상(朝鮮像)’에 관한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즉, 일본의 조선인관은 조선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의 담론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서양인 방문객과 여행가의 관심은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던 조선의 운명에 관한 서양의 표상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출판된 서양인의 조선에 관한 여러 기행문 또는 인상기(印象記)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과 한국인이란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통해 서양인들은 다양한 기행문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서양인이 본 조선과 조선인을 검토하는 작업에 앞서 서양과 서양인을 어떻게 범주화할 것인가에 관해 먼저 논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을 남긴 서양인들은 직업과 계층의 차이가 있으며 성별에 따라 관심 사항이 달랐다. 또한 국적(國籍) 역시 이들의 ‘조선상’을 형성하는 데 중 요한 요소였다. 그 밖에도 체류 기간의 차이, 기독교인 여부, 일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입장 차이 등이 여행기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조선에 관한 다양한 인상을 몇 가지 유형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동양과 조선에 대하여 자신들의 ‘선진적인’ 물질문명과 대조되는 이미지를 투영하였다는 점이다.

서양인들의 기행문은 당연히 유럽 중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동양 혹은 조선은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이라는 문화적 담론,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종학적 담론 등이 ‘과학’으로 포장되어 사실인 것처럼 주장되었다.455)이지은, 『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 책 세상, 2006, 162쪽. 즉, 오리엔트는 서양이 자신의 힘과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456)사이드는 “오리엔탈이란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이미지(images of the others)’이며 동양은 유럽(곧 서양)이 스스로를 동양과 대조가 되는 이미지, 관념, 성격,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에드워드 사이드, 앞의 책, 13쪽). 선진적이라는 이미지는 주로 남성으로, 후진적·야만적이라는 이미지는 주로 여성에 대비되었다. 또한 양자 사이에는 젊은 이미지와 낡고 오래된 이미지가 중첩되었다. 예를 들면 19세기 영국은 인도와 같은 자국의 식민지에 관리를 파견할 때 55세를 정년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식민지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늙고 쇠약한 서양인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강력함과 유약함의 조합이 오리엔탈리즘의 고유한 입장이었다. 이를 통해 동양은 더욱 동양적으로, 서양은 더욱 서양적으로 구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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