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2 양품과 근대 경험
  • 05. 입는 것 쓰는 것, 신태화의 화신상회
이철성

지금 전국에 상업과 공업은 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빼앗겨 버렸다. 입는 것과 가진 것과 쓰는 것이 다 외국 물건이다. 입는 서양목과 서양 실, 갖가지 색깔의 비단, 켜는 기름과 성냥, 먹는 궐련초와 밥 담아 먹는 사기그릇, 차는 시계와 앉는 교의, 보는 거울, 닦는 비누, 쓰는 종이, 까는 보료, 타는 인력거와 신는 서양신, 머리에 쓰는 삽보와 보는 서책, 심지어는 쌀 넣는 멱서리까지 남의 나라 것을 사서 쓴다. 사 쓰는 물건은 많고 파는 것은 적으니 그 재물이 장차 어디서 나겠는가.

1897년 『독립신문』 논설에 실린 투고 내용이다. 1890년대 이 땅의 지식인이라면 상업과 공업을 일으켜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서양목은 들어와 입을 거리를 바꾸고, 서양 약품은 몸과 마음을 지배하려 하였다. 양품의 소용돌이는 입는 것 먹는 것을 넘어, 가진 것 쓰는 것까지 침투되고 있었다.

개항기 조선으로 대거 이주하여 생계를 이으면서 부를 쌓았던 외국 상인은 역시 일본인이었다. 개항장 인천과 부산의 1899년 거류민 상황을 보면 2:3의 비율로 부산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생계 수단은 목수직, 다다미 제조업, 통장이, 안마, 두부집, 여자 머리 미용 두발사, 술도가와 술소매업 등으로 비슷하였다.81) 손정목, 「개항기 한국거류 일본인의 직업과 매춘업·고리대금업」, 『한국학보』 18, 1980. 다르다면 인천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부산은 지리적 이점에서 인지 거의 일본인 천지였다. 양복을 입고 양식을 먹는 자는 인천에 많았다. 부산에는 일본식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잘하는 자가 많았고, 인천에는 당구나 사냥의 묘기에 뛰어난 자가 많았다. 인천 잡화점에는 온갖 서양 잡화가 진열되어 있었으나 일본적인 일용품은 부산에 많았다.

그러면 서울은 어떠하였을까. 1888년 한성에 정착한 초기 일본인의 직업을 보면 목수와 미장이가 가장 많고, 잡화상·음식점이 그 다음이며, 중개상·양복 및 포목상, 전당업 등의 순이었다. 세탁업, 칠장이, 목욕탕, 통장수, 이발업, 숙박업 등도 있었다. 주목되는 점이 있다면, 잡화상, 약종상, 포목상, 전당포 등은 일본 고객뿐만 아니라 조선인 고객을 상대로도 영업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면에서 공통적으로 영세하였다. 청나라의 30개가 넘는 상회(商會)들이 원세개의 비호 아래 물건을 대량으로 수입해 들어와 판매에 종사하고 있던 상황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승리에 들뜬 일본인은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쳐 신천지에서 삶을 개척하고자 조선으로 몰려 왔다. 일본의 정치세력이 증가하자 거류민의 숫자도 늘어난 것이다. 1896년 서울의 일본인 거류민은 479가구에 인구 1,749명이었다. 1893년 234가구에 인구 779명에 비교하면 불과 몇 해만에 두 배가 넘는 증가세를 나타냈다.

일본인의 거주지도 진고개 일대에서 남대문로 일대로 확대되었고, 충무로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이 시기 일본인들의 직업분포는 수적 증가와 함께 질적 향상을 보였다. 국립제일은행과 제58은행 지점을 비롯하여 대규모 상사도 들어섰다. 인력거 사업, 된장 제조, 누룩 제조 등 비교적 큰 자본이 요구되는 직업이 눈에 띤다. 조선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잡화상, 전당업, 매약업(賣藥業)이 신장세를 보인 것도 특이하다. 그럼에도 아직 서울에 정착한 일본인의 과반수 이상은 맨손으로 무작정 건너온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직업은 단순 노무였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결말지어지자, 또 다시 맨주먹으로 조선으로 건너오는 일본인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가시화될 즈음, 일본인의 직업 중에는 새로운 직종과 신기한 직종이 생겨나고 있었다. 돈을 내면 즉석에서 성행위를 즐길 수 있는 유곽이 서울에 들어 온 것도 1904년 무렵이었다. 장소는 지금의 중구 묵정동 일대였는데, 황현은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경무사(警務使) 신태휴(申泰休)는 유녀(游女)들을 모아 구역을 달리해 살아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그 문에 상화가(賞花家)라 써 붙이고, 외국인에 매춘하는 곳에는 매음가(賣淫家)라 붙이게 했으나, 이는 그대로 실천되지 못하였다. 인천항에 도화동이란 곳은 온 마을이 모두 매음가로서, 외국인 탕객(蕩客)들이 돈을 들고 찾아와 문을 두드리니 마치 장사치가 물건을 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

유곽이 들어오자 조선 사람들도 이곳에 출입하기 시작하였고, 임질과 매독 등의 화류병(花柳病), 곧 성병도 급속히 퍼져갔다. 때문에 성병 약은 식민지시기까지 신문 광고란을 통해 선전되고 있었다.82) 서범석·원용진·강태완·마정미, 「근대 인쇄 광고를 통해 본 근재적 주체형성에 관한 연구 ; 개화기-1930년대까지 몸을 구성하는 상품광고를 중심으로」, 『광고학연구』 15-1, 2004. 그리고 급기야 이 유곽은 인천, 부산, 평양, 진남포, 군산, 목포, 원산 등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미국신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은 1919년 12월 26일자 사설에서 “일본이 한국에서 한 일 가운데 유곽 증설을 제일 훌륭하 게 해 냈다. 이것은 일본이 고의로 한국 남녀를 타락시키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83) 손정목, 앞의 글. 식민지화되는 조선인들의 불만과 반항심을 유곽을 통해 배출시키려 하였다는 해석의 타당성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떻든 일본인의 이주와 연계된 상업활동 가운데 조선인의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업종의 하나는 고리대금업이었다. 1907년 서울에는 98개의 전당포가 있었는데, 이는 불과 20여 년 전에 비해 9배가 증가한 수치였다.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도 등장하였고, 잡화상이나 약종상 등을 경영하면서 대금업을 겸하는 자도 많았다. 이에 어떤 일본인은 “진고개 부근에는 ‘전당국(典當局)’이라는 간판이 집집마다 걸려 있어 귀찮을 정도로 눈에 띤다.”고 하였다.84) 정승모, 『시장의 사회사』, 웅진출판, 1992, p.144. 전당포를 이용하는 사람은 모두 조선 사람들이었다.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전당국은 간판을 걸지 않는 대금업자가 따로 있었다. 자연히 일본 사람 사이의 금리와 조선 사람에 대한 금리에는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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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송도 유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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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 상호간의 금리는 토지 가옥을 저당할 경우 매달 3%의 이자를 물어야 하였지만, 조선인의 경우에는 빌리는 액수에 차등을 두어 10관문(貫文) 이하는 매달 10%, 10관 ∼50관은 7%, 50관문 이상은 매달 5%였다. 부산의 경우 저당 기간은 100일로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금액은 물건 값의 반액이었다. 이자를 갚지 못할 때는 이를 원금에 산입하는 것은 3번까지 허용되었고, 4번째부터는 허용되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사기와 다름없는 행상, 밀수, 화폐위조 등을 통해 돈을 모아 자금에 여유가 있던 자들은 일반 상점이나 새로운 사업보다도 전당업과 고리대금업에 뛰어 들었다. 서울, 인천, 부산은 물론 개성에서도 전당업은 성업을 이루었다. 고리대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물건을 잃어버리는 슬픔이 어떤가를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무조건 전당포로 달려갔다. 부모 몰래 집문서를 들고 나오는 철부지 젊은이도 있었고, 부랑배들이 다른 사람의 집문서를 위조하여 저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당업자와 대금업자들은 거래 상대나 문서의 진위를 가리지 않았고, 그 피해는 조선 사회에 깊은 골을 파게 되었다.

그런데 전당포에서 돈을 갚지 못해 유질(流質)되어 나오는 귀금속을 헐값으로 사들인 조선 수공업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세공기술로 이 귀금속을 다시 가공한 뒤 판매하여 이익을 얻기 시작하였다. 금은 세공업계의 패왕이라 불린 신태화가 그 주인공이다.85) 오미일, 「수공업자에서 기업가로-금은세공업계의 패왕 신태화-」, 『역사와 경계』, 부산경남사학회, 2004. 그는 뒷날 화신상회를 세워 유통업계의 총아 ‘화신백화점’의 발판을 마련한 기업가이기도 하였다.

신태화는 1877년 서울 남촌 무반(武班) 가문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우다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자, 13세 되던 해인 1889년 종로 김봉기(金鳳基) 은방(銀房)에 직공으로 취직하였다. “남의 집에 들어 온 이상 열심히 배워 자기도 장차 그 업을 경영해 보겠다는 결심”을 한 신태화는 일을 마친 후에도 제조방법을 견습하며 나름대로 연구도 하였다. 약 7년 간의 직공생활을 마치고 19세되던 1895년에는 구리재(지금의 남대문로)에 셋방을 얻고 조그만 풀무를 사서 금 은 세공업에 착수하였다. 비록 공간 한편에서 작업하고 이를 한쪽 공간에 진열해 파는 가내공업 단계의 작은 업체였지만 영업 실적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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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전당포
구한말의 전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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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으로 전당포 취체법이 발포되자 전당포가 많이 생겼다. 이에 전당포로부터 유질되는 귀금속도 자연히 늘어나게 되어 생산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플레가 심한 상황에서 유질되는 물품이 늘어나자, 신태화는 자신이 직접 전당업을 겸업하게 된다. 전당포 영업에는 조선의 직물업자 김덕창과 이정규 등도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인 중에도 전당업을 경영하던 인물이 많았던 것이다.

어떻든 1908년 신태화는 처음 자신의 공업체를 시작한 그 자리에서 13년 만에 자신의 자본금과 투자주 자금을 합쳐 신행상회(信行商會)를 설립하였다. 신행상회는 공장형태로 노동자를 고용하여, 각종 그릇과 부인용의 패물, 각종 장식품, 은제 문방구류 등을 생산하였다. 신행상회는 김연학과 동업의 형태를 띠었으나, 제조와 판매를 맡은 실질적인 경영주는 신태화였다.

신행상회는 이후 불과 5년 안에 경성 지역 자본금 1만원 이상의 6대 업체에 들었다. 1910년대까지도 금은 세공업 분야는 일본인 업체에 비해 조선인 업체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행상회의 주요 경쟁업체는 한성미술품제작소와 조선금은미술관이었다.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이봉래(李鳳來), 백완혁(白完爀), 이건혁(李健爀), 김시현(金時鉉)이 발기하고 송병준(宋秉畯) 자작이 고문으로 참가하여 경영하였다. 그러다 1911년에는 이왕직(李王職)에서 경비를 보조하다가 나중에는 명칭도 ‘이왕직 소관 미술품제작소’로 바뀌었다. 따라서 판로도 이왕직, 관아, 은행, 회사 등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왕직 소관 미술품제작소는 유동자금 부족과 판매부진으로 1922년 민간에 매각되었다. 조선금은미술관은 광산업을 하고 있던 이상필(李相弼)이 1911년 한성 중부 장교(長橋)에 처음 설립하였다. 이상필은 경성 서양구락부의 회원이었으며, 한일은행 주주, 종로 상업회의소 특별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4년 조선금은미술관은 영업부진으로 폐업하고 마는데, 그 재고 상품을 전부 인수한 곳이 바로 신행상회였다. 신행상회는 초창기 다른 경쟁 업체보다 자본이나 판로, 경영진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가장 열세였다. 그러나 신태화의 높은 기술력과 착실한 경영이 경쟁상대를 제치고 이 분야의 선두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수공업자로서 자신의 공장을 운영하고 유통부문에 진출하여 상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후 신태화는 1918년 신행상회에 출자하였던 김연학의 아들 김석규에게 넘기고, 남대문통을 떠나 종로2정목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광신상회(廣信商會)를 차렸다. 그러나 광신이라는 상호가 부적합하다며 화신상회(和信商會)로 이름을 바꾸었다.86) 『매일신보』 1918년 3월 20일, 21일, 23일, 29일, 30일자 화신상회 광고. 화신상회는 1919년 2개의 쇼윈도우를 갖춘 서양식 2층 건물을 신축하고, 1921년에는 포목부와 잡화부를 설치하면서 경영을 확대해 갔다. 백화점의 꿈을 키워 간 것이다. 그러나 1929년 이후 대공황으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자,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박흥식의 자금을 쓰게 되었다. 결국 화신상회는 박흥식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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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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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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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15세 되던 해 고향에서 미곡상을 시작하였다. 18세기 되던 해에는 선광당(鮮廣堂) 인쇄소를 설치해 본격적인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1924년에는 이 인쇄소를 성광인쇄주식회사로 개칭하였다. 이후 그는 종이 판매에 뛰어들어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거대 기업가로 성장하였는데, 1931년 신태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였던 것이다. 그 뒤 박흥식은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유통업계의 총아’ 화신백화점을 열었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의 미스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字屋], 히라다[平田] 등 일본 백화점이 조선 사람들의 이목을 끌던 때였다. 이에 화신백화점은 조선인 경영 자본의 백화점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흥식이 화신상회를 인수한 자금이 한성은행, 식산은행, 조선은행 등에서 어음할인으로 대출 받은 돈이었고, 이후에도 일본은행의 후원이 있었다는 점에서 혹평을 받기도 한다. 근대 경제를 자기 주체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빛과 어둠의 양면성이 아직 걷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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