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2. 위생과 체육의 시대
  • 양생에서 위생으로
심승구

조선 사회는 19세기 중엽에 개항한 후 봉건 사회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고, 외세의 도래에 직면하여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특히, 밀려드는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강자가 되려면 신문화를 수용해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이루는 과제를 피할 수 없었다.9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80년대부터 사회진화론이 소개되어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서구 열강과 조선의 상황은 사회진화론적 원리에 나온 것으로, 조선이 서구 열강의 침략 대상이 된 것은 생존 경쟁, 優勝劣敗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대를 생존 경쟁이 지배하는 弱肉强食과 우승열패의 시대로 파악하는 분위기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서 서구 문물을 도입하는 개화와 스스로 힘을 기르는 자강이 민족 전체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서구 열강보다 열세라는 인식은 조선 민족의 힘을 양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체력을 길러 국력을 키우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지만 힘의 논리는 조선 민중 개개인의 건강과 체력을 양성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하였다. 우생학적(優生學的)으로 건강하고 튼튼한 몸 만들기가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 가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위생(衛生)은 근대의 문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다.

각국의 가장 요긴한 정책을 구한다면, 첫째는 위생이요, 둘째는 농상(農桑)이요, 셋째는 도로인데, 이 세 가지는 비록 아시아의 성현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라고 해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 내가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 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인가 …… 현재 구미 각국은 그 기술의 과목이 몹시 많은 중에서도 오직 의업을 맨 첫머리에 둔다. 이것은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기 때문이다.95) 김옥균, 「治道略論」, 『漢城旬報』 1884년 7월 3일자.

개화 지식인들은 문명개화의 척도로 위생을 전면에 내세웠다. 서구 여러 나라가 문명국이 된 힘의 원천을 건강한 백성에서 찾고자 하였다. 또 건강한 백성이 곧 국력이고 그 힘을 기반으로 문명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질병을 제거해야 인구도 늘고 부강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의 존재가 허약할 때, 유일하게 가동할 수 있는 에너지는 인적 자원뿐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위생이 이처럼 강조된 것은 비위생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결한 도로와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은 질병을 일으켜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더욱이 개항 이후 새로운 전염성 질환이 유입되고 퍼져 나가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특히, 1879년(고종 16) 7월 전국에 걸쳐 전염병이 돈 이후 1891년(고종 28), 1895년, 1902(광무 6) 등에 걸쳐 ‘호열자(虎列刺),’ ‘쥐통,’ ‘서병(鼠病)’이라 불린 콜레라(cholera)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러자 유길준은 『서유견문록』에서 “전염병이 전쟁보다 더 무섭다.”라고 할 정도로 위생 사업의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질병은 비위생에서 오는 것일 뿐 아니라 체력의 부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체력을 충실하게 만드는 일은 곧 국력을 강하게 하는 기반이었다. 국민의 ‘체력이 곧 국력’이라는 근대적 신체관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위생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불결과 비위생적 환경을 제거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개천 정비, 길가에 대소변 금지, 물 끓여 먹기, 개천 물로 채소 씻기 금지, 노숙 금지, 아이들 발가벗고 다니지 못하게 하기, 술집에 모여 술과 푸성귀 먹고 좁은 곳에서 끼여 앉아 호흡하지 못하게 하기, 도성 안에 몇 군데 큰 목욕집을 설치해 가난한 인민 목욕하기, 반찬 가게와 판에 상한 고기와 생선 판매 금지, 순검(巡檢)들이 순찰하여 더러운 물건 치우고 개천 청소하게 하기 등이었다.96) 『독립신문』 1896년 6월 27일자 논설. 위생 상태의 열악함을 국력 열세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이다. 백성이 병이 없어야 나라가 강해지고, 백성이 건강해야 인구가 늘며, 인구가 늘어날수록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위생이 궁극적으로 국력이 된 셈이다. 이를 위해 1885년(고종 22)에는 광혜원(廣惠院)을 비롯한 근대적인 의료 기관을 세우는 한편, 전염병 예방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중앙에 위생시험소를 설치하는 한편, 각 지방에 위생회를 결성하여 위생에 대해 관심을 환기시켰다. 서울에 목욕탕을 설치하여 목욕을 권장하고,97)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2일자 위생 설욕. 각 학교에서는 위생을 위해 학생들에 대한 신체검사가 실시되었다.98)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4일자 신체검사. 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층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이 위생이고 그 다음이 학문과 도덕이라고 할 정도로 위생은 가히 절대적이었다.99) 「학생의 규칙 생활」, 『태극학보』 14, 1907년 10월.

이 무렵에 나온 여러 잡지에서 ‘위생부’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위생학을 소개하거나 위생 문제에 대한 계몽을 실시한 것도 그 같은 분위기를 잘 말해 준다. 이처럼 위생 사업은 비위생적 환경 제거 운동에 과학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 되었다. 위생 문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과학적인 인식을 보급시킨 것은 비위생적인 환경만을 제거하려는 노력보다 한 걸음 진전한 것이다.

위생 관리와 함께 추진해야 할 일은 대중의 체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 속에서 국권을 지키고 국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비위생적인 환경을 제거해 건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였고, 좀 더 적극적인 체력 양성책이 필요하였다. 체력을 양성하기 위한 논리는 우선 전통적인 건강 관리법에서 찾으려 하였다.

공자와 다른 옛 성인들도 몸을 강장하게 하라고 교훈하셨으니, 몸을 강장하게 하여 심장을 단단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려면 체조를 불가불 할 터이오.100) 『독립신문』 1896년 6월 25일자 논설.

이제까지 유학자들은 몸을 기르는 방법으로 세종대(1419∼1450)의 바라문 안마법(婆羅門按摩法)과 이황(李滉, 1501∼1570)의 활인심방법(活人心方法) 등 의료 체조라 할 수 있는 양생법(養生法)을 실천해 왔다. 양생이 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운동임을 이미 강조한 것이다.

다만, 양생은 대중에게까지 보급된 건강 관리법은 아니었다. 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양생법이 여기서 그치지는 않았다. 군사 훈련을 위한 각종 무예, 세시적인 놀이, 오락 등 다양한 체력 관리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무예나 놀이는 개인의 건강이나 즐거움을 위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국가 체제나 왕실의 안정 내지 공동체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큰 것이었다. 개개인의 신체 활동 역시 자유롭게 표현하기보다는 질서와 조화를 위해 삼가고 절제할 것을 요구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적인 제약을 벗어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교육은 문약성(文弱性)을 초래하여 급기야 서구 열강의 압 력을 받아 국가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었다. 반면, 서구 열강이 아동 때부터 체조를 가르쳐 국민 체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한다는 사실이 곧 국력 차이의 원인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문 위주의 교육이 국권을 상실한 주원인이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체육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었다.101) 첫째 체육이다. 이것은 넓은 장소에서 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9세가 되면 한창 크고 자랄 나이인데 종일 문을 닫고 방 안에서 꾸벅이며 글을 읽어서 되겠는가.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우울해지고 타성이 생겨 게을러지게 된다. 비유하건대 담장 밑에 그늘진 곳의 풀은 결국 약하게 되고 어항에 있는 물고기는 결국 말라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루 한 시간 정도는 수족에 힘을 주어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해서 그 지기를 펴고 혈맥을 유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을 일컬어 ‘체조’라 하는데, 체조는 신체를 건전하게 하는 공부인 것이다(李沂, 『海鶴遺書』 권3, 一斧劈破論). 개화기 근대적 체육 사상과 몸에 대한 인식은 민족 내부의 필연적이고 절실한 요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동시에 교육 사상의 한 갈래로 체육 사상이 도입되었다.

개화 초기에는 서구의 교육 사상 내지 신체관을 수용하여 보급하는 데 1차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근대 교육의 3요소라고 하는 덕육(德育), 체육(體育), 지육(智育)의 등장은 바로 이를 잘 말해 준다. 체육은 몸을 움직임으로써 유쾌한 감정을 기르고, 건강함을 유지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목적을 둔 신체 교육이다.

체육은 기존에 소수의 양생에서 다수 대중을 위한 위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위생과 불결한 환경에서 벗어나 질병 없는 깨끗한 몸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몸은 이처럼 신체를 건강하게 하며 질서를 존중하고 명령에 복종하여 참고 견디는 성격의 몸을 기르는 데 있었다. 양생에서 위생으로의 변화는 근대 초기에 전개한 국민의 몸만들기 과제의 첫 번째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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