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4. 근대 대중여가의 공간과 활동
  • 자행거 타기
심승구

근대 여가 가운데 교통수단과 관련된 여가 활동도 생겨났다. 바로 자전거(車轉車) 타기가 그것이다. 처음에 자전거는 ‘스스로 다니는 수레’라는 뜻으로 자행거(自行車)라고 불렀다. 자행거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1898년(광무 2)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尹致昊)가 자행거를 타고 종로 네거리에 왔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확인된다.151) 『日新』, 무술(광무 2년, 1898) 제7책, 10월 9일, 『한국사료총서』, 국사편찬위원회. 이미 그 이전에도 자행거가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시기 이후에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 같다. 그 이유는 자행거의 보급과 관련된 기록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1899년 7월 13일에는 자행거와 관련된 광고가 『독립신문』에 게재된다. 1899년 7월 13일자에 소개된 개리양행(開利洋行) 자전거와 1899년 7월 17일자에 소개된 마이어사(Edward Meyer & Co.)의 레밍턴(Remington) 자전거에 대한 소개이다.

우리 상점에서 미국에 기별하여 지금 여러 가지 자행거가 나왔는데 값이 저렴하오니 없어지기 전에 많이 사 가심을 바라오며 또 우리 상점에 유성기와 전기로 치는 종과 또 여러 가지 좋은 물건이 많이 있사오니 첨군자는 많이 찾아와 사가심을 바라나이다. 서울 정동 새 대궐 앞. 개리양행.152) 『독립신문』 1899년 7월 13일자.

가장 놀라운 교통수단은 ‘쇠당나귀’라 불리는 자동차였다. 하지만 아직 자동차가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자전거는 일반 대중들이 볼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교통수단이자 운반 수단이었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당시 자행거는 우편물이나 전보를 배달하는 우체부들이 타고 업무를 보았다.153) 『일신』, 신축(광무 5년, 1901), 제13책, 5월 18일, 『한국사료총서』, 국사편찬위원회. 아마 최초의 자행거는 바로 근대식 우편 시설물인 우정국의 설치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교통수단으로서의 편리함 때문에 신문에는 본격적으로 자행거 상품을 소개하는 광고가 잇따랐다. 자행거는 주로 외국인들이 수입해 들여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판매하기 위해서는 신문 광고를 내야 하였다.154) 저경궁 앞 엠벌늬 씨의 집에 상품 자행거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전으로 삼십 원이요 하나는 칠십 원인데 속히 방매하기를 위하여 값을 염하게 하겠사오니 사고자 하시는 이는 사 가시오. 광고주 엘벌늬(『제국신문』 1900년 1월 15일자). 급하게 처분하려고 한 탓인지, 자신이 직접 자행거 가격을 염가로 30원과 70원에 팔 것으로 광고하였다. 가격이 비쌌는지 광고는 모두 25차례나 실렸다.

점차 자행거를 판매하는 상점이 서울의 곳곳에 생겨났다. 판매점에서 자행거 1좌(대)의 가격은 종류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100원을 기준으로 넘거나 그 이하였다.155) 남문동 제칠통 일호 이치호가에서 방매할 상품 자행거 두 개가 있는데 한 개는 지폐 일백사십 원이요 한 개는 지폐 칠십 원이오니 원매하시는 이는 속히 내문하시오. 이치호 고백(『제국신문』 1900년 6월 16일자). 가격이 140원이나 한 것으로 보아 자행거는 당시 비싼 물건 가운데 하나였다. 가격이 비싸서 일반 대중은 오늘날 우리가 비싼 외제차를 상점에서 바라보듯 이, 전시된 자행거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자행거는 자연 특정 계층의 교통수단 내지 근대적인 여가 문화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자행거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광고 문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156) 이 자행거는 미국 지가고지의 대상점에서 제조함인데 名曰 ‘램블러’라. 본인이 그 상점의 대변으로 지금 새로 도입한 第一包를 解卜 발매하는데 물품은 美而且堅하고 價金은 廉而不貳하여 每坐에 지폐 백십 원이오니 자행거의 학습과 운동을 애호하시는 군자는 請早來購하시오 差晩하면 不及하리다. 신문 내 정동 초입 이태호 상변 신축 양옥 주인 케릿스키 고백(『황성신문』 1900년 7월 5일자). 자행거는 모두 수입품이었는데, ‘램블러(Rambler)’라는 미국에서 수입한 자행거가 교통 문화의 유행을 선도하였던 것 같다. 자행거의 보급은 근대적인 여가 문화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일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었다. 자행거를 판매하기 위한 신문 광고는 자행거 학습과 운동을 애호하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때 자행거의 학습은 자행거 타는 요령과 작동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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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램블러 자전거 광고
1900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램블러 자전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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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행거는 손쉬운 교통수단으로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우고 탈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무렵 미국에 사는 한인 사회에서는 사람마다 자행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는데, 한인 여성들도 자행거를 잘 타고 다녔다고 한다.157) 『공립신보』 1905년 12월 21일자 3면.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일반 대중이나 여성이 자행거를 타고 여가를 즐기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자행거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지 ‘애륜가(愛輪家)’라는 용어도 등장하였다.158) 『황성신문』 1903년 8월 24일자 3면.

자행거가 늘어나는 만큼, 그 용어도 점차 자전거로 바뀌어 갔다. 1900년대 후반부터는 자행거라는 말 대신 자전거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자전거가 도로 위를 다니면서 새로운 교통수단이자 여가 수단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인과 충돌해 사고가 났다는 기사가 신문 지상에 잡보(雜報)로 등장할 만큼 자전거 사고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기도 하였다.159) 『황성신문』 1907년 7월 10일자 2면. 종전까지의 말이나 당나귀를 대신하여 자전거가 새로운 교통이나 운반 수단은 물론 여가를 위한 수단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동시에 최초로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개화기의 자전거는 ‘움직이는 문명’으로써 근대를 소개하는 수단이었다. 그 당시 자전거는 거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여가 수단으로는 그리 크게 활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 타기 교육도 자전거를 여가 수단으로 보급하려기보다는 교통사고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자전거는 개인적인 교통수단에서 점차 체력을 단련하는 운동 수단으로 발전해 갔다. 자전거가 운동 수단으로 보급된 데에는 자전거 상점들의 판매 전략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자전거 판매를 위해 먼저 보급에 힘썼다. 그 방법은 자전거 타기 교육을 하거나 상품을 내걸고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최초의 자전거 경기 대회는 1906년 4월 22일에 육군 참위(參尉) 권원식(權元植)과 일본인 요시카와[吉川]가 훈련원에서 벌인 경기이다.160) 『황성신문』 1906년 4월 16일자 3면 ; 『대한매일신보』 1906년 4월 7일자 3면. 이 대회에서는 자전거 선승인(先勝人, 우승자)에게 100원 이상의 상품을 수여하여 보급을 적극 장려하였다.

1907년 6월 20일에는 경성 내 한일자전거상회 주최로 자전거 경기 대회가 훈련원에서 동서양 외국인이 참가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어 7월 12일에도 훈련원에서 역시 같은 규모의 대회가 열 렸다.161) 『황성신문』 1907년 6월 18일자 1면. 1909년 4월 3일에는 조선일일신문사(朝鮮日日新聞社) 주최로 훈련원에서 경룡상점(京龍商店) 점원을 위로하기 위하여 자전거 경기 대회가 거행되었다. 40회 경기에는 헌병대에 근무하는 후지타 타카스케[藤田高助]라는 일본인이 우승하였다.162) 『경성신문』 1909년 4월 3일자 3면 ; 6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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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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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8년에는 군부에서 긴급한 공사(公事)에 사용하기 위하여 자전거 두 대를 구입하였는데, 이 자전거는 영위관(領尉官)이나 고원대청직(雇員大廳直)이라도 급한 공사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었다.163) 『황성신문』 1908년 11월 13일자 2면. 이로써 공관청(公官廳)에서 공무용 자전거를 구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자전거는 점차 보급되고 경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특히, 자전거의 1인자였던 엄복동(嚴福童, 1892∼1951)도 바로 서울의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日美商會)에서 자전거를 배워 1910년 훈련원에서 개최된 자전거 경기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이후 자전거 선수 엄복동은 늘 일본인 자전거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독차지하여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安昌男, 1900∼1930)과 함께 ‘쳐다보니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 정도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자전거 경주 대회는 이처럼 자전거 보급을 위한 판매 전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열렸다. 근대 스포츠는 바로 자본의 논리와 늘 함께 나가는 쌍두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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