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2 양품과 근대 경험
  • 03. 매혹적인 서양목, 김덕창 직포회사 박승직 상점
  • 김덕창 직포공소(織布工所), 박승직 상점
이철성

무명은 고려 말 백색의 목화가 전래된 뒤 보편화된 옷감이었다. 모든 사람의 생필품이었기에 다른 물품과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수요가 있었다. 이에 무명은 다른 물품과 교환할 수 있었고 가치척도를 가진 화폐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58) 梶村秀樹, 「李朝末期 綿業의 流通 및 生産構造-상품생산의 자생적 전개와 그 변용」, 『韓國近代經濟史硏究』, 사계절, pp.117∼118. 하지만 개항 이후 서양목의 본격적 수입은 상황을 급변시켰다. 서양목은 서양에서 생산되었다 하여 양목(洋木)이라 하였고, 영국제 면직물을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이 들여다 팔았기 때문에 당목(唐木)·왜목(倭木)이라고도 하였다. 표백 가공된 상태가 옥처럼 깨끗하여 ‘옥양목(玉洋木)’이라고도 불렸고, 천의 너비가 재래 무명보다 넓고 품질이 고른다하여 ‘광목’이라고 통칭되기도 하였다.

1894년 이전까지 수입된 직물은 한랭사 및 서양목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한랭사는 얇고 풀기가 센 직물이었으므로, 봄부터 여름에 걸쳐 대량으로 팔렸다. 서양목은 가을부터 겨울에 잘 팔렸다. 한랭사는 여름옷을, 서양목으로는 겨울옷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수입품들은 하급관료층, 도시중인층, 상인층, 지방관청의 서리 층, 나아가 농촌의 신흥상인층이나 지주 부농층들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1895년 이후에는 일본에서 만든 서양목의 수입량이 급속히 늘었다.59) 梶村秀樹, 앞의 글, p.117. 일본 제품은 일반적으로 영국의 맨체스터 상품보다 품질이 낮았지만 천의 종류, 길이, 폭이 다양하였다. 게다가 일본은 노동력이 저렴한 데다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워 수송 비용이 적게 들었다. 일본상인들은 영국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일본제품을 싸게 팔 수 있었다. 일본제품이 조선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 이유였다.

이에 1890년대 『독립신문』에는 “이 달 17일에 4살쯤 먹은 계집아이가 서양목 당홍 치마 입고, 서양목 저고리에 당홍 당혜(唐鞋) 신고 자주 홍나 도투락댕기드렸는데 집을 잃고 종로로 다니거늘 종로 교번소에 순검들이 이 아이를 중서에 두고 그 부모가 찾아가기를 기다리더라.”라는 기사가 실렸다.60) 『독립신문』 1896년 9월 15일자 2면 잡보. 또한, 이듬해에는 남부 대추무골 사는 병부 주사 윤성보가 3살 난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흰 서양목 겹저고리, 서양목 누비 바지, 서양목 겹 두렁이 입고, 버선 신고”라고 차림새를 소개하고 있다.61) 『독립신문』 1897년 5월 18일자 4면 잡보. 윤성보가 병부 주사였던 것으로 보아 도시의 하급관료층의 자제까지 서양목으로 옷을 해 입었음이 확인된다.

자연히 조선은 상공업을 진흥시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여론에 휩싸였다. 『독립신문』은 상공업 진흥을 위한 논설을 연이어 펼쳤다. “세계에 부강한 나라들은 농사에도 힘쓰려니와 제일 힘쓰는 것은 물건 제조와 장사이다. 아무쪼록 물건을 넉넉하고 싸게 만들어 조선 사람들이 쓸 것을 외국 것이 아니라도 넉넉하게 견디게 해 주어야 한다.”62) 『독립신문』 1897년 8월 7일자 1면 논설. “대한 정부에서 국중 인민을 위해 급선무로 가르쳐서 사무를 확장할 일은 첫째 공장이요, 둘째는 상업이다. 공장에 힘쓸 것 같으면 제조물이 생길 것이요 제조물이 생기면 상업이 흥왕할 것이다.”63) 『독립신문』 1899년 5월 22일자 1면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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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포기술 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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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도 이와 유사한 논설을 실었다.

직공(織工)은 민생과 가장 크게 관계되는 것이다. 막혔던 바닷길이 터지자 부녀자의 길쌈질이 점점 시들해지고 베틀이 모두 텅비어 서양목의 수입에 오로지 의지하니, 나라가 가난해지지 않으려 하고 백성이 헐벗지 않으려 한들 어찌 그리되겠는가. 직포 산업을 일으킬 방법을 생각하여 백성을 이끄는 것이 지금의 급한 일이다. 기계를 제작하고 간편하고 빠른 기술로 옷감을 짜내어 집안을 일으킨다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요 백성도 재산을 살찌울 것이다.64) 『독립신문』 1899년 10월 4일자 1면 논설.

당시 신문 논설들은 옷감과 관련된 직물회사와 잠업회사, 그리고 연초회사가 시급하고도 유력한 민간 제조업 분야라고 주장하였다.65) 강만길, 「대한제국기의 상공업문제」, 『아세아연구』 16-1, 1973. 직물회사는 어떤 생산회사보다 광범위한 설립이 요청되는 분야였다. 이에 동묘고직(東廟庫直) 이인기(李仁基)는 아주 정밀하고 편리한 직조기를 발명하여 판매에 들어갔고,66) 『독립신문』 1900년 2월 20일자. 충주 남창리 이태호(李泰浩)는 신학문을 배우고 직조기계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려고도 하였다.67) 『독립신문』 1902년 12월 23일자. 직조 공장도 세워졌다. 1900년에는 민병석(閔丙奭)이 사장, 이 근호(李根澔)가 부사장이 되고, 종래 시전 자본이 중심이 된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가 설립되었다. 1901년에는 한성제직회사(漢城製織會社)가 기계화 동력화한 직조기를 갖추고 남녀 직공을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김덕창(金德昌, 1878∼1948)도 1902년 2월 종로 2가에 직포공장을 설립한다. 김덕창은 1897년 19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염직공장 직공으로 취업하였다. 일본에서 직조기술을 익힌 김덕창은 밧탄직기를 들여와 1902년 종로구 장사동에 직포공소를 열었다.68) 이한구, 「染織界 시조, 金德昌 연구-東洋染織株式會社 중심으로」, 『경영사학』 8, 1993.

밧탄직기는 메이지유신 이후 프랑스에 파견된 일본 직기 기술자들이 역직기인 밧탄직기를 구입해 온 데서 비롯한다. 일본에서는 이를 개량하여 북(flying shuttle)을 발로 움직이는 족답식 직기를 출현시켰다. 이에 힘입어 일본에서는 1883년 근대적인 생산시설을 갖춘 대판방적주식회사 설립을 필두로 대규모 방적공장이 설립되었고, 1890년대에는 원사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하였다. 김덕창이 일본에서 익힌 기술도 바로 이 밧탄직기에 의한 직포 기술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던 해인 1910년, 서울에서 밧탄직기에 의해 옷감을 제조하는 공장 수는 38군데였다. 이 가운데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은 두 군데뿐이었다. 이 시기 직포업에 투신한 조선의 기업가는 귀족 관료 출신과 서민 출신 기업가로 크게 구분된다. 귀족관료 출신으로는 구한말 법부대신을 역임한 이재극(李載克),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용직(李容稙), 예조판서 출신 김종한(金宗漢)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가로서 직포업에 투자한 것이고 실제 직포업의 기술과 발전을 주도한 계층은 염직공장을 운영하던 낭대호(浪大鎬), 직조공장을 운영한 노홍석(盧洪錫), 면직공장을 운영한 최규익(崔 奎翼) 등 서민출신 기업가들이었다. 그 가운데 김덕창의 직포공장이 직기 17대, 직공수 40여 명으로, 1910년대 서울 소재 직포공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69) 1910년 4월 회사 조직을 갖춘 京城織紐의 설립도 기억할 만하다. 1912년 경성직뉴의 사장은 대한제국 명문출신의 대자산가 尹致昭를 비롯한 광희동 부근의 직물업자들이 설립한 국내 최대의 염직회사였다. 여기서는 허리띠, 대님, 주머니끈 등 끈 종류를 중심으로 양말, 장갑 등 編組 제품도 생산하였다. 김덕창은 이후 1920년 동양염직주식회사를 발족시켜 표백, 염색을 주업으로 모자, 양말 등도 생산하였다. 김덕창은 ‘조선사람 조선 것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펼쳐진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5년을 전후하여 동양염직은 주식회사의 형태에서 개인 기업형태로 변화하여 대기업으로 전환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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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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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박승직(朴承稷, 1864∼1950)은 지금의 OB 맥주로 유명한 두산그룹의 기틀을 마련하여 한국 기업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경우에 속한다.70) 김동운, 『박승직 상점-1882∼1951년』, 혜안, 2001. 박승직은 1880년까지 한학을 공부하다가, 1881년 민영완이 해남 군수 발령을 받자 같이 가서 3년을 지냈다. 지방에 있으면서 그의 형 박승완과 함께 서울 종로4가 92번지[이현(梨峴) 67통 2호]에서 면포 상점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 것은 1882년이었다. 1886년에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포목을 사다가 파는 환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경상도 의성·의흥, 전라도의 영암·나주·무안·강진 등에서 농민들이 생산한 토포(土布)를 구입해 서울에 팔았다. 배오개의 거상 박승직 상점의 시작이었다.

박승직은 1896년 사업장소를 서울 종로4가 92번지에서 종로4가 15번지로 옮겼으며, 여기서 1951년까지 영업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박승직은 일본산 생금건(生金巾)을 취급하며 영업을 확장해 갔다. 생금건에는 가는 실로 짠 생세포(Shirting)와 굵은 실로 짠 생조포(生粗布) 두 가지가 있었다. 박승직은 1906년 88명의 한국 포목상과 함께 합명회사 창신사(彰信社)를 설립하고 후지와사[富士瓦斯] 방적회사 제품을 독점 수입하였고, 1907년에는 다시 30∼40명의 포목상과 함께 합명회사 공익사를 세웠다.

박승직은 이 공익사의 사장으로 1940년까지 재직한다. 창신사와 공익사는 모두 일본에서 생산되는 생금건의 국내 배포권을 둘러싼 일본상인과의 경쟁관계에서 탄생하였다. 식민지시대 박승직은 면직물 수입 판매와 함께 규수들의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던 박가분 본포와 소가죽 판매업을 한 상신상회, 미곡판매와 정미업을 주종으로 한 공신상회를 거느리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거상으로 자리하였다. 포목상으로 출발한 박승직이 민족을 구분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의 ‘돈’을 모아 거상의 지위에 오르고, 그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두산그룹의 모체를 만든 것은 분명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다시 평가할 가치가 있는 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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