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2. 위생과 체육의 시대
  • 위생에서 구국까지
심승구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계기로 반식민지로 접어든 상태에서 조선의 체육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개인의 건강 증진을 위한 위생 체육에 중요성을 두던 체육이 국권을 상실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구국 체육으로 전환한 것이다. 또한, 우승열패(優勝劣敗), 생존 경쟁 같은 중국 량치차오[梁啓超]의 사회진화론이 확산되면서 ‘교육이 국가 자강의 기초‘라는 사상은 교육과 체육을 통한 구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군사 훈련으로 변화한 체육 활동은 병식 체조(兵式體操)를 중심으로 구국 체육이 실시되었다.

먼저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9일자 기사의 제목에 ‘덕(德)·지(智)·체(體) 삼육(三育)에 체육이 최급(最急)’이라고 한 것은 체육의 비중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저 덕·지·체 3자에 사람이 그 하나를 버리면 사람이라 말하기 어려우며, 나라가 그 하나를 버리면 나라라 부르기 어려우니, 고로 이를 교육의 3요소라 이르는 바라. 그런즉 이 3육 가운데 무엇을 있게 하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중하게 하며 무엇을 소홀히 하겠는가마는 공자가 말하신 족식(足食), 족병(足兵), 믿음, 3자에 부득이 그 하나를 버릴진댄 병·식을 버린다 함과 같이 만일 이 삼육을 가히 겸하지 못한다면 지·덕을 버리고 체육을 취할지니.102)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9일자.

이 글에서는 체육이 덕육과 지육보다 더 시급함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지육이 체육만 같지 못하다’라 하여,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종전까지 체육을 경시한 데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반식민지 상태로 접어들기 얼마 전까지 체육을 덕육과 지육과 함께 교육의 3요소로 처음 인식한 것과 비교할 때 큰 변화였다. 체육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한 까닭은 신체의 건강이 인간 생활의 행복을 주는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체육이 우리나라 근대 교육에서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시작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운동이 ‘사 람의 귀중한 생식’이요, ‘불건전한 신체를 회복하는 명약’이라는 표현처럼 체육의 중요성은 나날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체육이 인간 생활 중 ‘행복의 기초’라는 인식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인식과 함께 근대 신체관 내지 체육관의 가장 중요한 인식체계로 자리잡아 나갔다.103)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가 로마 시민의 정신적 타락을 경계하여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는 지적을,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변형시킴으로써 본래의 뜻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근대의 신체관을 잘 표현해 준다.

서양 철학의 말에 건전한 신체 중에는 건전한 정신이 첩재(疊載)한다 하였으니, 간단한 이 말 중에 무한하고 지극한 이치가 포함하였도다. 무엇이오. 이 20세기는 우승열패하는 경쟁시대라 …… 문명국은 지덕만 있을 뿐 아니라 체력을 겸비하야 평시에는 건전한 신체로써 사회적 사업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활약하는 신체로써 군국적(軍國的) 의무에 헌신하야 자국을 발전케 하나니, 이는 도시 체육의 공과라 하리도다. …… 아, 대한독립의 기초는 국민에게 체육을 장권(奬勸)함에 있다 하노라.104) 최창렬, 「체육을 권고함」, 『태극학보』 5, 1906년 12월.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체육의 권장이 곧 대한제국 독립의 기초라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개항 이전까지 국가 의식은 국가가 곧 임금과 같은 것이며, 백성은 통치의 대상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서구의 근대 사상이 들어오면서 임금의 권리와 동등한 차원에서 민권(民權)이 거론되어 국가의 인식이 변화하였다. 국가는 개인의 집합체이므로 개인 체력의 강약 여부가 곧 국력의 강약과 비례하였다.

더구나 국권 상실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체육은 곧 국가를 지켜낼 수 있는 무력이자 독립의 수단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하여 1906년(광무 10) 이후 체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계몽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이른바 ‘위생의 시대’에서 ‘체육의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체육을 무력의 기초로 보았던 이 시기에는 행복의 기초로써 건강 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국가보전과 자주독립을 위한 정신력과 힘을 가장 우선으로 여겼다. 체육이 국권 회복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가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체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담론(談論)이 쏟아져 나왔다. 그 하나가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의 ‘체육론’이다. 그는 민족의 체육 발전을 위해 최초로 체육 학교를 설치할 것과 체육 교사 양성, 체육 연구를 위해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105) 문일평, 「체육론」, 『태극학보』 21, 1908년 5월. 또한, 유근수(劉根洙)는 신문 기고를 통해 체육 학회와 공동 운동장의 설치를 주장하였다.106) 유근수, 「논체육설」,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5일자. 이종만(李鍾萬)도 ‘체육이 국가에 대한 효력’이라는 논설에서 체육이 정신적 국민을 양성하는 근본이고, 국민의 단합력을 발생케 하는 원인이며, 국가 자강의 기초라고 파악하였다.107) 이종만, 「체육이 국가에 대한 효력」, 『서북학회월보』 6, 19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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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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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가 조원희가 펴낸 『신편유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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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오직 힘으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체육이 지닌 보편적 가치인 행복의 기초이자 개인의 건강과 삶의 질을 반영하는 특성은 접어 두고 우선 국가적·민족적 입장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근대 체육은 개개인의 몸의 가치를 중시하기보다는 집단적·전체적 몸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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