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4. 근대 대중여가의 공간과 활동
  • 목욕탕과 이발소
심승구

개항 이후 서구인의 시각으로 본 조선 사회는 우선 깨끗하고 말끔함을 회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공간이 대중목욕탕과 이발소였다. 이식된 근대화의 풍광인 목욕탕과 이발소는 위생과 청결의 상징이자 문명인이 되는 통로였다. 그 전까지 목욕은 집 안이나 냇가에서 하였다. 병자의 경우는 온천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반이나 부유한 이들과 달리 가난한 백성은 목욕을 자주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1896년(건양 1)에 가난한 인민들의 목욕을 위해 도성 안에 목욕집을 설치하자는 움직임이 처음 제기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131) 『독립신문』 1896년 6월 27일자 논설.

조선인 가운데 가난한 인민들이 목욕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실은 서구인의 시야에 조선인이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것으로 비쳐졌고, 질병의 원인으로 인식되었다.

대한 사람은 목욕을 자주 아니하여 병이 자주 나니 이왕에 지는 일은 말할 것 없고 목욕시킬 방책을 강구함이 급무다.132) 『독립신문』 1899년 2월 7일자 논설.

이처럼 질병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는 청결이 우선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몸을 배양하는 데 맑은 공기에 운동하는 게 제일이요, 목욕을 자주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하여 목욕을 권장하는 목소리가 커지지 시작하였다. 목욕은 개인이 부지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위생법으로 인식되었다.

목욕하는 일은 다만 부지런만 하면 아무라도 이틀에 한 번씩은 몸 씻을 도리가 있을 터이니 이것을 알고 안 하는 사람은 더러운 것과 병나는 일을 스스로 취하는 사람이다.133) 『독립신문』 1899년 6월 21일자 논설.

불결함과 질병을 막기 위해서는 이틀에 한 번씩은 목욕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중목욕탕이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를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0년(광무 4) 동래에서는 온천을 개발하면서 공중 목욕 시설이 생겨 오늘날 대중목욕탕의 시초가 되었다. 1901년에는 서 울의 도심 목욕탕에 한증막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 신문은 무교동에 위치한 취향관(翠香館)에서 목욕탕에 한증막을 처음으로 설치한 후 이를 소개하는 광고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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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장 대욕장통 풍경
동래온천장 대욕장통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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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취향관에서 음력 7월 17일부터 목욕탕을 정결이 수리하고서 한증막을 처음 설치했으니, 첨군자(僉君子)는 내임하시기를 바람. 취향관 고백(告白)134) 『황성신문』 1901년 8월 27일자.

한증막을 설치한 취향관은 1901년 8월 27일부터 9월 28일까지 모두 23차례에 걸쳐 신문 광고를 내어 손님을 유치하였다. 이듬해인 1902년 4월 18일부터 욕탕 개설을 알리는 신문 광고를 내는데, 동서양 각색 주과(酒果)를 준비하고 손님 접대를 한다는 광고를 낸 점으로 미루어 취향관이 대중들의 목욕탕이라기보다는 음주 문화를 겸한 고급 목욕탕임을 알 수 있다.

취향관은 1903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욕탕과 함께 내외국(內外國) 요리를 다시 마련했으니 와달라는 광고를 게재하였다.135) 『황성신문』 1903년 12월 5일자. 취향관 목욕탕이 내국인보다는 주로 외국인을 위한 종합적인 휴게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개항 이후 목욕 문화 차이로 불편을 느끼는 서양인을 위하여 서양식 호텔과 여관이 생겼으며 모든 숙박업소에서는 음식과 목욕탕을 구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서울 도심 안에는 시민들을 위한 목욕탕도 생겨나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02년(광무 6)에는 새문 밖에 장수정(長壽井)이란 간판을 내건 대중목욕탕에서는 가끔 공짜로 목욕탕을 개방하였다.

음력 9월 25일은 영친왕 탄신일이라. 새문 밖 장수정 목욕탕에서 돈을 받지 않고 목욕하게 하며 무관학교 참위 차만재 씨가 목욕하는 사람에게 수건을 각 한 번씩 분급하고 경축한 고로 광고하오니 첨군자는 조량(照亮)하오. 고원학 고백.136) 『제국신문』 1902년 10월 29일자

영친왕의 탄신일 같은 국가적 경사에 목욕탕을 무료로 개방한 것이다. 이를 경축하기 위해 무관학교의 교관이 목욕탕에 후원을 해 목욕하는 사람들에게 수건을 선물한다는 광고가 흥미롭다. 백성들의 위생과 청결을 책임지던 목욕탕인 만큼, 대중목욕탕에 대한 후원은 민족적인 일이자 국가를 위한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목욕탕은 공개적으로 신체를 드러내기를 꺼리던 당대인들에게 여전히 낯선 장소였다.

양품 목욕통이 수입되는 한편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이 대중목욕탕조차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1908년에 위생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서울 도성 안의 몇 군데에 큰 목욕집을 설치해 가난한 인민들이 목욕할 것을 주장하였다.137)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2일자 衛生設浴. 당시 대중목욕탕이 대중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활용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목욕탕은 당시 이발소와 함께 여러 사람의 불결함을 씻어 내는 장소였던 만큼,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소독과 방역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목욕탕은 여러 사람 신체의 오물을 세척하는 곳인 까닭에 목욕하는 한 사람의 피부병과 기타 전염병자가 있을 때는 그 후에 오는 자가 그 병균을 받을 수 있다. 이발소도 또한 많은 사람이 동일한 기구로 이발을 받는 까닭에 그 한 사람이 독두병(머리 벗어지는 병과 같음)과 전염병에 걸린 자가 그 병균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두 장소는 전염병에 매개를 이루기 가장 쉬우니 이 장소에는 가장 임독 또는 독두병 독을 받아 몸을 상하는 자가 세간에 그 사례가 적지 않으나 이들 장소에는 전염병 예방에 설비와 병독소멸에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필요됨을 아시오.138) 『황성신문』 1901년 9월 26일자 3면.

이발은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고 자신도 강제 삭발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139) 최초의 단발은 1883년 11월에 유길준이 하였다. 그는 민영익,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1883년 7월 遣美朝鮮報聘使의 임무를 띠고 떠날 때 짧은 머리에 양복을 입고 갔다(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pp.126∼127). 1895년(고종 32) 11월 15일 궁궐 안에서는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훈련대 장교 3명이 대신들 앞에서 칼을 빼들었다. 단발령의 명목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단발령과 함께 고종이 머리카락을 잘라 솔선수범을 보인 뒤 등장한 이발소는 이후 목욕탕과 함께 위생과 청결을 위한 불가피한 근대의 이식처(移植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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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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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어쩔 수 없이 강제 명령을 내렸지만 수백 년 동안 지켜 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뒤엎을 수는 없었다. 몸과 마음을 하나라고 생각하던 조선인에게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잘라 낸다는 것은 곧 부모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요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교적 신체관에서 나의 몸은 내 몸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골로 숨는 사람도 생겨났다. 정부는 ‘체두관(剃頭官)’이라 해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관리를 임명하여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을 잡아 강제로 머리를 잘랐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잘린 사람 중에는 스스로 목 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 안은 통곡으로 가득 찼고, 지방 수령들도 정부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의 머리를 잘랐다. 그러자 의병이 일어났고, 백성들의 머리를 깎았던 고을 수령은 의병의 칼에 머리가 잘려 나갔다. 비위생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장발을 자르라는 단발령을 공포하였으나 시국은 예상하지 못한 대재앙으로 치달았다.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면서 다시 단발령을 철회하였지만, 단발은 위생과 관련되었고 문명개화한 사람의 상징이 되어 갔다.

한편, 서울 종로에 이발소가 설치된 것을 비롯해 여러 이발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발소는 양옥으로 지은 건물에 차려 위생과 청결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본인이 경성 종로 대광교 남천변 수월루 아래 양제옥(洋製屋, 서양식 가옥)에 이발소를 개업하였사오니, 첨군사는 왕림하심을 경요(敬要). 머리 깎고 백호 치고 상투 짜읍 제일 이발소 주 김인수 고백.140) 『황성신문』 1905년 10월 24일자 회사 상점.

이발은 칼과 가위로 상투를 자르고 수염을 치고 머리를 깎는 형태였다. 이러한 작업은 대개 백정 2세들이 하였다. 1894년(고종 31) 신분 개혁이 있게 되자 백정 2세가 전업을 하여 이발소, 구두 짓기 등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가장 천한 신분이던 사람들이 문명개화를 다듬는 선도자가 된 셈이다.

이발 기계인 바리캉(bariquant)이 등장한 것은 1905년(광무 9)을 전후한 시기였다. 바리캉은 1871년 프랑스 기계 회사인 바리캉 마르의 창시자 바리캉이 발명해 붙은 이름이다. 유럽에서 유행한 문명화의 도구가 이제 동아시아에 자리 잡고 있던 조선의 단발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바리캉은 이발 기기의 간판이자 전근대의 체모(體毛)를 제거하는 상징으로 인식되어 갔다.

이처럼 단발은 야만에서 문명인이 되는 계기였을 뿐 아니라 양반 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또한, 신학문을 공부하는 학생은 비위생과 불결의 온상이라고 지적된 장발을 그대로 간직하기 어려웠다. 국가와 학교, 개화 지식인은 학생에게 단발을 하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였으나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정은 자식의 단발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 때문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친구를 따라 단발한 학생이 집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날이 저물어서야 그것도 부모 몰래 벙거지를 쓰고 귀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그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단발을 하고 독일식 군복을 입었다. 이때 궁중에 처음으로 이발소가 설치되었다.141) 『개항 100년 연표 자료집』 1907년 8월 20일. 당시 일본인 이발소에서는 황제의 단발을 축하하며 이발비를 50% 할인하였고, 경찰서에서는 ‘단발대(斷髮隊)’ 500여 명을 모집하여 각 처로 보냈다. 시골 학교에서는 교실에 걸어 놓은, 단발한 황제와 황태자의 어진이 가짜라며 불살라 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황제와 황태자를 실제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상상 속의 이미지로만 각인되었던 황제와 황태자의 모습이 설마 짧은 머리에 이상한 군복을 입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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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한 고종
단발한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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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단발을 해야 운동회에 참석할 수 있다고 규정을 정해 놓았으므로 댕기 동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처음에 내렸다가 취소된 단발령은 대상을 성인 남성으로만 제한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학생은 물론이고 여학생도 단발을 해야 황제가 친림(親臨)하는 대운동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142) 『황성신문』 1908년 10월 30일자. 강요된 단발이지만 문명화의 문턱을 넘기 위해 댕기 동자와 댕기 낭자는 전통을 과감히 잘라 내야만 하였다.

한편, 이발 문화가 확산되면서 서울에는 곳곳에 이발소가 늘어났다. 그러자 각 지역의 조합이 결성되고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이발 소들의 경쟁이 일어났다.

이발소 경쟁, 일본인 등전등자(藤田藤子) 및 아국인 장병두, 이동희 제씨(諸氏) 등이 중부 사동 등지에 이발소를 개설하고 이발 요금은 상등에 12전 5리, 중등에 7전 5리, 하등에 5전씩 받기로 적정하고 일인 등전 씨가 각 파출소 근무하는 순사 등에게 명함으로 광고하였다는데, 북부 예빈동 소재 이발조합소원 조준성 씨는 이에 대하여 장차 질문할 터이라더라.143) 『황성신문』 1909년 8월 25일자.

단발령 이후 이발소가 생겨난 지 10여 년 만에 요금 경쟁을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개화기 이발 요금은 크게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당시 가장 큰 고객은 늘 짧은 머리를 유지해야 하는 파출소의 순사였다. 이발소 업주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판촉전을 벌이기 위해 명함을 만들어 돌리고 싼 이발비를 제시하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결과 비위생에서 청결과 위생의 상징이 된 근대화는 목욕탕과 이발소를 통해 일상의 미시적인 영역에서 근대적인 규율과 습속을 구성원들의 신체에 새긴다. 이들 공간은 개화기 조선인의 신체에 일련의 문명화된 표상을 그물망처럼 새겨 넣음으로써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근대성의 성소(聖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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