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5. 개화기 축구의 모습들
  • 초창기 축구 경기 모습
심승구

축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일정한 명칭이 없었다. 원래 축구의 정식 명칭은 ‘어소시에이션 풋볼’이었기 때문에 축구를 그냥 ‘풋볼’이라고 하였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association의 ‘soc’를 빼내어 ‘soccer’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축구는 국내에 소개될 때 ‘풋볼’ 또는 ‘사커’라고 불렸다. 이를 국내에서는 경구(競球), 척구(踢球), 척구(擲球)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대를 거치면서 풋볼의 명칭은 점차 축구로 통일되어 나갔다. 또한, 당시 축구를 ‘아식축구(我式蹴球)’라고도 불렀다. 그 까닭은 아식축구, 즉 어소시에이션 풋볼(축구)을 럭비풋볼(Rugby football, 럭비), 아메리카 풋볼(미식축구) 등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대 이전 초창기 축구 선수는 한복 바지와 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게 보통이었다. 이때 선수들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갓은 벗었지만 상투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망건은 썼다. 저고리 앞섶이 펄럭일까 봐 조끼를 반드시 입었다. 경기 때에는 한 팀은 조끼, 다른 팀은 배자(褙子)를 입거나 조끼를 뒤집어 입어 상대 팀과 구분하도록 하였다. 가죽으로 만든 정식 축구공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몇 개 되지 않아 겨우 시합용으로 쓰였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공을 새끼로 둥글게 만들거나 소나 돼지의 오줌통에 짚이나 솜을 넣어 잘 굴러가게 만들어 찼다. 한 팀의 인원도 제한이 없었다.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양 팀의 인원수만 같게 하였는데 대략 15명 정도였다.

축구 규칙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골포스트(goal post)는 물론이고 사이드라인(sideline)이나 골라인(goal line) 같은 것도 없었다. 골포스트가 없어 골키퍼(goal keeper)의 신장을 표준으로 삼을 정도였다. ‘수문장’ 또는 ‘문지기’라고 불린 골키퍼의 키를 넘기면 골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골키퍼는 가능한 낮은 자세로 팔을 들어 그 위로 날아오는 슈팅은 ‘노골’이라고 우기는 촌극이 자주 벌어지기도 하였다. 경기 시간도 제한이 없어 어느 팀이든지 기진맥진하여 백기만 들면 경기를 끝냈다. 달밤에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공을 찼다고 하니 축구에 대한 인기가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만일 득점이 없으면 벌칙 수에 따라 승부를 가렸다.

이처럼 당시 축구 경기에는 강인하고 인내성 있는 체력과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만 필요하였으니 기술면으로는 미개함 그대로였다. 예를 들면, 당시 ‘들어 뻥’이라 하여 볼을 공중에 높이 차 멀리만 나가면 그 선수야말로 당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이 기술은 기존에 전통적인 축국(蹴鞠)을 할 때 공을 높이 차는 습관이 축구를 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활용된 것이었다. 오프사이드(offside) 규칙을 몰라 윙(wing)은 상대편 문전에 기다리고 있다가 공을 잡아 골인시켰는데, 이를 ‘널포’라 하여 그때 인기가 많았다.

특별한 기술이 없던 당시에는 힘으로 밀어붙이고 걸핏하면 상대편을 걷어차는 반칙 행위가 예삿일이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역시 자기 편 선수가 공을 빼앗기 위해 슬쩍 잡아채거나 적당히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면 ‘잘한다’는 함성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심판진에게 항의하는 소동이 일기도 하였다. 당시 쓰던 말 가운데에는 ‘생짜’와 ‘맞장구’라는 용어가 있었다. 생짜는 볼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차는 오늘날의 발리킥(volley kick)을 말하며, 맞장구는 볼을 가운데 놓고 양 팀 선수가 마주 차는 것을 가리킨다. 볼을 마주 차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터질 때도 있었는가 하면, 발목을 크게 다치기도 하였다. 축구는 주로 사찰 앞마당이나 빈 터라면 아무 데서나 하였다. 하지만 경성 시내에서 축구를 하다 보니 가정집 담을 넘어 장독을 깨기가 일쑤였고 이 때문에 시비가 일어나 사건 기사가 신문에 나기도 하였다. 지방 시골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 전답에서 공차기가 성행하였다.

지도자는 물론 경기 운영 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경기 때마다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러다가 1912년 상하이로 유학갔던 현양운이 ‘축구규칙서’를 가져왔는데, 이는 영국 FA(Football Association)에서 발행한 것을 번역한 것이었다. 이 경기 규칙서는 우리나라에서 축구를 정식 경기로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21년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리면서 우리나라 축구는 비로소 본 궤도에 올랐다. 처음으로 정식 축구경기 규칙을 적용하여 경기를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초창기 축구가 학교는 물론이고 일반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발전되었으며,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외세 침략으로 국력이 갈수록 쇠해지고 있을 때 축구는 민족 단결의 수단이요, 국권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권장되었다. 대한체육구락부가 만든 최초의 운동가에 “제국(帝國) 독립 기초로다. 수신제가(修身齊家) 근본되고 충군애국(忠君愛國) 강령이로다.”라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축구가 오늘날에도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국기로 여길 정도가 된 것은 민족 수난기를 거치며 성장한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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