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1 서양과의 문화접변과 양풍의 수용
  • 01. 낯섬과 거부: 1653년 하멜표착과 1543년 철포전래의 경우
주강현

서세동점하던 15∼16세기 이후, 서양은 동아시아 역시 눈길에서 빼놓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고, 조선 해변에도 빈번히 출몰하던 ‘이양선’의 빈도수가 높아져간다. 선조 15년 마리이(馬里伊)가 제주도에 표착한 일이 있는데, 곧 중국으로 송치된다. 임진왜란 와중인 선조 27년에는 야소교(耶蘇敎)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왜에 종군하여 1년여 남해안 웅천왜성에 들린 적이 있다. 그의 방문은 천주교 신자로서 임진왜란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였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였으나, 기독교의 일본 전래라는 결과물로 그가 조선을 방문한 것이었으니 대항해시대의 파장이 조선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측면으로 이해된다.1) 주강현,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웅진, 2005.

인조 6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일행 3인이 표착하였으니, 훗날 조선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살던 박연(朴燕)이라는 사람이다. 그로부터 25년 뒤, 같은 네덜란드인 하멜(Hamel)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한다.

1653년(효종 3) 정월 10일(음력 12월 12일) 밤 네덜란드를 출발하였던 스페 르웨르(Sperwer)호가 바타비아(batavia)를 거쳐 대만에 이르러 잠시 머물고, 7월 30일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에 밀려 8월 15일 켈파트(Quelpaert), 즉 제주도에서 파선의 비운을 당하여 64명 중에서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제주도 해안으로 표류한다. 노련한 항해사는 고도를 관측한 결과 이 섬이 조선에 딸린 제주도임을 알고 있었다.2) 그의 표착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았으니, 중문·모슬포·강정·가파도 등 제설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이익태의 『知瀛錄』에 「西洋漂流人記」(1696)를 통하여 차귀진의 ‘大也水’ 지역으로 좁혀졌으며, 단 대야수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당시 서세동점의 방향은 두 가닥이었다. 하나는 북으로 육로를 통한 동침, 하나는 남으로 해로를 통하여 동침하는 경로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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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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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자크 기병대를 앞세워 우랄산맥을 넘어 광활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저 멀리 하바로프스키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러시아의 동침은 바로 전자에 속한다. 반면에 대항해를 거쳐서 대서양의 반대편 태평양을 겨냥한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등의 동진은 후자에 속한다. 네덜란드는 1602년(선조 35)에는 동인도회사를 창립하고, 얼마 아니하여 자바섬의 바타비아를 취하여 근거지를 마련한 다음 중국·일본과 교류를 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멜 일행이 표착한 것이다. 하멜을 처음 만난 조선인은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제주 해변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이를 부르며 손짓을 하였더니 그는 무섭게 도망쳤다.”고 표류기에 썼다. 서양 사람을 보고 무조건 도망쳤음은 조선 사람의 눈에 서양인 출현이 ‘낯섬’ 그 자체였음을 말해준다. 우리의 선조들은 ‘낯섬’으로 그네들을 마중하였다.

문화사적으로 ‘낯섬’이란 무엇인가. 낯섬은 1단계에서 무엇보다 무서움, 두려움을 주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기대감, 경외감, 혹은 1단계에서 받은 것보다 더 심한 공포감을 준다. 낯섬이 반가움, 기다림 등으로 승화되어 상호간의 대등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였지만, 우리는 그저 일방적인 출현에 놀라고 겁을 먹은 격이 되었다. ‘낯선 사람’들인 하멜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그네들은 해남, 정읍,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입성하였다. 입국한 외국인을 다시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조선의 법속이 아니니, 여생을 이 땅에서 마치도록 결심할 것이며, 그러면 모든 필수품을 급여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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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전라병영성
강진 전라병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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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구경꾼의 대상이 되었다. “구경꾼이 많아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헤치고 가기에 곤란하였고, 또 그들의 호기심이 어찌 굉장하였든지 우리는 집에서도 한가롭게 있을 수도 없었다.” 하멜 일행이 호기심을 끌었음은 그만큼 조선 백성의 서양인 접촉이 거의 전무하였다는 증거이다.

하멜 일행의 표류사건에서 우리는 무슨 반성을 해야 할까. 30여 명이 넘는 대부대의 하멜 일행을 13년간이나 데리고 있었으나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순진무구한 조선정부였다. 반면, 하멜 일행은 용케 조선을 탈출하여 배로 일본으로 탈주하며, 끝내 고향 땅 네덜란드 로 귀환하여 기록을 남긴다. 그가 일본으로 탈주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멜이 돌아오고 난 다음에 한국에 잔류하고 있던 사람들도 일본의 중개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로써 한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는 끝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의 귀환사건은 한국과의 교역욕구를 가일층 증대시켰다. 네덜란드인들은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한국과 직거래를 희망하였다. 아예 1669년에는 ‘코레아’라는 이름을 지닌 상선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일을 그르칠 수가 없었다.

당시에 동인도회사는 중국과의 무역을 마카오를 점령한 포르투갈 때문에 제지당하고 있어 일본을 통하여 교역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그네들은 가급적 조선과도 직거래를 터서 조선은 물론이고 대중국 교두보를 설정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중간 이득을 챙기고 있었던 대마도가 방해에 나선다. 사실 히라도에 적을 둔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무기, 향로, 기타 각종 사치품 등을 팔아 일본에서 금과 은을 유출해 가려 하였지만 무역량과 품목에서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었기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동시에 중국 무역도 남부에 내려오던 중국 상인과의 비정규적인 접촉에 그치는 정도였다. 따라서 마카오를 기지에 두고 중국 대륙무역을 독점한 포르투갈을 억제하려는 네덜란드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그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칫 손에 든 고기(일본)마저 놓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분석은 한국과의 교섭을 더 이상 진전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동인도회사가 일본과의 무역에서 이처럼 큰 영리를 취하고 있는 상태에서, 현상 유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구 태여 일본인의 비위를 건드리는 사태를 초래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 의심 많은 나라는 조선과 수교함으로써 우리가 일본에 누를 끼치리라 단정해 버릴 터이니 오로지 불신과 배타심을 조장하는 결과만 낳으리라 우려됩니다.3) 1669년 10월 5일, 동인도회사, 나가사키에서 바타비아로 발송.

하멜이 조선에 표착한 1653년보다도 훨씬 빠른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도착하며, 1549년에는 야소 교회에서 파견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ar)가 가고시마[鹿兒島]에 발을 딛는다. 이후 100여 년간 무역과 가톨릭 포교가 이루어지며, 17세기 중엽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 의하여 기독교인 탄압이 이루어지는 쇄국정책이 이루어진다. 포교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만 일본 거류가 허용되어, 네덜란드인을 통한 새로운 서양정보를 취하려는 이들이 모여들어 난학(蘭學)을 꽃피운다. 하멜이 일본에 거류하는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의 동인도회사 상관(商館)을 만나 귀국할 수 있었음은 이와 같은 동아시아 사정을 설명해준다. 우리는 적어도 하멜을 통하여 서세동점의 변화를 재빨리 읽었어야 옳았다. 일본이 이미 많은 양의 서양정보를 직수입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시절에 우리의 서양지식 축적은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일본이 1686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개화문명을 부르짖었음은 비단 외국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학’과 같이 장기간에 축적된 서양문명의 이해에서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멜 일행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대신에 이와 대조적으로 하멜이 표류한 1653보다 꼭 110년 전인 1543년 8월 25일 일본 규슈의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의 철포(鐵砲) 전래는 극도로 비견되는 사건이다. 괴선박이 바람에 떠밀려오듯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에서도 한참 떨어진 다네가시마의 카도쿠라곶[門倉串]으로 다가왔다.4) 平山武章, 『鐵砲傳來考-付 慈遠寺の榮光と終焉』, 和田書店:鹿兒島縣 西之表市, 1982. 도주 앞에 불려온 이들의 손에는 이상한 물건 이 하나 있었다. 배가 도착하였을 때부터 매우 궁금하였던 물건이었다.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배에 올라 이런 저런 서양 물품들을 구경하고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면서 호기심을 표하였다. 긴 쇠막대기를 보고 ‘무슨 물건이냐고’ 묻자마자 남만국(南蠻國) 사내는 물건을 곧추 세웠다. 호기심 많은 도주는 가신들을 데리고 이 이상한 물건을 실험해 보고 싶어 하였다. 표적이 세워졌다. 말뚝 위에 조개를 올려놓고 남만인은 막대기에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넣어 방아쇠를 당겼다. 조개는 산산조각이 났다. ‘꽝’소리가 나면서 도주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도주는 비싼 값을 치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엔(1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총 1정을 사들였으며, 남만인은 답례로 1정을 더 주었다. 도주는 즉시 명을 내린다. 즉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하였고, 그들의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총이 완성된다. 이때 샘플이 되었던 2정의 총은 섬에서 가보처럼 전승되다가 메이지유신 직후의 세이난[西南]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일본총 1호’가 동시에 탄생한다. 이제 ‘사무라이 1번지’인 가고시마 일대에서 칼 문화에 총 문화가 덧붙여졌으니 무기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처음 시작된 서양총이 일본에 퍼지면서 곧바로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힘의 근거가 되어 한반도를 겨누었다. 임진왜란에서 왜의 조총 때문에 조선군이 엄청 고생하였음은 역사가 말해 준다. 바다를 통한 문명교섭을 천혜의 기회로 받아들이며 단 2정의 총에서 수십만 정의 총으로 전환시킨 일본 중세의 힘이었다.

남만은 두말할 것 없이 당시에 아시아쪽으로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인이었다. 남만인들이 카도쿠라곶에 당도한 1543년보다 33년 전인 1510년,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동방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1543년이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 표한 해이다. 1511년에는 말레이시아 반도 남단의 요충지 말라카해협, 그리고 1517년이면 이미 중국 남부의 마카오까지 진출하였다. 고아와 말래카해협을 점령함으로써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한 포르투갈은 이내 중국 남부를 오가면서 아시아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오키나와를 수차례 탐사했으니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쪽에 출현하는 것은 사실 시간 문제였던 셈이다. 표류로 인하여 조금 일찍 당도하긴 하였지만 남만인의 일본 출현은 요동치던 세계사 흐름이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철포가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1543년에서 불과 6년 뒤인 1549년,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중국인 아왕(阿王)의 정크선(소형 범선)을 타고 다른 섬을 일체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당시의 사츠마[薩摩], 즉 다네가시마 북쪽인 가고시마 해안으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비에르의 일본 상륙은 일본에서 천주교 포교가 시작된 첫 사례이다. 1550년에는 포르투갈 배가 히라도[平戶]에 처음으로 입항하고, 1553년에는 가고시마 출신의 유학생 베르나르도가 일본인 최초로 스페인 리스본에 도착한다. 철포 전래는 서양인의 아시아 접촉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절묘한 시점이었다. 하멜 표류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대항해시대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이상의 하멜 표류와 철포 전래 사건을 대비하여 볼 때, 조선이 낯섬과 거부로 일관하였음은 서양을 받아들이는 기본 자세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일본은 다네가시마의 철포 수용이나 나가사키 데지마의 동인도회사 상관에서처럼 일정한 바늘구멍을 열어 두었음이 확인된다. 서양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거주하던 당대 아시아 최고의 국제전문가로 아시아의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고 있는 프로이스 신부는 그의 『일본사』에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다소 과장이 섞인 점도 인정되나 표 류민을 받아들이던 조선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만일 일본으로부터 오던 우리 포르투갈의 범선이나 그 밖의 배가 바람이나 조류로 인해 항로를 잘못 잡아 항로에서 상당히 벗어나 조선의 항구에 도착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들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고 다수의 무장 함선을 출동시켜 어떤 이유나 변명도 인정하지 않고 그 항구나 지역으로부터 이들 침입자를 완전히 내쫓았던 것이다.5) Luis Frois, Historia de Japam, 1549∼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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