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과 문명개화의 일환으로 시작된 근대의 몸 프로젝트는 학교 체육에서 출발하여 사회 체육의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학교에서 도입한 몇 가지 스포츠 종목이 운동회를 통해 학생과 일반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운동회는 1896년(건양 1) 5월 2일 동소문 밖 삼선평(지금의 삼선교)에서 이루어졌다. 영어학교 교사 허치슨(Hutchison, 轄治臣)의 지도로 소풍을 간 학생들이 야외에 서 운동회를 하였다.
영어학교 교사와 학도들이 이달 이튿날 동소문 밖으로 화류(소풍)를 갔다. 오랫동안 학교 속에서 공부하다가 좋은 일기에 경치 좋은 데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장부에 운동을 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한 일이다. 다만, 마음과 지각만 배양하는 것도 매우 소중한 일이요, 몸 배양하는 데는 맑은 공기에 운동하는 게 제일이요, 목욕을 자주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제일이다.120) 『독립신문』 1896년 5월 5일자.
이 운동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열린 것이다. 당시 어떤 운동을 하였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듬해인 1897년 6월 훈련원에서 거행된 영어학교 대운동회를 통해 그 윤곽을 확인해 볼 수 있다.
6월 16일 오후 4시 30분에 영어학교 학생들이 훈련원 안에서 대운동회를 열었는데, 각국 공·영사와 정부 국무대신 및 그 외 고등관들과 외국 신사들을 청첩하였다. 훈련원 주위에는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위에 붉은 기를 많이 꽂아 관람자가 무단히 출입 못하게 하고, 대청은 많은 의자와 탁상이 놓여 있어서 거기에는 다수인의 내빈들을 착석하게 하고, 입구와 대청 앞은 태극기, 미·영 등의 국기로 다채롭게 장식하였다. 총을 멘 학생들의 행진이 있은 후 각종 경기가 전개되었는데, 영국 공사관 서기관 윌리스 씨가 사령관이 되고 영국인 교사 터너 씨와 허치슨 씨가 심판관이 되고 핼니픽스 씨가 서기관이 되어 경기를 질서 있게 진행하였다. 대청에 임석한 내빈은 서울에 있는 각국 공·영사 및 그의 부인들과 우리 관인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이날의 경기 종목은 300보 경주(청소년, 내빈의 종목도), 600보 경주, 1,350보 경주, 공 던지기, 대포알 던지기(투포환), 멀리뛰 기(주폭도), 높이뛰기(주고도), 두 사람이 세 다리 달리기(2인3각), 당나귀 달리기 경주(20필 참가), 동아줄 끌기(12인조)로 되어 있고, 시상은 1, 2, 3등으로 되어 있다.121) 『독립신문』 1896년 5월 5일자.
초창기 운동회에서는 각종 경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학생들의 제식훈련(制式訓鍊)을 하였다. 운동회가 그동안 익힌 병식 체조를 통해 육성된 씩씩한 문명인을 내외 귀빈에게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제식행진은 경기에 앞서 전개되는 빠질 수 없는 운동회 행사의 하나였다. 운동회의 경기는 크게 육상 종목과 오락 종목으로 구분된다. 육상 종목은 300보, 600보, 1,350보, 투포환,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이었고, 유희적인 오락이자 전통 놀이를 스포츠화한 종목은 2인3각(두 사람이 발을 묶어 세 다리로 뛰기), 당나귀 경주, 줄다리기 등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시상식이 벌어졌는데, 영국 총영사 부인이 호명하여 명예의 상품을 각 우승자에게 관중의 박수갈채 속에 수여하였다. 당시 함께 준 상품은 은시계, 시계 줄, 장갑, 은병, 주머니칼, 명함갑 등 값비싼 물품이었다. 이들 상품은 내외 유지들이 300원을 모아 중국 상하이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운동회는 학생들을 지도한 외국인 교사를 치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1천여 명의 귀빈과 관람자는 일몰 후에 돌아갔다. 운동회를 본 사람들은 영어학교를 칭송하고 이러한 학교가 많이 생기기를 바랐다. 또 학생들이 진보해 가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학생들은 황제 폐하를 위해 만세 삼창을 불렀고, 선생님과 내빈들을 위해 갓을 벗고 천세(千歲)를 불렀다.122) 『독립신문』 1897년 6월 15일, 19일자. 대운동회는 관람자들에게 조선 민족의 진취성과 패기만만한 민족정기를 보여 주는 자리였다.
학교 체육이 발전함에 따라 운동회가 계속되었고, 새로운 스포츠 가 꾸준히 소개되었다. 날이 갈수록 많은 대중들은 스포츠를 지각인의 운동이요 문명화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그에 따라 스포츠는 더욱 활기를 띠었으며, 운동 종목이나 규모, 횟수 등도 점점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추세를 반영한 종목들이 운동회를 통해 도입되었다.123) 1898년 5월 28일에는 관립외국어학교 연합 운동회가 역시 훈련원에서 개최되었다. 100보 경주(청소년부), 200보 경주, 400보 경주, 넓이뛰기(멀리뛰기), 높이뛰기(청소년부), 철구, 씨름, 당나귀 경주로 되어 있다. 육상의 步數는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영어학교 운동회를 시초로 이후 매년 각 학교에서는 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연합 운동회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당시 경기는 매우 무질서하여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다. 선수는 고사하고 심판원조차 운동 정신이 결핍되고 경기 규칙에 미숙하여 정실(情實) 또는 오심으로 분쟁과 시비가 비일비재하였다.
(한성 사범학교원 최정덕), 관립 소학교 대운동 시에 행위 괴당(乖當)하야 교육상 관계가 심대하므로 이로 인하여 봉급 10일치를 벌로 내렸다. (관립 소학교원 김성진), 관립 소학교 대운동 시에 몸을 잡고 삼가지 못하여 교사의 품위를 잃은 것이 심대하므로 봉급 10일치를 벌로 내렸다.124) 『독립신문』 1898년 5월 31일자.
관립 소학교원 홍성천, 한명교, 박치훈, 관립 소학교 대운동 시에 행동을 삼가지 못하여 교사의 체면을 손상했으므로 견책함, 이상 6월 일 학부125) 『관보』 제344호, 1896년 6월 5일자.
개화기 학교 체육과 운동회, 각종 스포츠를 보급하는 데는 허치슨, 핼리팩스(Hallifax, 奚來百士), 계상, 마르텔(Martel, 馬太乙, 프랑스어 학교 교사), 질레트(Gillet, 吉禮泰, 황성 중앙 기독 청년회 총무) 등의 노고가 매우 컸다. 그 가운데 허치슨은 학교 체육을 통해 다양한 운동 경기를 가르치는 동시에 운동회를 개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1899년(광무 3) 5월 2일에 대한제국 정부는 허치슨에게 종2품 금장을 수여하였다.126) 『황성신문』 1905년 5월 26일자. 근대 이후 교육에 대한 공로로 포상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표> 개화계몽기 운동회의 개최 현황127) 이학래, 『한국 근대체육사연구』, 지식산업사, 1990, p.61.
| 개최년도 | 주최 및 주관처 | 계 | ||
| 학교 | 사회단체 | 기타 | ||
| 1896년 | 2 | 1 | 3 | |
| 1897년 | 3 | 3 | ||
| 1898년 | 1 | 1 | ||
| 1899년 | 4 | 2 | 6 | |
| 1905년 | 2 | 2 | ||
| 1906년 | 14 | 2 | 16 | |
| 1907년 | 24 | 2 | 2 | 28 |
| 1908년 | 65 | 6 | 13 | 84 |
| 1909년 | 15 | 1 | 4 | 20 |
| 1910년 | 22 | 51 | 8 | 35 |
| 계 | 150(76.7%) | 18(7.9%) | 30(15.4%) | 198(100%) |
운동회는 1896년(고종 22) 이래 1899년(광무 3)까지 학교를 중심으로 점차 활성화되는 듯하다가 1899년 이후부터 1905년까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자료의 미비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추정된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부터 운동회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팽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운동회가 단순히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당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국권 회복을 위한 염원을 담은 행사였음을 말해 준다.
1908년(융희 2) 5월 21일에는 순종 황제가 황후와 함께 창경궁에 나가 운동회를 구경하였다. 당시 각 학교의 학도와 여학도 가운데서 예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서 연합 운동회를 거행하였다. 이때 황실 사람과 문무 관리와 부인이 함께 참관하였으며, 내각의 각 대신이 부인과 함께 구경하였다.128) 『순종실록』 권2, 순종 1년 5월 21일. 이듬해인 1909년 4월 30일에는 시종(侍從) 이명구를 보내어 수학원(修學院)의 운동회에 칙서를 전달하면서 돈 100원을 하사하였다.129) 『순종실록』 권3, 순종 2년 4월 30일. 같은 해 5월에는 황제가 북일영(北 一營)에 나가 관립고등여학교의 운동회를 구경하였다. 황족과 대신의 부인과 함께 참관한 것이다.130) 『순종실록』 권3, 순종 2년 5월 12일.
이와 같이,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반식민지 상태로 접어들어 가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체육은 이제까지 자주적 근대 민족 국가의 수립이라는 목표와는 달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려는 체육 활동 내지 군사 체육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그러자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는 학부 주최의 연합 운동회를 재정난을 빙자하여 중지시켰다. 그럼에도 운동회는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 직후인 1912년 5월 운동회에서 불상사가 생긴 것을 이유로 운동회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근대 체육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던 운동회는 먼 훗날 국권을 찾기 위한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 체육의 근대화와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