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1 서양과의 문화접변과 양풍의 수용
  • 05.양귀(洋鬼)와 양물(洋物): 우상과 기독교, 사진과 기차
주강현

손님이 왔다. 아주 낯선 손님이 왔다. 우리에게 손님은 마마별상굿의 마마신으로 표상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우두법이 실시되기 전에 한반도를 천연두가 휩쓸었다. 민중들은 그 천연두를 손님으로 불렀다. 어느 집에서나 손님은 참으로 어려운 법이라 예의를 갖추어 접대할 일이었다.

민중들은 손님이 양자강 남쪽에서 오는 호귀(胡鬼)가 가지고 와서 퍼뜨린 병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두창으로 불렀다. 그래서 두신(痘神)은 역신(疫神), 서신(西神), 여귀, 호귀별성, 호귀마마, 호구별상, 호구마마, 별상마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36) 이꽃메, 「한국의 우두법 도입과 실시에 관한 연구-1896년에서 1910년까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p.19. 병에 걸린 어린아이들은 앓는 동안은 신령들과 통하고, 천리안(千里眼)을 갖게 되고, 먼 곳에서 일어난 일도 벽을 통해서 본다고 믿었다.

손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잘 대접하도록 애쓰고, 엎드려 기도하고, 노래하고, 손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주 제물을 바치고, 손님 이름으로 모든 이웃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쌀 과자를 만드는데, 그 쌀이 이접 저집에서 구걸해 온 것이면, 그 일은 훨씬 갸륵하게 여겨진다.37) Dallet, 정기수 역, 『조선교회사 서론』, 탐구당, p.223.

손님이 휩쓸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구한말에 한국을 방문한 많은 외국인들은 비참한 글과 사진기록을 남겼다. 한성 성벽 밖의 거적으로 싼 시체더미 사진을 책에 싣고, “마마로 죽은 사람들은 버린 곳, 마마를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기 때문에 병에 걸려 죽은 자는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이렇게 아무렇게나 내다 버렸다.”는 해설을 덧붙였다.38) H. B. Herbert, The Passing of Korea : 신복룡 역, 『대한제국멸망사』, 평민사, 1984, p.247. 근대 보건의료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였지만 역불능이었다.39) 신동원, 『한국 근대 보건의료체제의 형성, 1876∼191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가정에서 두창환자가 발생하면 손님맞이로 정성을 다하는 정도였다.

머리에 빗질을 하고, 마당을 깨끗이 쓸며, 새로 산 물건들은 집에 들여오고, 장작을 패며, 못을 박고, 콩을 굽고, 막힌 하수도를 열어 마마귀신의 기분을 맞추어서 환자가 봉사가 디는 것을 우선 막는 한편, 병의 악화도 방지한다. … 귀신이 군소리 없이 물러가고 또 물러가는 도중에 귀신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귀신이 붙은 집의 지붕에 싸리나무로 만든 말을 세우고, 말등에 조그만 쌀자루 한 개와 동전을 조금 놓아 둔다.40) W. a. Grebst, 김상렬 역, 『코레아 코레아-이것이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다』, 미완, 1986, p.265.

손님을 달래서 보내는 호구별상굿은 무시무시한 굿판이었다. 작두에 올라선 무당은 서슬 퍼런 칼날을 치켜들고 호구별상에게 고하였다. 웬만한 굿판과는 격이 달랐다. 그렇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은 무수한 민중들이 천연두 마마신에게 죽임을 당하며 흘러갔다. 민중들은 강남 천자국에서 찾아들어온 신이라고 굳게 믿었다. 병자호란 뒤에 찾아들어온 신이라고 믿어서 ‘때놈’이라는 뜻을 지닌 ‘호구(胡口)’라고 이름을 붙였다. 청나라를 대하는 민중의 적개심이 무서운 호구신으로 둔갑하여 굿판에 불려나온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 새로운 호구신이 찾아들어왔다. 마마귀신이 서쪽에서 왔다면, 이번에 찾아들어온 새로운 호구신도 서쪽에서 찾아왔 다. 이른바 서양귀신, 서귀(西鬼)·양귀(洋鬼)라 부르는 신이었다. 양귀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귀는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는 우두법을 가져다 주었다. 민중들은 애초에는 우두법에 반신반의하다가 끝내 우두법의 예방효과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양귀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또는 기차와 기선, 병원과 학교, 교회 따위를 부지런히 가져왔고, 천연두 호구마마를 대신한 새로운 신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19∼20세기는 이렇듯 손님을 맞이하려고 분주한 나날을 보냈던 ‘손님의 시대’였다. 조선의 민중들이 양귀를 맞이하면서 심사가 복잡해진 동안 서구의 기독교는 물밀듯이 들어왔다. 어쩌면 ‘양귀’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전래 속에서 ‘우상’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구한말 사회에 풍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 양귀는 조선귀(朝鮮鬼)를 어떻게 보았을까. 선교사 게일(Gale)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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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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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 큰 길이나 샛길에서 마주치는 장승들의 드러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은 무의식 중에 이스라엘인들이 숭배하는 다곤(Dagon), 몰록(Molock), 그모스(Chemosh), 발(Baal)과 같은 신이나 우상들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상에 관해 들었고 박물관이나 성경책을 통해 그러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상을 실제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41) J. S. Gale, Korea sketch : 장문평 역, 『코리언 스케치』, 현암사, 1986, p.98.

내포만으로 기어들어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하였던 국제적인 해적 오페르트(E.Oppert)가 남긴 『조선기행문』(1880)에도 장승을 마주친 소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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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남연군묘
예산 남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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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가! 자세히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이었으며, 이것이 사원 혹은 기도소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보호할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행길 가 땅바닥에 그냥 박아 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 의식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가량 되는 통나무 토막에 한다고 하였다는 장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즉, 사람들이 그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 위쪽 끝에다가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새긴 나쁘게 찡그린 얼굴, 이곳이 곧 모든 장식인 것이다.

즉, 민간신앙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해 방식은 ‘우상숭배’로 일관하고 있었다. 경기도에서 매서인으로 활동하던 구연영(具然英)이 지방 관원과 다툰 사건은 민중들의 공동체신앙과 기독교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음력 정월이 되어 마을 우물에 공동제사를 지내는데 기독교인들이 추렴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교인들에게 우물 사용을 금지하는 등 박해가 일어났던 바, 구연영이 이에 항의하였고 서울에서 선교사들이 내려와 가세함으로써 이 사건은 교회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또한, 1894년 초,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기 위해 돈을 걷을 때, 의료선교사 홀의 집에 있던 신자 노병선이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주민들이 노병선을 잡아 가두었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

마을굿의 일환인 우물고사는 사실상 미신이라는 측면과는 전혀 무관하다. 우물물이 맑아야 동네가 건강하고 물이 잘 솟아야 공동으로 쓰기에 풍족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어느 마을에서나 여름 한철 장마철이나 겨울철에 우물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일정 기간 덮어두었다가 고사를 지내고는 공동으로 마을 제축을 벌이는 관습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물론 우물물에 용신이 깃들어 있어 도와준다는 소박한 믿음이 있기는 하나 전근대사회의 편적인 속신일 뿐이다. 동시에 건강·위생상의 문제에서 보더라도 유익한 일이었으나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풍습조차 우상숭배로 간주하였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비용을 추렴하는 행위는 오랜 세월 생활관습으로 귀착된 것이었으며, 관의 수탈로부터 민중들이 단결하여 살아나가는 생존방식이기도 하였으니, 이를 거부하는 일은 당연히 마을민에게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하였을 것이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 마을 공동체신앙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비판의식을 나타냈다. 구연영 사건이 보여주던 시기만 해도 선교사의 힘으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기독교세가 약하였던 시기인지라 마을민이 ‘박해’를 가하는 식으로 처리되었고, 이후의 과정은 전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공동체 문화를 압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선교사들의 한국 민간신앙 이해는 매우 유치한 수준의 것이었다. 무당굿을 굿의 전부로 간주하고 공동체굿의 존재는 각각 별도의 독립적인 파편으로만 이해하였다. 무당의 종류만하더라도 단순한 샤머니즘이 아니라 세습무와 강신무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 외에 복사(卜師)나 독경쟁이가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민간신앙은 낮은 생산력과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기 에 매우 낡은 세계관이 가져다준 제한성이 뚜렷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민중의 역동적 세계관이 흘러넘치는 저수지 역할을 담당하던 것이었다. 무당들은 모두 푸닥거리만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은 무당이 행하는 수많은 굿 중에서 병굿에 해당하는 간단한 굿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 푸닥거리조차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여 병을 치유하게 하려는 민간요법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던 적극성도 지닌다. 천연두 같은 ‘불가항력’적인 전염병이 나돌았을 때 이를 집단적으로 퇴치하기 위해서는 신앙에 의탁하는 방식이 동원되기도 하는 등 당시 사회의 일정한 제한성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렇듯 ‘무지몽매한 야만인의 의식’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민중들은 기독교 같은 정신적 측면 말고 서양에서 들어온 물질문명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앞에서 예증을 들은 바 있는, 근대 문명의 가장 강력한 상징물이기도 한 사진기의 경우, 나아가서 근대적 속도의 상징물인 기차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1904년 12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들어갔던 스웨덴 기자 아손 크렙스토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부산까지 배를 타고 들어온다. 마침 부산에서 서울까지 처음 개통하는 경부선을 타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역에 나와 본 것이며 기관차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기관차의 역할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는 그들이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대단히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 마술차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기 위해 접근할 때는 무리를 지어 행동하였다. 여차하면 도망칠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 또 서로 밀고 당기고 하였다. 그들 중 가장 용기있는 사나이가 큰 바퀴 중의 하나에 손가락을 대자, 주위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 용기있는 사나이를 우러러 보았다. 그러나 기관사가 장난삼아 환기통으로 연기를 뿜어내자 도망가느라고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 무리들은 한 무리의 우둔한 양들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배짱 좋은 사람 하나가 멈추자 다른 사람도 일제히 멈추고는 무시무시한 철괴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의미있게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는 꼴이 꼭 이러한 식의 생각을 하는 성 싶었다.

‘위험한 짓이야! 천만금을 준다 해도 다시는 이러한 짓을 안 할거야. 도깨비가 장난치는 거지. 요란한 숨소리의 이 괴물에는 악령이 붙어있어.’

나는 객실의 창가에 서서 이 소동을 지켜보았다. 참 흥미진진하였다. 가장 웃음이 나오는 것은 난장이처럼 키가 조그마한 일본인 역원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코레아의 아들들을 다루는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은 정말 굴욕적이었다. 그들은 일본인만 보면 두려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갔다. 행동이 잽싸지 못할 때는 등에서 회초리가 춤을 추었다.42) W. a. Grebst, 앞의 책, pp.33∼34.

기괴스런 양물(洋物)을 처음 만났을 때 조선 민중들의 당혹감, 놀라움, 낯섬 등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차가 출발하였던 부산역에서만 그러하였던 것이 아니었으니 서울로 오는 도중에도 여러 번 기차로 놀란 민중들을 만나게 된다.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꽁무니를 빼 근처 숨을 곳을 향해 뛰었다. 초록과 빨강의 외투를 입은 아이들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그들 뒤를 좇았다. 기차가 무시무시하게 보였던 모양이다.”고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 기괴스러운 양물을 움직이는 이는 누구인가. 두말할 것 없이 일본제국주의였으니, 난장이처럼 생긴 역원들이 채찍으로 조선의 민중을 때리는 모습이 관찰된다. 양물 뒤에 숨겨진, 아니 노 골적으로 드러나있는 제국과 식민의 관계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서양인들이 묘사한 기차와 조선 민중의 즉각적 반응은 곳곳에서 기록되고 있다. 알렌은 ‘기차가 곧 휼륭한 교육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차는 비록 승객이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기다려 주는 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양반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양반이 오전에 떠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지금 역으로 오고 있는 중인데 오후에 도착하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하더라도 역에 도착해보면, 기차는 그 양반을 기다리지 않은 채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다. 지체 높은 양반을 태운 가마를 끄는 사람이 달려오고 수행원들이 앞서오면서 ‘여보시오, 기다리시오.’라고 외쳐댈 때에도 기차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예정된 시간에 출발해 버리곤 하였다.43) H. N. Allen, Things Korea : 윤후남 역, 『알렌의 조선 체류기』, 예영, 1996, p.147.

이 우스꽝스런 사례는 기차 그 자체보다도 ‘속도’라는 괴물을 만났을 때, 즉 자본의 속도를 만났을 때 비자본적 환경에 놓여있던 조선민중의 처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기차라는 빠른 속도의 시간이라는 관념, 즉 근대 자본주의의 발명품인 시간이라는 이름의 속도는 조선을 엄습하였으며, 기차는 그 속도의 상징적인 매체였다.

물론 기차 못지않게 충격을 던져준 것은 자동차였다. 서양인들이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에는 질주하는 자동차에 놀란 사람들이 흩어지고 말에서 떨어지고 장작 짐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44) 백성현·이한우,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새날, 1999, p.124. 남대문 주변의 칠패시장 정도에서의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바, 과장이 심한 그림이기는 해도 속도를 받아들이던 조선 민중의 받아들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기차가 속도의 상징이었다면 사진이란 매체는 복사로 상징되는 근대적 표상의 대표격이다. 앞에서 언급된 신문기자 아손 의 손에도 사진기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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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대한매일신보 기자였던 알프레드 맨험이 그린 일러스트
1909년 대한매일신보 기자였던 알프레드 맨험이 그린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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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사진기를 보고 놀라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내가 공주 시내로 들어가자 군중들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나를 따랐고 지난번에는 내가 깜빡 잊고 써먹지 못하였던 사진기에 겁먹은 눈초리를 던졌다. 내가 사진기의 초점을 그들에게 맞출 적마다 비명을 지르는 등 두려워하는 몸짓으로 줄행랑을 쳤다. 미신적인 생각에 이 조그맣고 까만 상자 속에 악귀가 들어있는 줄로 믿었던 모양으로, 이럴 경우에 몸을 멀리하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45) W. a. Grebst, 앞의 책, p.64.

사진과 민중의 관계는 한국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기 자체가 고급품이었고 무엇보다 낯설었다. 사진기는 근대의 표상이었고 양물의 대표격이었다. 민중들은 사진기를 놀라운 기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사진을 찍히면 영혼도 팔게 된다는 믿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세계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사진찍기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와 식민, 근대와 제국의 관계에서 사진이란 양물은 대단히 효과적인 기재였다. 식민제국 건설에 반대한 의병이나 동학농민군 등의 얼굴이 사진으로 찍혔다.

경부철도를 비롯한 다양한 식민건설 장면들이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원주민’들은 부동자세로 사진을 찍혔으며, 하던 동작을 멈추고 ‘동작 그만’의 작위적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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