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2 양품과 근대 경험
  • 01. 밀려드는 양품(洋品), 조선 사람의 근대 경험
이철성

1876년 강화도조약이 맺어지자 양품이 조선 시장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1880년대 문호가 미국·독일·영국 등에게도 열리자, 양품 수입 속도는 급물살을 탔고, 물건은 다양해졌다. 개항과 함께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근대는 주체, 자아, 합리성의 개념과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근대가 자생적이었는가 이식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도, 우리의 근대가 서구와 어떻게 다른가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개항기 조선 사람들은 일상을 통해 근대를 체험하고 근대성을 내면화시켰다. 조선 사람은 근대를 체험하는 주체였고, 양품은 그 근대성을 체험하는 매개체였다. 양품은 조선의 근대성과 소비문화의 함수관계를 잘 드러낸다. 양품은 ‘소비하는 개인’을 단순히 근대적 주체로 독립시키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양품은 소비문화를 개인에서 사회로 확산시키면서 개화와 미개화의 구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항과 함께 밀어닥친 양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뭐니뭐니해도 개항기 최대의 수입품은 서양목(西洋木)이었다. ‘옥처럼 깨끗하다.’하여 옥양목(玉洋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양복(洋服)·양장(洋裝)의 신사(紳士)·숙녀(淑女)가 등장하기 이전에, 서양목은 백의민족의 무명베를 밀어내며 전통 옷감 시장을 석권하였다. 개화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의 발싸개 버선도 양말(洋襪)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버선을 뜻하는 말(襪) 앞에다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갖가지 갓과 망건이 중절모로 바뀌었고, 손에는 개화장이라고 불린 지팡이가 들렸으며, 신발은 양화(洋靴)를 신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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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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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품은 일상의 모습도 바꾸었다. 우리의 물 긷는 질그릇 동이와 비슷해서 붙여진 양동이, 서양 도자기라는 뜻이 모음 역행동화를 일으킨 양재기, 구리·아연·니켈의 합금으로 색깔이 은과 비슷한 그릇이라는 의미의 양은그릇이 부엌에 등장하였다. 우리의 밥상에는 양초(洋醋), 양배추, 양파가 오르고 양순대, 즉 소시지도 선을 보였다. 아낙네들은 짚이나 나무를 태운 재에서 얻은 잿물이 아니라 수산화나트 륨 계열의 양잿물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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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洋酒), 양담배[羊草] 등의 기호품은 소비 성향을 바꾸었다. 비누,47) 일본 에도(江戶)시대 포르투갈어 sabao에서 차용한 석감(石鹼, syabon)이 우리나라에서는 비누로 불렸다. 치약, 칫솔, 혁대, 장갑, 거울, 화장품 등도 개화의 새 풍물지(風物誌)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금줄 손목시계와 회중시계는 처음에는 사치스런 장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공간 개념을 파괴한 철도가 눈앞에서 기적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시계는 근대적 시간 개념의 상징으로 일상을 지배하였다. 식물성 기름을 때던 등잔은 석유가 수입되자 램프[洋灯]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스스로 불붙는 물건이라는 의미에서 자래화(自來火)라 불렸던 성냥은 전통의 부싯돌을 삼켜 버렸다. 램프는 곧 전기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지만, 램프와 전구가 밝힌 불빛은 조선 사람들이 현기증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소화기류 및 자양강장제로부터 비뇨기 및 성병 약에 이르는 다양한 의약품도 수입되었다. 아날린 계통의 염료인 애련각시와 바늘[洋針]을 비롯해 건축자재인 벽돌, 왜못[洋釘], 시멘트[洋灰], 철도 설비(plant)도 수입되었다.

근대의 주체로 개항기를 살아간 조선 사람들은 이런 온갖 양품을 통해 일상에서 근대성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근대의 주체는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고 그 시대의 문화적 표상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그 소비 열풍은 점차 하향 전파되어 갔다. 근대에 대한 경험을 소비문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감히 아무나 쓰지 못하던 사치품에 주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주체의 소비를 통해 한 시대의 문화적 맥락과 성격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최신 유행과 멋을 아는 하이컬러(high-collar)가 즐겨 사용한 옷과 옷감은 근대적 주체의 겉모습에서 읽을 수 있는 문화의 첫 단서이다. 근대 의약품은 건강한 몸의 형성으로 전통과 관습에 서 벗어난 근대 주체를 각인시켜간 매체이자 동시에 질병과 위생 상태라는 문화적 상황을 추적하는 지침이다. 석유, 등잔, 성냥 등은 근대 주체의 일상을 조건 지우는 요소가 된다. 근대 한국 문화는 입는 것, 쓰는 것, 가진 것의 변화 속에서 생활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이 시기 조선의 수출품은 곡물이나 원자재인데 비해 수입품은 사치품 일색이라고 꼬집었다. 『독립신문』도 “조선 사람이 쓰는 옷감의 2/3는 외국에서 사서 입고, 켜는 기름도 외국 기름이요, 성냥도 외국 성냥이요, 대량으로 쓰이는 종이 역시 수입 해다 쓰니 나라에 돈이 남아나겠는가?”라고 지적하였다.48) 『독립신문』 1897년 8월 7일자 1면 논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정부는 상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다. 민간 부문에서도 생산과 유통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양품의 홍수를 막지 못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조선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이라는 기형적 근대화의 터널로 들어가고 만다. 근대 주체의 몸과 일상을 바꾼 옷감, 약품, 장신구, 석유 등 미시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양품을 날라 온 외국상인 그에 맞선 조선 상공인들에 주목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근대가 식민지에서 비롯되는 문화적 굴절에 눈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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