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2 양품과 근대 경험
  • 04. 세창양행의 금계랍, 이경봉의 청심보명단
이철성

조선 사람에게 몸을 감싸는 서양 옷감이 근대적 경험으로 내재화되고 있을 즈음, 서양 약품은 몸 속 내면적인 차원의 근대적 체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19세기까지 조선에서는 한의학이 중국과 견줄만한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진료와 값비싼 한약을 이용하기는 어려웠고, ‘계’라는 상호부조를 통해 의료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것은 자연히 전국적인 민간 약국의 창설로 이어졌고, 약종상도 진료행위를 관행적으로 하게 되었다.71) 신동원, 「미국과 일본 보건의료의 조선 진출 ; 제중원과 우두법」,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

대구, 전주, 공주 약령시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1884년 조선을 최초로 방문하였던 미국 군의관 우즈(Woods)가 “조선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약소비자의 나라이며 약국들이 매우 많다. 조선인들 사이에 미신 의료는 중국보다 훨씬 적다.”고 한 것은 조선의 약국을 보고 내린 평가이다.72) 신동원, 앞의 글 재인용. 한의학은 진료보다는 매약(賣藥)을 통해 이용되는 관습을 형성한 것이다.

근대 서양의학은 한의학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식민지시기까지도 서양의학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의료인력이 충분히 배출되지 않았 기 때문에 의료혜택은 대도시 일부 주민들에게만 미치고 있었다. 이에 서양의학도 진료보다는 매약의 형태를 통해 민간에서 이용되었다. 서양의학에 기초한 약품들은 복용의 편리함과 효능면에서 한의학의 약재들이 주지 못하던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의 주요 소비품으로 급속히 자리잡게 되었다. 외국 상인과 상사들이 수입하는 약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조선 약재상들도 의약재를 만들어 광고 판매하는 새로운 풍경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에서 조선 사람들은 근대적 위생관과 질병관을 체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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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금계랍 광고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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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양행 금계랍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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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품 금계랍과 회충산을 새로 내 왔으니 사가시기를 원하는 이는 서울 구리개 제중원으로 오시오.”

세계에 제일 좋은 금계랍을 이 회사에서 또 새로이 많이 가져 와서 파니 누구든지 금계랍 장사를 하고 싶은 이는 이 회사에 와서 사면 도매금으로 싸게 주리라-세창양행-.

금계랍(金鷄蠟)은 퀴닌(kinine)으로 불리는 말라리아 치료의 특효약으로 해열제·강장제·위장약으로도 쓰였다. 회충산은 회충을 없애는데 쓰는 가루약이었다. 이것을 조선정부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이 이름을 바꾼 제중원(濟衆院)에서 팔았다. 제중원은 왕립의료기관을 설립하려던 고종의 의지, 갑신정변 때 민영익의 목숨을 구한 의료선교사 알렌의 인지도, 북미 선교회의 무료 의사 지원 제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탄생하였다. 근대 문물의 수입과 전수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중원은 호기심 많은 구경꾼을 포함해, 개원 이듬해인 1886년까지 7천명 이상을 치료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환자는 걸인, 나병환자로부터 궁중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제중원에서 많이 치료 한 질병은 말라리아, 매독, 소화불량, 피부병, 결핵, 기생충병 등이었다. 대부분 전통적인 한의학으로는 고치기 힘든 종류였다. 제중원에서 미국산 금계랍을 들여와 팔았으므로, 말라리아 환자들이 가장 많이 제중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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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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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모든 제조약에 약값을 받던 제중원은 빈민 의료기관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약값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금계랍은 이 조치에서 제외하여 10알에 500푼을 받았다. 제중원이 처음 모든 제조약에 매긴 100푼의 5배에 해당하는 고가였다. 알렌은 “사람들은 퀴닌의 가치를 알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청이 많이 들어왔다.”고 회고하였다.73) 박윤재, 「청심보명단 논쟁에 반영된 통감부 의약품 정책」, 『역사비평』 2004년 여름호.

세창양행은 광산권 획득과 해운사업 등 굵직한 이권에도 참여하였으나 일반 조선 사람에는 금계랍과 바늘[洋針]을 수입한 독일 상회로 깊은 기억을 심었다.74) 김봉철, 「구한말 ‘세창양행’ 광고의 경제·문화사적 의미」, 『광고학연구』 13-5, 2002. 이는 금계랍의 품질이 좋았던 데다가 상품 광고와 약품 포장에도 신경을 쓴 상술이 주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창양행은 토끼, 거북이, 학 등을 이용한 트레이드마크를 써서 금계랍을 선전하였다. 태극기를 그들 광고에 쓰는 기지를 보였던 세창양행은 처음에는 금계랍을 원형의 병에 담아 시판하다가 1901년에는 사각형 병으로 디자인을 바꾸었다.75) 『황성신문』1901년 12월 12일자 광고.

서양의학에 기초한 약품의 편리함과 효험이 알려지면서, 수입 양약(洋藥)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였다. 일본 약종상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일본에서는 인단(仁丹), 용각산(龍角散), 건위고장환(健胃固腸丸), 오다위산[大田胃散], 건뇌환(健腦丸), 대학목약(大學目藥) 등이 줄이어 들어왔다.76) 홍현오, 『한국약업사』, 한독약품, 1972.

일본상인이 수입하던 약품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약품은 소화제였다. 제중원에서 환자를 진료한 알렌은 과음 과식을 한국인의 소화불량의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소화불량이 많다는 것이다. 소화불량이 보편 적 질병이었기에 인단과 같은 약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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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당과 화평당 등의 약 광고
제생당과 화평당 등의 약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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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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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맞서 대한제국시기 조선의 제약 산업을 이끌었던 곳은 동화약방(同和藥房), 제생당(濟生堂), 화평당(和平堂) 등이었다. 동화약방은 민강이 그의 아버지 선전관 민병호가 만든 활명수를 기반으로 만든 약방이었다. 기독교인으로 서양의학에 접할 기회가 많았던 민병호가 궁중 비방과 서양의학을 혼합시켜 활명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려서 먹는 탕약에 비해 복용이 간편하고 급체, 주체, 소화불량에 효력이 좋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부채표로 유명한 지금의 동화제약이 동화약방의 활명수를 모태로 성장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경봉의 제생당도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을 통해 이 시기 손꼽히는 제약업체로 뛰어 올랐다. 청심보명단도 조선인 특유의 소화불량을 치료해 주는 소화제의 일종이었다. 동그랗고 작은 환(丸)으로, 복용하기 편리하고 약효가 뛰어나 환영받았다. 이에 인천 제생당에서 남대문으로 근거를 옮기고 전국에 지점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제생당 광고문안은 “대한국 13도에 총발행소(總發行所)는 경성 남대문 내 제생당 대약방”이었다.77) 『황성신문』 1908년 11월 3일자 4면 광고.

이처럼 조선 제약업계는 전통적인 매약(賣藥)이라는 사회적 관습 위에서, 1900년대에는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의 접목을 시도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권력이 커져가자 고전을 피할 수 없었다. 약품검사와 특허등록을 통한 독점권 부여를 조선통감부가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한약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 판매하는 약품을 검사해야 하는 것은 당면 과제였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통감부는 1907년 약품 조사 및 단속의 권한을 대한의원 위생 시험부에게 부여하였다. 대한의원은 약국 영업의 계속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을지로 입구 조선의 한약상들은 대한의원 의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할 처지였다. 한약상들이 명월관에서 대한의원의 일반 의사들을 불러다 연회를 베푼 까닭도 의약업계 재편의 칼을 쥔 권력 때문이었다.78) 『황성신문』 1908년 7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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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활명수 포장 장면
1930년대 활명수 포장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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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당 약방 본점
제생당 약방 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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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국 등록제도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조선 제약업계를 압박하였다. 특정 약품이 대유행을 하면 유사 상품이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동화약방에서 개발한 활명수의 경우에도 보명수(保命水), 회생수(回生水), 통명수(通命水) 등 유사 제품이 10여 가지였다고 한다. 청심보명단이 나오자 청신보명단(淸神保命丹)이 나왔다. 진위 여부를 떠나 상품의 독점 판매권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상품특허와 등록이었다. 특허에 관한 제도화는 갑오개혁 때부터 요구되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통감부가 행정을 장악하면서 성격이 달라졌다.

이경봉의 청심보명단에는 거미표[蛛票]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거미표를 단 청심보명단이 1년에 수백만 봉지나 팔렸던 것이다. 이에 그는 총독부 특허국에 특허신청을 냈으나 결과는 거부였다. 거미표는 일본에 있는 상표라는 것이 이유였다.79) 『황성신문』 1908년 10월 25일자 잡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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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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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보명단이 일본산 인단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통감부는 약품 특허와 등록을 법제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조선 약제시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약제시장 전체를 통제해 갔던 것이다. 이에 이경봉 등은 1909년 약업계의 불황을 타계하기 위해 대한약업총합소(大韓藥業總合所)를 결성하지만80) 『황성신문』 1909년 7월 28일자 2면 잡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0년대 이후 조선제약계는 소화기류 의약품뿐만 아니라 자양강장제, 피부 외용제 등 다양한 약품을 제조·판매하였다. 이들 약재는 한약보다 복용과 사용이 간편하였다. 한약의 단점을 극복하고, 서양의학 지식을 받아들여 개선한 것이다. 일본이나 서양에서 수입되는 약품에 비해 효능도 떨어지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잘 맞았음인지 가끔 만병통치약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약 계통으로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은 서양 의약품의 도입이 자연스러운 추세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통감부가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위생문제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수행한 것처럼, 조 선 제약계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근대 서양 약품을 통해 근대적 신체와 자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회는 그래서 한동안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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