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2 양품과 근대 경험
  • 02. 양품을 날라오는 상인, 조선인의 인상
이철성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3년 조일통상장정 체결 이후, 일본 상인의 활동범위는 애초에 개항장에 국한되던 데에서 점차 넓어져 1884년에 이르면 사실상 국내 전 지역에 걸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일본에서 건너오는 상인은 상류층에 속하는 점잖은 부류가 아니었다. 대부분은 시모노세키[馬關]와 히로시마[廣島]의 어민, 손재주로 먹고 살던 장인, 공사판 미쟁이 등 빈곤한 하층부류였다. 일본에서 힘 꽤나 쓰는 어깨 패와 불량배 부류도 끼어 있었다.49) 한우근, 『한국개항기의 상업연구』, 한국학술정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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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안중식이 그린 「조일통상장정기념 연회도」
1883년 안중식이 그린 「조일통상장정기념 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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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일본의회 의원 다구찌[田口那吉]는 “조선으로 가서 무역을 하는 자가 결코 우리나라의 신상(紳商)은 아닐 것이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자가 아니라, 반드시 집도 없고, 땅도 없고, 지방장관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뒷골목 세 집[裏店]’에 산다던가 혹은 빚을 많이 지고 있다던가 하는 자가 하는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이어 그는 “외국 무역이라고 하는 것은 모험자가 하는 일이다. 오늘날 조선에 있는 인민은 반드시 처음에는 모험자였고, 극빈자이다.”라고 선언하여50) 『大日本帝國談會誌』 제2권 제7장 의회 貴族院 明治 27년 10월 9일 議事, 衆議院 명치 27년 10월 27일 議事, 『日淸戰爭實記』 제9편 명치 27년 11월 17일 간 內外報彙, 朝鮮·朝鮮渡航者의 便利. 조선으로 넘어가는 상인의 자질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의에 쐐기를 박았다. 자연 조선에서 합명이나 합자 등 회사 형태를 갖추어 영업한 일본상인은 적었다. 따라서 어떤 이는 니켈 시계를 금으로 도금하여 팔아먹거나 못쓰는 기계를 팔아 넘기는 등 기만적 영업도 서슴지 않았다.51) 『일청전쟁실기』 제1편 명치 27년 8월 전쟁여담, 朝鮮在留의 일본인. 돈을 대부해 주고 열흘에 10%의 이자를 붙여 먹는 고리대나 전당업도 성행하였다. 돈을 모으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히 살겠다는 마음뿐이기 때문에 ‘일본을 위해서’라든지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는 이들이 많았다.

일본 영세 상인들은 서울, 경기는 물론 삼남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서양목 및 일용 잡화를 가지고 가서 쌀·콩·소가죽 등과 바꾸어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개성 지방에서는 홍삼을, 원산 지방에서는 명태나 콩 등을 사들였다. 물론 일본 상인 중에는 미쯔비시[三菱]와 같은 재벌도 있었고 우선회사(郵船會社), 은행, 광산에 투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영세상인의 상행위는 대부분 기만적이고 기생적이었다. 이에 조선 사람들은 양품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지만 동시에 근대에 대한 실망과 의구심도 불러 일으켰다. 일본 상인과 연결된 조선 상인들의 폐해도 구한말 일본상인과 상품 진출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만들었다.

청국상인은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일본상인보다 더 큰 위세를 갖고 있었다. 조선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도 컸다. 일본상인이 ‘낭인(浪人)’ 부류였다면, 청국 상인은 ‘유상(游商)’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사들였다. 이들은 각 지방 장시로 활동영역을 넓혔는데 경상, 충청, 전라 지역에서 더욱 활발하였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조선 상민(商民)을 구타하기도 하였다. 지방 관아에서 칼을 휘두르며 공갈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서울에 머물던 원세개(袁世凱)가 청국상인의 뒤를 돌봐 주었기 때문이었다. 원세개는 1884년 이후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조선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상민 중에는 일본상인보다 청국상인을 더 증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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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죽 가공(1900)
소가죽 가공(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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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대문 조시(朝市)에서도 청국상인의 횡포는 자행되었다. 곧, “경성 남대문 조시는 문의 내외 겨우 2, 3정(町) 사이에서 열린다. 일상(日商), 한상(韓商), 청상(淸商)이 각기 노점을 여는데, 청일전쟁 전에는 새벽부터 사람과 말의 출입이 빈번하여 그 혼잡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길가의 노점이기 때문에 미리 장소를 지정할 수가 없어서 빨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청국상인은 일본상인이 먼저 차지한 장소인 데도 일부러 그 노점 앞에 점포를 펴고 일본 점포를 막아서, 사려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든다. 만약 그 부당성을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완력이라도 휘두르려는 기세이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 이전 일본상인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청국상인이 멋대로 횡포를 부린 것은 사실이었다.

청국상인은 일본상인에 비해 단결력이 강하고, 싼 이자로 돈을 빌려줘 자본 회전이 쉬운 장점이 있었다. 청의 대표적인 거상 동순태(同順泰)가 전라도에 사람을 파견하여 미곡을 사들이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도 서양목과 비단류 그리고 잡화를 들여와 조선의 쌀과 콩 및 소가죽 등을 사들여 반출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전을 모아두었다가 물가를 조정하여 부당 이익을 취하는가 하면, 물건 값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위조수표를 만들어 유통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동학군이 내심으로는 중국인을 아주 혐오한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일본상인이던 청국상인이던 모두 개화라는 이상상태를 몰고 온 이방 상인이었을 뿐이다.

미국상인으로 가장 활발하게 상업에 종사한 사람은 타운센드(Walter D. Townsend, 陀雲仙)이다. 타운센드는 무기, 기선 및 전기용품을 수입해 조선정부에 팔았다. 또한, 서양목을 팔고 곡식을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타운센드는 조선 상인들에게 집문서나 전답문서를 저당 받고 거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수원, 개성, 인천, 성천, 의주 등 조선 각처 상인들과의 채무분쟁이 한·미간 외교 쟁점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타운센드의 무역활동이 조선 전역에 미쳤던 것이다. 한편, 뉴웰(Newell, W. A.)은 1885년(고종 22) 조선 연해에서 진주 굴채에 종사했으며 철도부설권과 관련된 모스(James R. Morse) 역시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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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에 실린 세창양행 광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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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영국의 무역상선회사 이화양행(怡和洋行, Messrs, Jerdine, Matheson, & Co.)이 제물포에 자리를 잡았다. 이화양행은 소가죽 무역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광산업과 선운업에 관계하였다. 영국 상인 헤그만(Hagemann, 跆弋曼)은 조선 내륙을 거쳐 러시아령까지 넘어갔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인 및 조선인과 더불어 목재를 벌목하고, 소와 말을 밀무역하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독일도 1883년 제물포에 세창양행(世昌洋行, Meyer & Co.)을 개설하면서 조선 무역에 참여하였다.52) 『일청전쟁실기』 권15, 명치 28년 1월 17일 발행 국론일반, 전쟁 후 일청간의 무역. 마이어(H. C. Eduard Meyer, 愛都亞 邇德 咪吔)는 조선으로부터 독일주재 조선총영사로 임명된 적이 있는데, 중국에 마이어양행(Meyer & Co., 咪吔洋行)을 설립해 무역업을 하고 있었다. 세창양행은 이 마이어와 볼터(Carl Wolter, 華爾德)가 설립한 회사였다. 세창양행은 단순한 무역상회의 범주를 넘어 광산권 획득, 해운사업, 화폐사업 등 조선과 경제교역을 넓히기 위한 독일의 산업기지 역할도 수행하였다. 한국의 경영주 볼터가 독일 정부로부터 4등 훈장을 받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현재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관련 유물은 바로 이 세창양행의 볼터와 마이어 그리고 독일의 인류학자 게오르그 틸레니우스(Grorg Thilenius)의 합작품이다.53) 조흥윤, 「世昌洋行, 마이어,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동방학지』 46·47·48, 1985.

서양상인의 경제활동은 몇 개의 상사(商社)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일상 소비용품을 팔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광산 개발과 철도부설 등 굵직한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무역도 서양목을 파는 대신 곡물을 반출하는 무역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만큼 서양목은 엄청난 수요를 지닌 매혹적인 상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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