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3. 규칙 있는 장난, 스포츠의 등장
  • 체양의 탄생과 학교체육
심승구

개화를 통해 근대 문명국가를 모색하던 조선정부는 교육을 통한 자강의 길을 찾으면서 정신 교육과 신체 교육을 균형 있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108) 우리나라가 근대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81년(고종 18)에 유학생을 파견하면서부터이다. 같은 해 1월에는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들 사행 중 그대로 일본에 남아 수학한 유길준, 윤치호, 유정수 등이 최초 유학생이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영선사를 청나라에 파견하였고, 김윤식 아래 유학생 38명을 함께 보냈다. 1895년(고종 32) 2월 2일 고종이 교육 조서에서 교육의 3대 기강으로서 덕양(德養), 체양(體養), 지양(智養)을 공포하면서 ‘체양’이라는 신체 교육의 중요성을 천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109) 원래 신식 학교에 대한 건의는 1883년경부터 정부 내에서 이루어졌다(『한성순보』 1883년 12월 20일자 大臣次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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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고종이 내린 교육조서
1895년 고종이 내린 교육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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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양이란 것은 동작을 떳떳하게 함이니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위주로 하여 게으름과 안일함을 탐내지 말고 괴롭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말며, 근육을 튼튼히 하고 뼈를 꿋꿋하게 하여 건강하고 병이 없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110) 『관보』 개국 504년 2월 2일자(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8, p.411).

근대 교육의 전기가 된 교육 조서는 기존의 교육에서 거의 등한시하던 체육의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기록이다. 수신이나 수양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고 기르던 유학 교육 방식이 근대식 교육 체계의 지육, 덕육, 체육으로 분리된 것이다. 그러자 체육에 걸맞은 조선식 용어가 필요하였다. 체양은 근대적인 신체 교육을 의미하는 주체적 용어로서, 체육을 대신한 표현이었다. 체양의 선언은 그전까지 개개인에게 맡겨진 신체의 건강을 국가가 교육 체계를 통해 제도적으로 양성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 교육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개화의 모습이자 자강의 방편이었다.

신체에 대한 교육이 새로운 교육 체계 내에 포함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서구 열강이 체육을 강조하던 현실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의학과 생리학(生理學)이 발전하고 사회 진화론이 대두하면서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생학적 담론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체육에 대한 관심이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상이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개화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어 개화사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111) 첫째, 사회진화론의 영향이다.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에 유길준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소개하였다. 유길준은 당시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모스(J. Morse)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귀국하여 『競爭論』·『西遊見聞』을 발표하여 인간 사회는 경쟁을 통하여 진보한다는 의식을 피력하였다. 1890년대에는 梁啓超의 저작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그의 근대적 체육사상은 조선의 체육관 발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뒤에서 얘기하듯이, 조선의 위기가 커질수록 그 원인과 진단은 사회진화론의 논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둘째,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선교사들은 188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하게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유희 시간을 두어 근대 스포츠를 우리 사회에 도입하였다. 儆新學校의 전신이던 언더우드학당에서 1891년 교과목 개편 이후 매일 1교시에 30분의 체조 시간을 할당하였다. 또 최초의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서 야구, 축구, 정구, 농구 등의 팀 스포츠가 과외 활동으로 실시되었다. 1890년대 말 한성외국어학교의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던 일련의 운동회는 근대 스포츠의 발전 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학교에서의 체육은 곧 병식 체조 내지 보통 체조였다. 병식 체조는 1895년 최초의 학제를 공포한 이후 1909년(융희 3) ‘학교령’을 개정하여 공포할 때까지 학교 체조의 중심이었다. 특히, 중등학교는 병식 체조가 중점적으로 교수되었다. 병식 체조가 학교 체육의 중심이 된 이유는 체조 교사로 부임한 사람들이 대부분 군인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병식 체조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군대 훈련 형식과 유사하였다. 따라서 체육이 신체의 정상적 발달과 건전한 정신의 함양을 이루기에는 한계점이 많았다.

연래(年來) 지방 학교의 체조 교사가 오로지 병식(체조)을 조박(糟粕)으로 신체가 발달하지 않은 아동을 교련하므로 체육의 본의를 잃는 자가 많더니, 휘문의숙 체조교사 조원희 씨가 미용술, 정용술(整用術), 신식 체조법을 발간하므로 일반 학도의 체조가 이를 쫓아 완전함을 가히 얻음이라 칭하는 자가 많더라.112) 『황성신문』 1909년 1월 29일자.

위의 내용처럼 병식 체조는 아동의 신체적 특징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병식 체조는 체육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병식 체조의 강행은 학생들에게 체조 시간을 기피하는 풍조를 낳게 하였다. 실제로 학생들이 체조 시간을 기피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체조 기피에 대한 처벌로 퇴학이라는 가장 엄한 징계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에 병식 체조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체조 강습회를 열어 새로운 내용의 체조를 보급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병식 체조가 학교에서 체조 수업으로 채택된 까닭은 국권 상실의 위기 속에서 민족을 지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113) 이후 학교 교육에서 체조의 종류에는 병식 체조와 보통 체조가 있었다. 다만, 병식 체조를 많이 하였다. 이는 체조 지도자가 없고, 군인들이 체조를 가르쳤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또한, 병식 체조가 건강은 물론 튼튼한 국민 체력을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학교 체육에서 위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희라 할 수 있는 오락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아이들이 단체로 즐길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근대 체육은 19세기 중엽 개항 이후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성립되었다.114) 서구의 근대 스포츠가 우리나라에 선보인 것은 이미 조선 후기 청나라를 통해서였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조선 사신들은 청나라에서 새로운 스포츠를 목격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청나라에서 본 스케이트이다. 당시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체양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서구의 phisical education이 일본에서 체육으로 번역되었다가, 체육이 조선에서는 체양으로 불린 것이다. 체양이든 체육이든 이 말은 몸을 기르는 것이고 곧 체조나 운동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다만, 체양이라는 용어는 분명히 체육의 조선식 표현이었는 데도 체육이라는 용어가 확산되면서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된다. 물론 ‘지교’, ‘덕교’, ‘체교’라고 해서 체교라는 표현도 등장하지만, 일본에서 들어온 ‘체육’이라는 용어가 더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체양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지 못하였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조선 내의 지배력이 확산되면서 체육이라는 용어가 자리잡아 나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체적인 용어로 탄생한 체양은 국권상실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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