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1 서양과의 문화접변과 양풍의 수용
  • 02. 양풍수용의 주체적 경로: 서학과 서교 논쟁
주강현

우리에게도 주체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하멜 일행은 어쩌다 표착한 뱃사람에 불과하다. 우리는 중국을 통하여 서구문화와 간접 접촉을 시작하였다. 하멜의 표착보다도 50여 년이나 빠른 시기인 1601년에 이미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22∼1610)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며, 속속 새로운 서구문물이 중국으로 들어온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구라파는 다른 말로 대서국이라 한다. 이마두(마테오 리치)라는 사람이 있어서 항해 8년 만에 8만리의 바람과 파도를 넘어 동월[廣東]에 거주한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이 있다.

마테오 리치는 선교사이면서 실로 박학한 과학자로서 중국 고전을 깊이 연구하여 포교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광계, 이지조 등을 서학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공동 작업으로 서양 천주교와 과학에 관한 한역서를 다수 간행하였다. 매년 북경을 왕래한 조선 사신들이 그 한역 서양서를 조선에 들여왔다. 그가 뿌린 씨앗은 속속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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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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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연경사로 북경에 들어간 정두원은 산동반도 등주에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유능한 통역사인 로드리게스를 만나 조선국 왕에게 선물로 귀중한 서양 문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본에서 33년이나 거주하고 있던 이 유능한 포르투갈인은 서양 화포, 화약, 천리경 같은 서양 문물을 포함하여, 『이마두천문서(利瑪竇天文書)』·『천리경설(千里鏡說)』·『만국전도(萬國全圖)』 등 천문·지리·병기를 이해하는데, 실로 중요한 저서를 정두원에게 주었다.

동시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는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이다. 인조의 맏아들로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그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교우 관계를 맺고 서교와 서학 수용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인다.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의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는 라틴어 번역문을 싣고 있는 바, 다음과 같은 소현세자의 편지가 실려 있다.6) 강재언, 『서양과 조선-그 이문화 격투의 역사』, 학고재, 1998, p.61.

어제 귀하로부터 받은 천주상·천구의·천문서 및 기타 양학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으로 흔쾌하기 짝이 없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고국에 돌아가면 궁정에서 사용할 뿐 아니라 이것들을 출판하여 식자들에게 보급할 계획입니다. 멀지 않아 사막의 나라도 학문의 전당으로 변하는 은총을 입어 우리 국민은 구인(歐人)의 과학에 힘입을 것이라고 모두 감사할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천주상은 되돌려 보냈지만, 예수회 선교사는 함께 귀국하고 싶어 하였다. 서교는 받아들이기 곤란하지만, 선교사는 ‘서학을 지닌 자’로 용인하려 하였던 것이다. 서학과 서교는 사실 하나의 고리를 이루는 것이었으나 소현세자의 시대에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볼 만한 시대정신은 아직 형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서학에 대한 진취적인 태도는 믿을 만한 것이었다. 종래 미지의 학문이던 서양과학을 전수받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학을 전수해 줄 수 있는 인물을 데리고 귀국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소현세자는 1645년 1월에 귀국하여 2개월 후에 의심스런 죽음을 맞는다. 소현세자는 단순 볼모가 아니었다. 포로의 존재가 아니라 외교기관이요 무역기관인 심관(瀋官)의 장으로서 판서 이하 200여 명의 관원을 거느리고 청과 본국의 중간에서 중요한 조정 역할을 하였다. 세자는 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고,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직접 영리를 도모하였으며, 이 일은 주로 세자빈 강빈(姜嬪)이 맡았다. 청으로서도 친청적인 세자가 국왕을 대리하여 모든 일을 처리해 줄 것을 바라게 되었고, 반면 병고에 시달리던 인조는 언제 청으로부터 퇴위를 강요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세자는 본국의 부질없는 반청 태도의 분쟁으로 시달리는 동안 조선 조정의 비현실적인 명분론이 국익에 무익할 뿐더러 무모한 일임을 확신하게 되어, 인조나 신하들과는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조는 세자를 죽였으며, 아내 강빈은 물론이고 어린 아들 형제들까지도 독살하였다.7) 김용덕, 『신요 한국사』, 을유문화사, 1984, p.243.

중국 땅을 통해서 서양을 바라보려는 조선인의 다양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한흥일이 청국에서 채용한 시헌력의 정확함에 감탄하여 북경에서 입수한 「개계도(改界圖)」와 「칠정력비례(七政曆比例)」를 조정에 올린 역법 개정이 뒤따랐다. 그는 청나라 볼모인 봉림대군의 귀국 길에 수행한 재상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학 수용의 자세는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지기 시작하였다. 성호의 문하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서학수용의 전통이 뒤늦게 마련되었다. 중국과 일본이 나름대로 왕성하게 서학을 수용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족히 1백여 년을 ‘까먹고’ 있었던 셈 이다.

근대의 발명품인 사진기를 하나의 예로 살펴보자.8) 최인진, 『한국사진사』(1631∼1945), 눈빛, 1999, pp.33∼51. 사진기의 전신(前身)이라 할수 있는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는 빛을 이용하여 자연현상을 실제로 그릴 수 있도록 발명된 기계이다. 아담 샬이 중국어로 쓴 『원경설』의 수용으로 옵스쿠라가 동양에 알려졌다. 정두원이 들여온 원경설이 바로 그 책이며, 소현세자도 이 책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다. 최한기는 『심기도설(心器圖說)』에서 렌즈가 물상을 맺는 원리, 태양계의 변화 등 광학과 천문학에 대해 매 장마다 도판을 삽입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차조작화(借照作畵)」라는 제목으로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찍이 성호 이익도 연경설을 통하여 어느 정도 옵스쿠라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옵스쿠라를 실제로 실험한 이는 이기양이었다. 그는 정약전의 집에 카메라 옵스쿠라를 설치하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훗날 정약용은 이기양의 묘지명에 쓰기를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 즉 칠실은 어두운 방이며, 파려는 오늘날의 유리나 렌즈를 뜻하는 것이니 어두운 방에서 렌즈로 보는 눈이라는 사진기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을 전개하였는데, 이 역시 옵스쿠라에 관한 글이었다. 정약용의 칠실관화설은 볼록렌즈에 비친 실외의 영상에 대한 설명에 이르면 그 표현의 정확함으로 카메라 원리에 대한 흥미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최한기는 아예 신기통(神氣通)을 소개하고 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영법변증설(影法辨證說)을 설명하고 있는 바, “그림자란 사물의 그늘이다. 공, 밝음의 반대이다. 물상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또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카메라 옵스쿠라의 사례를 통하여 중국을 통한 서양과학 기술의 주체적 수용 경로를 읽어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부단없이 서양과학을 수용하려고 한 실학자들의 태도를 말해 준다. 따라서 역사에서 ‘가정법’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허상일 수도 있으나 이들 실학파의 견해들이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또한 소현세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가 등극하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법을 안타깝게 제기해 보는 것이다. 친명(親明) 명분론이 아니라 친청(親淸) 실리론을 택하였으며, 실제로 서구의 과학문명을 몸소 체험한 소현세자의 죽음은 우리의 주체적 서양접촉이 와해된 하나의 구체적 사례가 아닐까 한다. 조선의 왕자로서 서학을 최초로 이해한 임금이 조선을 통치할 기회를 상실하였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스로 서구문명과 서서히 접하면서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 버리고, 그만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우리가 주체적으로 서학을 수용한다고 해서 제국의 탐욕스런 열망을 지닌 그네들의 침략을 전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서학 수용의 역사가 수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탄력성있게 이루어졌던들, 구한말에 그렇게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이래의 유연하지 못한 조선의 대응은 결국 19세기 말의 혼돈으로 이어져서 우리보다 앞서서 서학수용을 비주체적이나마 스스로 해낸 일제의 의한 식민화로 귀결되었으며, 그 결과는 20세기 전 기간을 걸쳐서 우리 문화를 규정지었다.

소현세자가 서학을 수용하였다고 해서 서교(西敎), 즉 천주교 문제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학이냐, 서교냐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 천주교가 전래한 사실은 동양과 서양의 정심 문화의 정수가 만나는 사상사의 일대 사건이요, 동시에 동양 사회가 근대를 열게 되는 역사적 중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9) 금장태, 『동서교섭과 근대한국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3, p.243. 따라서 서학과 서교의 수용과정 이해는 우리 문화의 근세사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조선시대 서학의 능동적 수용이라는 하나의 화두 안에서 서학과 서교의 관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학의 조선전래 과정에서의 특징은 우선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고 천주교 신앙의 직접적 전파라는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천주교 신부들이 직접 들어오지 않는 대신에 신문화의 수용이라는 조선 사회의 내적 성숙에 의해 도입되었고 여기에서 그에 대한 초기 이해 과정도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미 허균이나 유몽인, 이수광이 관련되고, 안정복의 시대에 이르면 웬만한 지식인들은 서학관계 서적을 접촉할 수 있었다. 안정복이 『천학고(天學考)』에서 “서양 서적은 선조 말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고관이나 학자들 중에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는 표현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10) 최석우, 「조선 후기의 서학사상」, 국사편찬위원회 제16회 한국사학술회의, 1988, p.44.

보유역불론(補儒易佛論) 입장에서 천주교를 설명하는 한역 서학서의 본격적인 수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역 서학서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이상으로, 바로 ‘중국식’이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신뢰감을 주었다. 즉, 중국옷의 윤색을 입힌 것은 천주교였다. 천주교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었던 지점에는 당시에 뿌리박힌 중화주의의 여독도 작용하였다.11) 이기섭, 「19세기 조선천주교와 재래 종교의 조화」,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pp.12∼13. 정통주의적 입장에 서있던 도학파(道學派)와 달리 유교적 전통체제를 개혁하려는 실학파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던 탓이다.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가지 영역이 서학으로 묶여져 비쳐졌을 때, 유교 지식인의 서학에 대한 접근의 길도 그만큼 넓었던 것이다. 공, 천주교 교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인물들도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이루어질 때에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관대하거나 적대적 거부태도가 상당히 완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학파의 서학수용은 이를 경계하고 하는 공서파(功西派)와 서학을 수용하고자 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분열되었다. 권철신의 신서파도 둘로 갈라서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서학만 수용하자는 파와 서교까지 수용하자는 파가 그것이다. 신서파가 유교 이념 기반 위에서 일단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자 자생적인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마침내 과학지식을 거의 외면한 채 신앙적 정열에 몰입하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성호 이익 문하에서 발생한 신서파의 천주교 신앙운동이 확장되어 나갈 때 가장 먼저 저항한 세력은 같은 성호 문하의 반서파인 안정복이었고, 뒤따라 남인파인 홍낙안·이기경 등의 공서파, 그리고 정부의 공식적인 금령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천주교 신앙집단이 북경교회의 지시에 따라 사회적 금압과 희생 속에서도 유교체제의 기존질서와 의례에 대항하는 신앙의식을 강화하고, 서민대중과 부녀자들 속으로 확산되어 통치권 바깥의 지하세력을 구축하면서 서양의 침략적 정체세력과 유대를 깊이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회에 비친 천주교 신앙집단은 국내적으로 사학(邪學)집단이면서 국외적으로 양적(洋賊)의 앞잡이라는 이중적 위협요소로 인식되었다.12) 금장태, 앞의 책, pp.212∼213.

1742년 로마 교황청의 훈령으로 사태는 급변한다. 중국에서 예수회의 영합주의적 전교가 금지되었고, 1744년에는 예수회 본부가 해산 당한다. 조선에서도 조상제사 금지를 계기로 천주교와 유교는 다르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더욱이 천주교는 그 보편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국가·민족의 현실을 등한시하였으니, 서양인 선교사의 직접 영입이나 양선청래(洋船請來)와 같은 주장이 사태를 악화시킨다. 홍낙안(洪樂安)이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낸다.

옛날에는 깨알 같은 잔글씨로 베껴서 10겹이나 싸가지고 행장 속에 간수하던 것을 지금은 책으로 간행하여 서울과 시골에 반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천하고 무식한 자와 쉽게 유혹되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한 번 이 말을 듣기만 하면, 목숨을 바쳐 뛰어 들어가 이 세상의 죽음과 삶을 버리고 만겁의 천당과 지옥을 마음에 새기며 한번 들어간 뒤로는 미혹됨을 풀 길이 없다고 합니다(이기경, 『벽위편(闢衛編)』, 「홍주서상채좌상서(洪注書上蔡左相書)」).

천주교는 상류에서 중류로, 다시 하류층으로 신앙의 사회계층적 이동이 이루어지고, 격정적이고 종말론적 위기 신앙화하여 신비주의적 달관과 둔세적 신앙으로 나가면서 상당한 기간 몰민족적인 신앙형태를 간직하게 되었다.13) 김조년, 「인간해방의 주체적 실현과 예속의 변증법」, 『서양인의 한국문화 이해와 그 영향』, 한남대학교 출판부, p.156.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은 제국주의적 속성을 잘 드러내준다. 백서의 내용은 청의 황제가 직접 조선 왕에게 서양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방법, 청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평양과 안주 사이에 무안사를 두고 조선의 정치를 감호케 하고, 또한 청의 공주를 조선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방법 등이다. 문제는 마지막 내용인데, 서양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강제적으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수백 척의 함대와 강한 군인 5~6만, 대포, 기타 필요한 무기를 많이 싣고 중국인 안내자를 태워가지고 조선의 해안으로 바로 와서 왕에게 협박을 가하라는 청원이었다. 백서는 천주교를 대역부도하고 반국가적인 단체로 몰아넣을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1791년 가을에 호남 진산군의 윤지충이 모친상에 상장의 예를 쓰지 아니하고 신주를 불태운 채 제사를 폐한 사건, 곧 신해 진산지변(辛亥珍山之變)으로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는 밖으로부터의 박해와 안에서의 배교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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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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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를 쓴 배론성지의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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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아울러 1866년 8월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입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천주교도들의 처단을 문제 삼아 직접적 무력 침공을 감행한 것이다. 종교와 장사 속을 매개로 한 이와 같은 침략행위는 기본적으로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의 대외정책의 일환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도발행위는 이후 제주도에서 빚어졌던 1901년 제주민란에서 가장 극적으로 상징화된다.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천주교 전래가 지녔던 역사적 의미를 감안하더라도 양대인(洋大人)으로 상징되는 백인우월주의는 문화제국주의의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천주교가 공권력을 무시한 독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 선교사라는 힘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것을 흔히 양대인 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 교인들 가운데는 이와 같은 양대인 의식에 사로잡혀 치외법권적인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여 일반 양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사건들로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비단 천주교에서만 아니라 개신교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1901년의 충남 지방 정길당 사건이 보여주듯 각종 교폐(敎弊) 문제는 그 밑바탕에 양대인 의식이 깔려있는 외세의존적인 종교심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천주교회는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소외되었던 민중계층을 기반으로 한 종교로 정착되어 갔다. 이는 물론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삶과 결합하는 데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서구문명 접촉에서 서학과 서교라는 과제는 이처럼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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