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1 서양과의 문화접변과 양풍의 수용
  • 04.문명개화와 사회진화론: 문명과 야만
주강현

‘문명개화’라는 말은 중국에서 처음 쓴 말로써 일본도 일찍이 이 말을 중국에서 도입하여 써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본격적인 문명개화를 시작하였으니, 문명개화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이른바 마법의 주문이었다. 메이지시대의 사람들에게 문명개화는 서양의 방법이나 풍습 그 자체였다. 서양문명의 섭취, ‘문명개화’는 유행어가 되고 민중의 풍속에도 미쳐, ‘잔기리 머리(상투를 틀지 않고 가지런히 잘라서 뒤로 드리운 머리 모양으로 메이지 초년에 문명개화의 상징이 된 남자 머리)를 두드려보면 문명개화의 소리가 난다.’는 등의 유행어가 떠돌았다. 풍속의 변화는 행정 경찰이 동원된 국가권력의 강제로 집행되었으니,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아래로부터의 근대화를 압도하였다.21) 井上 淸, 서동만 역, 『일본의 역사』, 이론과 실천사, 1989.

문명개화를 새롭게 부각시킨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이었다.22) E. Seidensticker, Low City, High City : 허호 역, 『도쿄이야기』, 이산, 1997, p.50. 그는 ‘서양의 문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제하여,

지금 세계 문명을 논하면, 유럽 제국 및 미국은 최상의 문명국이라 한다. 터키·중국·일본 등 아시아 제국들은 반개(半開) 나라라고 하고 아프리카 및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야만국이라 한다. … 그렇다면 세계 속의 제국에 있어서 비록 그 상태가 야만인 것도 혹은 반개인 것도 적어도 한 나라의 문명의 진보를 가늠할 때, 유럽 문명을 목적으로 하여 의논의 본위로 정하고 ….23) 福澤諭吉, 『文明論之槪說』.

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독립신문』도 ‘인종과 나라의 분별’이라는 논설에서 세계의 인종과 나라를 야만국, 미개화국, 반개화국, 참개화국으로 구분하면서 우리나라를 반개화국에 넣고 있다는 점이다.24) 『독립신문』 1899년 9월 11일자. 이와 같은 논법은 사실상 문화사적으로 볼 때, 지극히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문명개화의 진화론적 측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한 생존경쟁, 우승열패, 적자생존 등 약육강식의 논리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수렴되었고, 제국주의의 식민지쟁탈전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하였다. 19세기의 사회진화론은 사회의 현상유지와 제국주의와 자유방임적 경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진화론의 자연도태라는 개념이 인간행동에 적용되었을 경우, 공격성은 선천적이며 또한 당연한 것이고, 인류로 하여금 누가 더 강하고 생존에 적합한 인종, 혹은 사회인가를 결정하는 투쟁에 몰두하게 하였으며, 그 덕분에 문명은 더욱더 진보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심어 주었다.25) M. S. Gabarino, Sociocultural Theory in Anthropology : 한경구·임봉길 역, 『문화인류학의 역사』, 일조각, 1994, p.60.

서양인들의 조선에 관한 생각인 착한 야만인(온순한 성격, 북쪽의 강한 사람들, 오랜 순수성,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젊은이들, 방탕한 여자들)과 동양의 현자(학문에 대한 관심, 다른 나라에 대한 모범)의 긍정적인 측면들이 그것이다. ‘미개인’의 이미지는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발견된 아메리카나 태평양 지역의 원주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야생성에 대한 1차적 이미지는 중세부터 아시아 극동지역의 변두리에서 형성된 것이다.26) 프레데릭 블레스텍스,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청년사, 2001, pp.60∼61.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이 일본 체류시 사회진화론의 열렬한 지도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개로 일본에 진화론을 소개하였던 진화론자 모스(Morse) 교수를 소개받았고, 미국 체류 중에 그의 집에 체류하였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유길준의 주체적인 보수·점진주의적 개혁사상은 크게 보아 중국의 양무 사상가들이 내걸었던 중체서용론이나 동도서기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세례를 단단히 받은 그는 일본인 스승 유키치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과도 달랐으니, ‘우매’한 민중들의 ‘소란’과 ‘폭거’를 경계하고 이들을 계도하려고 노력한 점에서 민중적 민주주의자가 아닌 선민주의자이기도 하였다.27) 유영익, 「서유견문록」, 『한국사시민강좌』 7, 일조각, p.156.

당대 일본에 하목석택(夏目漱石)처럼, 최첨단을 걷던 영국 유학생 출신으로서 서구문명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난 인물도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20세기의 서구문명을 부정하고, 동양문화에의 회귀를 주장한다. 인류가 문명을 애호하는 나머지 도가 지나치면 문명에 중독이 되고 말아, 문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해도 그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하면서, 20세기 미래문명에 대한 매우 신랄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문명은 인류에게 안락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가져다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도리어 문명에 의해 인류는 철저하게 인간성을 상실당하고 유린되어 파멸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기차처럼 20세기의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다. 몇 백 명이라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는 붕하고 떠난다. 정과 용서라고는 없다. 밀어 넣어진 인간은 전부 같은 정도의 속력으로, 동일한 정류장에서 서고, 그렇게 해서 똑같은 중기의 혜택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기차에 탄다고 한다. 나는 실려진다고 한다. 사람은 기차로 간다고 한 다. 나는 운반되어진다고 한다. 이처럼 개성을 경멸하는 것도 없다. 문명은 모든 가능한의 수단을 동원해서 개성을 발휘하게끔 한 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이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28) 『夏目潄石全集』 권4.

그의 ‘저항’은 소극적인 것이었고, 오로지 동양으로 회귀하는 식의 수동적 입장에 그친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화로만 나아갔다. 『독립신문』에서 개화당을 풍자하면서 사리 도모에 급급한 자들은 완고당의 협잡꾼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풍자한 대목을 살펴보자.

머리를 깎으며 양복을 입고 불란서 모자에 미국합중국 신을 신고 차마표 시계에 지궐련 담배를 먹으며 짧은 지팽이에 살짝이 양경(洋鏡)을 쓰고 때없이 자유의 권리를 말하며, 언필칭 독립국이라 하되 실질상 공부가 없으면 이것은 겉껍질 개화라.29) 『독립신문』 1899년 9월 5일자.

‘겉껍질 개화’가 당대를 점령하였다. 개화는 유행병이 되었고, 잘못된 개화가 득세하였다. 서학이냐 서교냐 하는 논쟁은 기독교의 전면 포교와 더불어 무의미한 논쟁이 되었으며, 동도서기론도 실질적 역할을 상실하였다. 동도서기는 오로지 관념적인 상태에서 ‘혼은 조선 것이요, 과학기술은 서양 것’이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잔류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저 조선혼이 중요하다’는 수준으로 지극히 퇴영적으로 잔류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조선 민족의 혼 조차도 개조해야 한다는 식의 민족개조론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야만의 나라’를 문명개화시키는 과제가 바로 조선에 부여된다. 19세기 말 식민지화 목표는 경제적 착취, 수탈정책과 원주민의 주체성을 없애버리는 문화의 백인화였다. 이 점은 파농의 ‘검은 얼굴에 흰 마음’이란 표현에서 잘 압축된다. 우리의 경우에도, “식민화는 식민지 백성을 창조해 내고, 식민지 민중들은 종속과 퇴화라는 쇠사슬에 묶임을 강요당한다.”는30) M. 카노이, Education As Cultural Imperialism : 김쾌상 역, 『교육과 문화적 식민주의』, 한길사, 1980, p.80. 일반적 법칙을 경험하면서 자주적인 우리 문화를 잃어갔던 것이다.

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원론적 입장으로 돌아와 본다. 과연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을 거쳐서 일제식민지에 이르는 시기 동안 한국에 들어온 제국주의 세력의 정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일정한 차별성이 각 시기별로 필요함이 강조되고 있다. 요컨대 개항기 조선에 적용되어야 할 제국주의 개념 구성에는 침략국의 산업자본주의 확립, 각종 경제침탈(불평등조약 체제, 무역침탈, 밀무역침탈, 이권침탈 등), 식민화 등 이들 3자가 동시에 혼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즉, 조선은 1882년부터 1894년까지는 침략의 선두그룹인 청·일본·러시아의 자본주의 형성기 침략과 후열그룹인 미국·영국·독일 등의 제국주의라는 이중의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체로 1895년부터는 전일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시야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31) 김정기, 「자본주의 열강의 이권침탈연구」, 『역사비평』1990년 겨울호, pp.72∼80.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바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들어와서 자국의 경제 이익을 확보하고, 이후의 사회정치적 변동을 추구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로서 ‘기독교의 세계 전교(傳敎)’라는 전가의 ‘낡은 보도(寶刀)’를 다시금 한국에 들이 밀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 문명을 통한 문명개화의 원칙에서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첫째, 세계관의 문제다. ‘문명’과 ‘야만’을 상치시켜 놓고, 기독교문명국과 야만국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명국이 되려면 ‘어떠한 모범을 따라서 나아가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 모범은 ‘문명국’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른바 개화를 지향하였던 많은 세력들이 ‘문명종교’를 받아들였음도 자명한 이치였다. 그리고 훗날 이들 개화파들의 거개가 친일행각에 나섰던 것도 필연 적인 귀결이었다. 그들이 받아들인 세계관은 ‘문명’에 의해 끊임없이 자국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서 결국 민족주체성을 상실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서양 각국은 문명부강하였으며 그 원인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하나님의 공경과 사랑으로 일심협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교를 믿어 개화부국을 이루고자 하였고, 그 예증으로 서양국가들을 들었다. 개신교 전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교회흥망과 국가의 개화부국, 하나님의 나라와 국가권력의 상대화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천당골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잘 압축해 주고 있다.32) 성백결, 「한국 초기개신교인들의 교회와 국가이해(1884∼1910)」, 감리교신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그들은 서양국가의 융성을 제국주의적 침략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만 찾으며 서구의 국가들을 이해하다 보니 기독교와 서양문화, 더 정확히는 진리인 그리스도와 종교체계로서의 기독교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하였다. 열강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모국이 벌이고 있던 침략전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聖戰)이라고 선전하고 도와주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기독교적 서양문화, 기독교와 서양국가를 분별하며 제국주의적 실상을 파악해야 하였다.

둘째, 문명과 야만의 문제이다. 문명의 모범은 대략 의료와 교육으로 상징화되었다. 선교사 활동의 제1로 교육을 꼽고, 제2는 의술을 꼽았다. “서당까지 희소한 처에 서양식의 교수법으로써 육영의 임에 당하였는 고로 현금 사회에 활약하는 인물로 미숀스쿨에서 학(學)한 자가 다수함은 자연의 세로다.”고 함으로써33) 『朝鮮諸宗敎』, 1922, pp.250∼251. 식민지하 선교의 교육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의료기관을 세워 ‘선진의학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선교정책으로 삼았다. 비교적 탈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이는 의료를 매개로 어쩌면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얻어 내고, 후에는 미국 의료체계에 의존하게 하는 ‘의료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하였다. 알렌(Allen)이 갑신정변 때 민비의 조카를 치료해 주고 이권을 얻 듯이 민중과 유리된 채 몰락해 가는 ‘마지막 왕조의 귀족층’들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환심을 얻어 두 가지 전리품을 얻어냈다. 그 하나는 ‘우호와 친선, 사랑과 복음의 사도’라는 대가와 ‘조선에 어떠한 욕심’도 없는 ‘사심없는 문명국’이라는 견해를 끌어냈다. 이 점을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이렇게 말하였다.

의약은 ‘그대 가서 병든 자를 고쳐라.’고 한 복음의 명령을 실천하고자 할 때 전도자의 충실한 시녀 역할을 하였다. 다른 방법으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의사와 간호원의 성실하면서도 적절한 치료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경우가 많았다.34) G. Uderwood, The Call of Korea : 이광린 역, 『한국개신교수용사』, 일조각, 1989, p.89 재인용.

21세기의 문턱에서 지나간 역사를 생각해보면서 동도서기의 의미를 재평가해 본다. 소설가 황석영은 이문재 시인과의 문학 대담에서 서도동기(西道東器)를 주창한 바 있다. 동도동기를 뒤집은 말인데 이는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의미뿐만 아니라 동기(東器)를 강조하자는 이야기다.35) 『문학동네』 18호, 1999. 동양은 기가 아니라 오로지 도라도 인식하였던 한계론적 사고를 극복하는 움직임들인데, 이는 21세기의 문명적 대안에있어서 화두가 될 전망이다.

20세기를 상징하였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패러다임을 끝내고 새로운 문명으로 접어드는 와중에 문명적 선택의 패러다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100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한계를 절감한 동도서기론에서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이미 축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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