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5. 개화기 축구의 모습들
  • 최초의 축구 단체
심승구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조선 지식인들은 정신 교육에 편중된 것을 극복하고 신체 교육을 강화하여 국권 회복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1906년 3월 11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단체이자 민간 체육 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大韓體育俱樂部)가 창립되었다. 축구를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의미로 경구구락부(競毬俱樂部)라고도 하였다.

이 단체는 당시 궁내부 관리였던 현양운(玄暘運)을 총무장에, 육사 교관과 미총령(米總領) 번역관을 지낸 신봉휴(申鳳休)를 부총무에, 덕어(德語, 독일어) 학교 교관인 한상우(韓相宇)를 부총무로 임명하고 대한체육구락부 취지서(趣旨書)를 발표하였다. 취지서의 내용은 체육을 통해 침체된 청년들의 심신을 단련시키고 국민의 의식을 진작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외국어 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단체로 우리나라 축구팀의 효시였다.

대한체육구락부가 조직되자마자 곧바로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 督敎靑年會, Y.M.C.A.)에 축구부가 조직되었다. 바로 이때 축구부를 조직하고 축구팀 주장을 지낸 인물이 한성영어학교 출신인 김종상(金鍾商)이었다. 영어학교 출신이 사회에 나가 축구를 사회 체육으로 발전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단체는 초창기 축구경기를 주도하면서 축구 보급에 앞장섰다. 1906년 6월에는 흥천사에서 대운동회가 열렸는데, 이때 축구 경기는 최대 관심사였다. 축구팀은 당시 홍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열전을 벌였는데, 이날 열린 여러 종목 중 가장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 대운동회에서 대중에게 첫선을 보인 축구는 이후 다른 종목을 압도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축구부는 사회체육 단체로는 처음 조직한 것이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축구부가 창립된 것을 계기로 축구의 보급은 더욱 활력을 얻어 갔다.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외에도 1910년대까지 조직된 축구 단체로는 대창체육부, 일광구락부, 청강체육구락부(중동학교 체육부), 경신학교 팀, 보성학교 팀, 휘문의숙 팀, 배재학당 팀, 선린상업 팀, 중앙학교 팀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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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삼선평 경기장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대창구락부가 축구경기를 하기 전 도열한 모습
1909년 삼선평 경기장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대창구락부가 축구경기를 하기 전 도열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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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단순하고 재미가 곁들여진 운동이면서 복잡한 규칙도 없 고 장비가 별로 필요하지 않는 스포츠였다. 무엇보다도 공 하나만으로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이 점이 축구가 빠르게 보급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지방에서는 평양이 가장 먼저 축구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를 통해 축구가 보급된 것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필두로 숭실중학, 대성중학, 청산학교 등에 축구팀이 생겨나 본격적으로 축구 경기를 하자, 다른 지방에서도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축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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