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3. 규칙 있는 장난, 스포츠의 등장
  • 규칙있는 장난, 스포츠의 등장
심승구

위생이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라면, 체조를 비롯한 운동은 체력을 단련하는 방법이다. 팔과 다리를 비롯한 몸을 움직이는 모든 신체활동이 곧 운동이다. 운동에는 다양한 신체 활동과 경기가 포함되어 있다. 운동이 신체의 움직임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독립신문』 논설이 잘 보여 준다.

운동이라는 것은 아무 일이라도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운동이니 걸음 걷는 것과 나무 패는 것과 공 치는 것과 말 타는 것과 배 젓는 것이 모두 운동이니, 자기와 형세대로 아무나 운동을 할 터이오. …… 매일 사람마다 운동을 몇 시간 동안씩 하고 저녁에 목욕을 하고 자면 첫째는 밤에 잠을 잘 자니 좋고, 둘째 음식이 잘 내릴 터이니 체증이 없을 터이라.115) 『독립신문』1896년 6월 21일자 논설.

운동에는 걸음걸이, 장작 패기, 공 치기, 승마, 노 젓기 등 모든 신체 활동이 포함된다고 하면서 매일 몇 시간씩 자기의 신체와 조건에 맞게 운동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운동 후 목욕하는 것이 숙면과 소화에 도움을 주고, 체하는 문제를 막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운동에는 단순히 걸음걸이 같은 움직임부터 노동을 위해 이루어지는 신체 활동, 아무런 목적 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놀이 활동, 체조같이 신체의 조화로운 발달과 균형을 목적으로 하는 신체 활동, 경쟁을 통해 승부를 가리는 운동 경기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원래 조선의 전통적인 신체활동으로는 이황의 활인심방법이나 바라문 비법과 같은 양생법이 존재해 왔다. 이것은 주로 유학자들이나 선승들의 건강 관리법으로 발달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구 의 근대식 체조가 들어오면서 개개인의 건강 관리법인 전통 체조법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근대식 체조는 개개인의 건강 관리법인 동시에 집단적인 건강 관리 방식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체조는 개개인의 건강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집단적인 체력 관리를 위해 활용되었다. 오히려 개개인의 건강보다는 전체 학생이나 국민의 체력 관리를 위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생이 근대적인 몸을 만드는 준비과정으로 기능하였다면, 체조를 통한 체력의 단련은 근대적인 몸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신체활동으로는 체조법 이외에 ‘놀이’ 또는 ‘무예’라는 영역에서 행해졌던 신체 활동이 있어 왔다. 특히, 무과를 비롯한 각종 시취(試取), 취재(取才), 연재(鍊才) 등의 시험은 일정한 규칙 속에 경쟁력 있는 신체 활동을 벌였다. 또한, 각종 놀이 가운데서도 상대편과 경쟁을 하거나 힘을 겨루기는 놀이 문화도 경기적인 신체 활동이었다. 이러한 경기적인 형태의 신체활동은 근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활쏘기, 씨름, 줄다리기 등의 세시적 놀이는 점차 전통적인 경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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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구의 선교사들이나 외교관 또는 해외 유학생들은 근대적인 스포츠를 들여왔다. 축구, 야구, 농구, 자전거 타기, 정구(庭球, 테니스), 육상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운동을 하되 규칙에 근거하여 경쟁하는 운동 경기를 당시 서구에서는 ‘스포츠’라고 불렀다. 하지만 구한말에 스포츠라는 말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체조, 운동이라는 용어와는 달리 운동 경기를 새롭게 나타내는 흥미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바로 ‘승벽(勝癖) 있는 장난’ 또는 ‘규칙 있는 장난’이 그것이다.

나라마다 승벽 있는 장난들이 있어 아희들과 젊은 사람들이 이런 장난을 하여 버릇(습관)하여야 힘도 세어지고 마음도 단단해지며 여간해서 아프고 여간해서 위태함을 무릅쓰고 견디는 힘이 생기는 것이라 .…… 만일 사람의 몸이 약하면 마음이 약하여지는 것은 학문상에 분명한 일이라.116) 『독립신문』 1897년 2월 20일자 논설.

우선 학문도 배우려니와 몸이 굳세게 되기를 공부하는 것이 매우 급선무이니, 지각 있는 사람들은 운동을 하며 규칙 있는 장난을 시간을 정하여 놓고 매일 얼마큼씩 하여 몸을 험히 가지고 여간 위태함과 괴로움과 아픈 것을 견뎌 버릇하며…….117) 『독립신문』 1897년 2월 20일자 논설.

뚜렷한 승부욕이나 경쟁의식 없이 건강을 위해 행하는 운동과 달리, 승부를 겨루거나 규칙을 세워 장난하는 신체 활동을 곧 스포츠라고 본 것이다. 규칙있는 장난으로 상징되는 신체 활동이 스포츠를 대하는 19세기 조선의 인식이자 반응이었다. 오늘날 흔히 규칙을 지키며 경쟁하면서 즐기는 신체 활동을 스포츠라고 부른다. 운동 경기가 곧 스포츠인 것이다. 이러한 스포츠를 19세기 말 우리는 ‘승벽있는 장난’ 또는 ‘규칙있는 장난’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점차 스포츠라는 용어가 확산되어 나갔다.

당시 조선인에게 스포츠는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다. 계몽 활동을 펼치던 개화 지식인들마저 서양인이 정구하는 광경을 보고, “이같이 무더운 날에 손수 공을 쳐서 무엇하오. 하인이나 시키지……”라고118) 나현성, 「근대 체육의 도입」, 『한국 현대사』, 진명문화사, 1976. 한 것을 보면 당시 스포츠에 대한 반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체육에 대한 몰이해는 여성의 체육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병풍을 치고 남녀 학생이 수업을 듣는가 하면, 이화학당에서는 맨손체조를 가르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이화 출신은 며느리로 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였다. 심지어 황제가 참석한 자리에서 열린 여학생들의 어전운동회(御前運動會)를 여 학도들이 불순하게도 반나체로 요염과 교태를 부렸다고 비판하는 상황이었으니,119) 이규태, 『개화 백경』, 신태양사, 1969. 여학생의 체육 활동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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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의 체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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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인 스포츠가 등장하면서 체육은 이제 스포츠를 포함하게 되었다. 개화기는 전통 체육이 위축되는 분위기 속에서 근대 체육이 화려하게 등장한 시기였다. 근대 체육은 서구인들에 의해 첫 선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주로 학교 체육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회를 통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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