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4. 근대 대중여가의 공간과 활동
  • 실내 공연장과 활동사진 완상
심승구

근대의 공간은 개항장에서 도시로 확대되었다. 서울, 부산, 인천, 원산은 근대화의 진원지이자 그전까지의 봉건성을 탈피해 가는 전초 기지였다. 근대의 조선인은 도시의 공간 속에서 전통적인 공간 이 해체되고 양옥(洋屋)이라는 서양식 건축 속에서 구축되는 문명화된 여가 문화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실내 공연장과 활동사진(活動寫眞)이 새로운 볼거리 문화를 구축해 갔다. 우리나라의 전통 예술 공연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선비들의 풍류방(風流房) 문화이고 후자는 두레 풍물이나 굿과 같이 일과 놀이와 의례 등이 결합된 공동체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도시는 상업 자본의 발달로 문화 욕구가 팽배해져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중심으로 각종 상설 극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내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공연을 위한 별도의 공연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화기 서울의 공연 문화에 대한 상황을 직접 본 독일인 헤세 바르텍(E. Hesse Wartegg)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울에는 커피나 차를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극장이나 술집이 없다. 따라서 마땅히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옥외 시설이 없는 대신 기녀들을 집으로 불러 여흥을 즐긴다. 또한, 만담이나 재주를 부리는 광대들이 처마 밑에서 길가는 행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재미가 더할수록 그들 앞에는 동전이 수북이 쌓이게 된다. 국왕도 가무를 좋아해 궁궐에 기녀나 악사들을 두고 1년에 수차례씩 연회를 베푼다. 서양인들은 한국 음악을 중국이나 일본 음악과 유사하다고 여기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 음악이 훨씬 아름답다.144) 백성현·이한우,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새날, 1999, p.252.

서양의 공연 문화는 폐쇄된 실내 문화가 발달한 반면에 조선의 공연 문화는 공개되고 개방된 마당 문화를 발전시켰다. 정자나 마당에서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참여하여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길 수 있었다.

서양의 오페라나 연극은 조용하고 정적이 흐르면서 연기자와 관 객이 명확히 구분되어 관객은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관람만 할 뿐 같이 어울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공연 문화는 관객과 연기자가 함께 참여하여 어우러지는 문화 형태이기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899년(광무 3) 4월 서울 아현동에 최초의 실내 무대인 무동연희장(舞童演戲場)이 만들어졌다. 1900년에는 용산 무도연희장을 비롯해 이러한 극장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1902년에는 고종의 칙허(勅許)를 얻어 연예를 관장하는 궁내부(宮內府) 소속의 협률사(協律社)라는 관립 극장이 세워졌다. 협률사는 궁중 내의 연희 무대를 궁궐 밖의 실내 극장으로 이전함으로써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정기 공연 시대를 열었다. 현재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던 황실 건물인 봉상시(奉常寺)의 일부를 터서 만든 이 극장은 2층에 500석 정도의 규모였다.

새로 생긴 극장에서 직접 관람하였던 프랑스인 에밀 부르다레(Emile Bourdaret)는 당시 극장의 광경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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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률사 극장
협률사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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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협률사의 전속 창극 단원들
1904년 협률사의 전속 창극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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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몇 주 전에 문을 연 서울의 유일한 극장에를 갔다. 극장의 명칭은 ‘희대’ 또는 ‘소청대’라고 하는데, 이는 ‘웃음이 넘치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허름한 시골집과 덮개로 막아 놓은 우물 등 극장 입구 주변이 너무도 황량하여 놀랐다. 이러한 광경은 궁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서 그런지 한국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극장에 들어서면 일등석과 연결된 나무 계단이 무대 앞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것은 이 극장의 유일한 2층이다. 일반석은 악단 옆의 아래쪽에 있으며, 이등석은 정면 위쪽에 있었다. 지금까지도 줄타기 등을 공연할 때면 항상 바람이 솔솔 들어올 정도로 뚫린 곳이 있어서 출연진들이 햇빛이나 비를 천막으로 막아야 하였다. 건물도 튼튼하지 못하여 극장을 다시 수리해야 하였다.

400여 명을 수용한 공간으로 무대와 관객 사이에 약간 간격이 있는데, 여기에는 곡예 시범 시 연주하는 악대가 자리 잡았다. 조명 시설은 더욱 보잘 것 없어 가까스로 설치된 겨우 몇 개의 전기 램프만이 커다란 극장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하노이 극장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은 수준이다. 관중석에는 흰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관리들이 양반의 지위를 한껏 뽐내기 위해 실내가 어두워 남들에게 안경이 보이지 않는 데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크리스털로 만든 안경 유리알은 지름이 10㎝나 되는 것도 있었다. 또한, 바로 앞좌석에는 양갓집 규수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들떠서 떠들며 요란스럽게 북적대고 있었다. 초록색 두루마기를 걸친 용감한 한 여인이 좌석이 아닌 빈 곳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가 앉는 것도 눈에 뜨였으며, 일부는 아예 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서 보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지위가 낮은 서민들은 비교적 조용히 앉아 있었다.145) 노동은, 『한국 근대 음악사』, 한길사, 1996, pp.504∼507.

협률사 주변의 허름한 광경, 무대와 객석의 내부 시설, 큰 안경 쓴 양반 관리, 신기함에 들뜬 양갓집 규수들의 재잘거림, 조용히 앉아 관람을 기다리는 서민까지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다. 협률사 이외에도 1907년에는 연흥사(延興社),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등 여러 극장이 생겨났다. 그러자 그동안 각 지방을 유랑하던 예인 집단들이 상설 실내 연희장으로 모여들었고, 이 속에서 창극(唱劇) 같은 새로운 장르가 탄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음악이 유입되면서 상업적인 음악회가 열렸고, 외국 유학을 다녀온 양악(洋樂) 연주가와 외국인 내한 연주자가 늘어나 공연 문화는 점차 다양해져 갔다.

협률사는 1908년에 원각사(圓覺社)로 바뀌었다. 실내 공간에 연희장을 설치하거나 전통적인 판소리 가객(歌客)이나 예인들이 공공 극장에 오른 것 역시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근대적 유통 방식으로서 점차 대중 여가를 발전시킬 기반이 되어 갔다.

한편, 근대적인 극장과 함께 새롭게 선보인 것은 움직이는 활동사진이었다. 훗날 영화라고 불려진 활동사진은 개화기 조선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거리의 등불’이었다. ‘활동사진’이라는 말은 1899년(광무 3) 일본 영화가 만들어져 전국으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처음 생겨났다. 대중에게 활동사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03년경이다.

<활동사진 광고>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시술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 및 비 오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되는데 대한 급 구미 각국의 생명 도시의 절승한 광경이 구비되었다. 허입요금(許入料金) 동전 10전.146) 『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자 광고.

스크린과 영사 장비 등 간단한 설비만 갖춘 야외극장이어서, 비가 오는 날은 상영을 중지하였다.147) 당시 서울의 전차 가설 공사를 맡았던 한성전기회사가 동대문 근처에 있는 전차 차고 겸 발전소 부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당시 공사장 인부들을 격려하기 위해 상영하던 활동사진을 일반인에게도 개방한 것이다.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상영되는 활동사진 구경은 서울의 밤거리에 등장한 새로운 관람 문화였다. 활동사진이 처음으로 국내에 유입된 것은 프랑스 작품을 비롯한 외화였다. 당시 활동사진은 단순한 사진의 복제품에 지나지 않아 겨우 몇 분 동안에 끝나는 다큐멘터리였다.

매일 방영되는 활동사진은 저녁 소일거리로 서울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입장료는 자리에 따라 영화관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대체로 상등(20전)과 하등(10전) 두 가지가 있었다.148) 활동사진 전람소는 동대문 안에 있사옵고 일요일 외에는 매일 밤에 여덟 시부터 열 시까지 하옵고 전람 대금은 하등에 십 전이오 상등에 이십 전이옵고 매주일에 사진을 딴 것으로 다 바꾸는데 서양 사진과 대한과 온동양 사진인데 대자미있고 구경할 만한 것이오니 첨군자에게 값도 싸고 저녁에 좋은 소일거리가 되겠삽(『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 23일자). 값이 싸다 고 광고하였지만, 당시 신문 한 달 구독료가 20∼30전 정도였으니 결코 싼 소일거리는 아니었다. 매일 저녁 입장료 수입이 100원에 달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10전을 기준으로 줄잡아 천여 명의 관객이 몰려온 셈이다. 그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 명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초기의 활동사진 상영은 외국인들이 자국의 담배를 판매할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활동사진 완상금은 매일 환화(圜貨) 10전으로 정하되 그 돈 대신에는 좌개(左開)한 영미연초회사(英美煙草會社)에서 제조한 권연공갑으로 영수함, 올드꼴드(old gold) 10갑, 꼴드피쉬(gold fish) 20갑, 할노(hald) 10갑, 호늬(honey) 10갑, 드람헤드(drum head) 20갑149) 조희문, 『초창기 한국 영화사 연구-영화의 전래와 수용(1896∼1923)-』,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p.40.

이 밖에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도 전차 고객을 끌기 위해 동대문 전차 차고 근처에 활동사진 관람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상영되던 활동사진은 영미연초회사와 한미전기회사가 추진하고 일반에게 공개하여 흥미를 끌어 흥행의 시초를 만들었다.

야외 상영장으로 출발한 활동사진 전람소는 1905년 무렵 동대문 활동사진 사진소로, 1907년에는 광무대라는 전문극장으로 변해 갔다.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극장은 신문로 외곽을 비롯해 서울의 곳곳에 세워졌다. 활동사진은 황실을 위해서도 상영되었다. 장소는 창덕궁이었다. 황태자였던 순종은 황태자 시절 활동사진을 좋아하여 수입할 때 작품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관객은 신문 광고를 통해 끌어 모았다. 우리나라와 동서양의 영화였으나 구체적인 제목은 실리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영화가 활동사진의 중심 프로그램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판소리, 탈춤, 창극, 연극, 곡예 등이 중심이었고 영화는 사이사이에 잠깐 보여 주는 형 식이었다. 활동사진은 2∼3분짜리가 대부분이었다. 상영 시간이 짧아서 기생의 공연을 비롯해 다른 공연을 곁들여야 하였다.150) 조희문, 「무성 영화의 해설자, 변사 연구」, 『영화연구』 13, 한국영화학회, 1997, p.127.

활동사진이 극장의 중심 레퍼토리(repertory)로 정착한 것은 경성고등연예관(京城高等演藝館)이 생기면서부터이다. 1910년에 최초의 영화 상설 극장으로 탄생한 경성고등연예관은 1회 상영에 13∼15편을 집중 편성하였다. 이제 활동사진을 위한 극장은 도시인들이 야간에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이자 관람 문화를 위한 또 하나의 근대 공간이었다. 하지만 야간에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극장에 구경 다니는 자들을 음부(淫婦), 탕자(蕩子)에 화냥년이라고 몰아세웠다. 영화와 함께 보여 준 공연 중에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나 성을 소재로 한 만담을 지적한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인 생활 방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창인 영화가 단순히 오락거리로 전락하자 지배 계층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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