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2 양품과 근대 경험
  • 03. 매혹적인 서양목, 김덕창 직포회사 박승직 상점
  • 몰아닥친 서양목 광풍, 몰락하는 백목전
이철성

서울 종로 백목전은 비단전[縇廛]과 함께 전국적인 연계망을 가지고 조선의 돈줄을 쥐고 흔들던 상업계의 선두마차였다. 그 위세당당하던 백목전 상인 김득성(金得成)이 돌연 1888년(고종 25) 10월 26일 조선정부에 외국상인, 특히 일본 상인의 무명 판매를 금지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외국과 통상을 시작한 뒤, 청나라와 일본 상인이 한양에 앞다투어 점포를 개설하고 외국 물건을 들여와 팔고 있다.”고 말한 뒤, “심지어 진고개 일본상인들은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무명을 서울로 들여와 물건을 늘어놓고 제멋대로 팔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일본상인의 영업은 백목전과 같이 나라에 국역을 내는 것도 아니었고, 통상장정에서 규정한 내용과도 어긋났다. 따라서 김득성은 “일본공사에게 조회하여 조선 물건을 조선에서 팔지 못하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백목전은 조선 상업의 중심지 종로 거리에 양쪽으로 늘어선 시전(市廛)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최상층으로 분류되는 육의전(六矣廛) 중 하나였다.54) 고동환, 「17세기 서울 상업체제의 동요와 재편」, 『서울상업사』, 태학사, 2000. 육의전은 17세기부터 등장한 사상 난전의 활발한 상업 활동과 새로운 시전의 창설을 배경으로, 국역 조달 업무와 자율적인 통제업무를 맡았던 6개의 시전을 말한다. 18세기 조선정부는 시전의 도거리를 방지하고 영세상인의 자유 상업을 보호하려는 통공정책을 펼쳤지만, 육의전만은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에 개항 전까지도 육의전의 특권적 지위는 굳건히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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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운종가
1890년대 운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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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전은 중국 비단을 취급하는 비단전[立廛; 縇廛], 무명과 은을 취급하는 백목전, 국산 명주를 취급하는 면주전(綿紬廛), 모시류를 취급하는 저포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어물을 취급하는 어물전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육의전의 핵심은 역시 직물을 취급하던 비단전, 백목전이었다.

우리말로 물건을 파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는 전(廛)과 방(房)이었다. 전방(廛房)이 상점을 의미한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비단전과 백목전은 서울 종로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비단전은 광통교 주변에, 백목전은 광통교와 종로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종로 시전 상가는 대체로 2층 목조기와집이었는데, 위층은 창고, 아래층은 점포로 사용하였다. 비단전은 1방에서 7방까지 구분되고, 각 방의 면적은 10칸이었는데, 이를 다시 10분하여 영업하였다. 백목전의 경우도 대체로 5∼6방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궁궐이나 관아, 양반사대부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취급했으므로 대낮에 대부분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서울의 대표적 시장이던 칠패(七牌)와 이현(梨峴)의 장이 새벽에 열렸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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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전 필방
잡화전 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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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전은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조직하여 정부에 대한 각종 부담을 총괄하고, 영업상 독점권을 유지하며, 조합원 간의 공동 이익과 친목을 도모하였다. 이를 위해 각 도중은 엄격한 가입조건과 심사, 그리고 내부 서열 체계가 있었다. 비단전의 경우, 조합원 가입은 혈연 관계가 기본 조건이었으며, 가입금 명목의 예은(禮銀)을 내야 하였고, 그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조합원의 서열이 정해졌다.

조직은 대행수(大行首), 도령위(都領位), 수령위(首領位)로부터 실임(實任), 서기(書記), 서사(書寫)까지 직급이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대행수는 시전의 전반적인 활동을 관리하고 사무를 총괄하는 시전 도중의 대표였다. 도령위는 대행수를 역임한 원로층으로 도중 임원 추천권을 갖고 각 사안에 고문 역할을 하며 최대의 존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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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포전기
저포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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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은 취급하는 ‘전문 물종’에 따라 그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행랑 건물 앞에 전문 물종을 적은 푯말을 세워 외부에 표시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상호(商號)’와 ‘간판’이 등장한 것은 일본식 경영방식에 영향받은 것이다.

비단전은 각종 중국비단을 취급하였다. 두껍고 윤기가 도는 공단(貢緞), 한단(漢緞)이라고도 불린 대단(大緞), 엷고 무늬가 둥근 비단 궁초(宮綃), 생사(生絲)로 얇고 성기게 짠 생초(生綃), 구름무늬가 새겨진 운문대단(雲紋大緞), 햇빛 무늬를 놓은 일광단(日光緞), 달빛 무늬를 놓은 월광단(月光緞), 두꺼운 중국산 명주인 통해주(通海紬) 등이 팔려 나갔다. 비단전은 시전 가운데 가장 무거운 국역을 부담하였지만, 중국비단 무역과 국내 상업을 연계하면서 육의전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였다.

백목전은 비단전 다음의 지위에 있었다. 여기서는 강진포, 고양목, 상고목 등 국내 무명을 취급하였다. 따라서 국내 무명 생산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천은(天銀), 정은(丁銀) 등 은을 취급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개항 이전 백목전 말고 무명을 취급한 시전으로는 지금의 남대문로 1가에 있던 포전(布廛)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농가에서 짠 농포(農布), 삼 껍질에서 뽑아낸 실로 가늘게 짠 세포, 함흥 오승포, 심의포, 안동포, 경상북도에서 주로 생산된 계추리, 해남포 등을 취급하였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은 인간사에 뺄 수 없는 요소이며 그 자체가 문화의 핵심을 이룬다. 전통적으로 한국민들이 선호하는 섬유는 목화에서 뽑은 무명실로 짠 면직물,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짠 견직물, 삼이나 아마실로 짠 마직물, 삼베보다 곱고 빛깔이 흰 모시, 털실로 짠 모직물 등이었다. 그러나 모직물은 모자의 재료 등 특수한 용도에만 사용되었고, 견직물은 귀족들에게만 사용이 허용되었으며, 삼베와 모시도 여름 옷, 장례 의복 등 특수 용도에 국한되어 있 다. 따라서 한국인의 기본적인 의류 재료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섬유는 면직물, 즉 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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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짜는 여인(1900)
베짜는 여인(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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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명은 농가에서 생산되고 자급자족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특정 지방에서 생산되어 전국에 유통되기도 하였다. 무명은 생산되는 지명을 앞에 붙이고 옷감을 짠다는 의미의 ‘낳이’를 붙여 구별하였다. 전라도 강진낳이는 그 중 최고로 쳤고, 경상도 안동낳이, 충청도의 한산낳이, 함경도 육진장낳이 등도 유명하였다. 무명의 품질은 세로 방향으로 놓인 날실의 올 수로 결정되었다. 날을 세는 단위는 새[升]인데, 한 새는 날실 여든 올이었다. 따라서 240올로 구성된 삼승포는 400올로 구성된 오승포보다 성글고 굵었다.

무명을 얻는 과정은 목화에서 씨를 뽑아 솜을 만드는 거핵 과정, 솜에서 실을 만드는 방사과정, 실로 천을 짜는 방직과정으로 구분되었다. 물레는 솜에서 실을 짜내고 베틀은 그 실로 무명을 짜는 전통기구였다. 그런데 전통 방식으로 무명을 얻으려면 목화에서 1필 분량의 실을 자아내는데 대체로 5일, 다시 직물을 짜는데 5일이 필요하여 평균 열흘이 걸렸다. 자연히 지역 특산물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지만, 생산은 소량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품질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같은 한 필 무명이라도 길이가 서로 다르거나 짜는 사람은 같아도 품질은 날마다 조금씩 달랐다. 눈에 잘 띄는 겉 표면은 꼼꼼하게 잘 짜고, 나머지는 형편없이 성글게 짜는 속임수도 있었다.

전통 무명 시장은 가내 수공업 생산방식으로 인한 소량 생산, 제품의 비규격화, 품질의 저하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틈을 비집고 개항 이후 조선의 경제를 뒤흔든 양품이 서양목, 즉 광목(廣木)이었다. 유현종은 그의 소설 『들불』에서 “왜상(倭商)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무명보다 값이 싸고 그 외양 또한 맵시가 나는 광목을 필로 쏟아 낸다.”고 하였다. 백의민족의 의생활을 바꾸는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광목의 유행 그것이 바로 조선 5백년 무명의 상업사에 굵은 자취를 남겨왔던 포목전 상인 김득성이 청원서를 낸 근본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서양목은 개항 이전부터 이미 조선에 수입되어 판매되었다. “서양목이 나온 이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무명은 사용될 때가 없어 실업에 이르게 되었다.”55) 『비변사등록』 234, 헌종 13년 1월 25일. “서양목이 해가 갈수록 더욱 많이 팔려나가 토산(土産)의 목면은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56) 『비변사등록』 234, 헌종 13년 1월 25일. “서양목의 수입이 해마다 늘어나 생산되던 목면은 시장에서 교역이 끊어졌다.”는57) 『비변사등록』 239, 철종 3년 1월 25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는 백목전·청포전·포전 상인이 서양목을 수입해 판매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백목전 상인은 개항 이전 국내 무명의 독점 판매를 지닌 채, 서양목의 수입 판매에도 손을 댔다. 결국 국내의 직조 기술 개발과 대량 생산을 위한 설비투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자연 개항 이후 외국산 면포는 조선 수입품목 제1호로 등재되었고, 조선의 직물시장을 삼켜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불러 왔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의 직물시장을 큰 소용돌이 속으로 밀고 간 장본인은 다름 아닌 무명 독점 판매권을 지닌 백목전 상인들이었다.

따라서 백목전 김득성의 청원서는 개항 이후 압박해 오는 일본상인의 위협을 다시 한번 육의전 상인의 특권성에 기대 극복해 보려는 ‘숨가쁜 일성(一聲)’에 불과하였다. 격변하는 시대의 현실은 더욱 가혹하였다. 김득성의 청원서는 오히려 백목전 상인의 도고권은 일본 상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 일본 상인이 서울 안에서 포목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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