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1. 서양과학의 도래: 얼마나 새로운가?
  • 시헌력의 도입과 갈등
문중양

한국 중세 천문학에서 중시되어 온 분야는 역법이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천체-日·月·五星-의 운행을 관측하여 시간을 결정하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는 한편, 일·월·오성의 위치계산과 일월식 예보 등 광범한 천문학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농업생산과 관련한 사회·경제적 필요성에서 발전한 것이라면, 후자는 천체의 운행을 통해 인간 사회의 정치 현상이나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고자 하는 정치·사상적 요구(국가점성술)에 의해 발전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양자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천문학 연구가 국가 차원의 역법 연구에 시종한 것은 모두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역법의 변화 과정을 통해 그것이 지니는 과학사적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정치사상적 의미를 간취할 수 있는 것이다.

역법을 구성하는 내용은 기삭(氣朔)·발렴(發斂)·일전(日躔)·월리(月離)·구루(晷漏)·교식(交食)·오성(五星)에 대한 추보로 이루어지는데, 그 가운 데 민간의 상용력과 관련되는 것은 기삭과 발렴에 대한 추보, 특히 기삭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기는 24기를, 삭은 매월의 기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삭에 대한 추보는 결국 연월의 기점을 추산하는 것이었다. 전통시기의 ‘보기삭’에서는 24기를 결정하는 데 평기법(平氣法)을, 삭을 결정하는 데는 정기법(定氣法)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시헌력의 도입은 기삭의 문제에서 볼 때 종전의 평기법을 정기법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것은 치윤법(置閏法)의 차이로 나타남으로써 종래의 상용력 체계에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신·구력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신구 역법의 갈등 문제를 도입 초기에 해당하는 현종 연간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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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초상
김육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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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헌력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초기 인물로는 한흥일(韓興一, 1587∼1651)과 김육(金堉, 1580∼1658)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헌력의 도입은 김육의 주청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육이 자신의 상소에서도 밝혔듯이 그에 앞서 이 문제를 제기하였던 사람이 한흥일이었다. 그의 조부인 한효윤(韓孝胤, 1536∼1580)은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제자인 박민헌(朴民獻, 1516∼1586)에게서 서경덕의 역학을 전수받았고, 그의 부친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은 이러한 북인계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민순(閔純, 1519∼1591)을 통해 서경덕의 학문, 특히 상수학(象數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가학의 전통이 한흥일의 자연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1637년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갈 때 배종하였다. 아마도 그는 이 과정에서 서학을 접하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가 북경에서 아담 샬의 『신력효식』을 얻어가지고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이러한 서양의 천문역법서들이 그로 하여금 개 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김육에 앞서 1645년(인조 23) 『개계도』와 『칠정력비례』를 바치면서 개력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당시 일반인들의 견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청력의 정확성을 확신하고 집안의 모든 제사를 청력에 의거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한흥일의 시헌력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시헌력은 종전의 역법과 비교할 때, 두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월(日月)의 궤도에 높고 낮은 차이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와 일월 사이의 거리가 변화한다는 것인데, 시헌력 도입 초기에는 주전원-이심원 모델에 근거한 이심궤도로, 『역상고성 후편』 단계에 이르면 타원 궤도의 문제로 설명되었다. 다른 하나는 정기법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입 초기 시헌력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정기법의 문제였다. 종래 우리나라의 시간 체계는 1일 100각 체제였고, 24기는 동지를 기준으로 15일씩 가산하여 중기와 절기를 설정하는 평기법이 기본이었다.

그에 비해 시헌력은 1일 96각 체제였고, 24기의 배당도 황도상에서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는 정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시헌력에서는 각 절기의 시간 간격이 15일로 고정되지 않고 14일이나 16일이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도입 초기에 김육에 의해 지적된 문제였다. 그것은 결국 치윤법의 문제로 확장되었고 인조·효종 연간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효종이 개력 요구에 대해 치윤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지적하였던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정기법과 그 연장으로서의 치윤법이 정계에서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현종 연간에 들어서였다. 내적으로 시헌력 시행 과정에서 신․구력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과 외적으로 중국에서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시헌력의 개폐가 이루어진 것이 논란의 요인 이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의 정세가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청 왕조의 존속과 시헌력의 지속적인 시행에 대한 의구심이 맞물려 ‘구법준수(舊法遵守)’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논쟁은 송영구(宋亨久)의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송형구는 24기의 오류를 지적한 현종 원년(1660)의 상소, 시헌력의 폐지와 대통력의 사용을 주장한 현종 2년(1661)의 상소, 그리고 치윤법의 오류와 시헌력의 오차를 지적한 현종 10년(1669)의 상소 등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특히, 현종 10년의 상소는 대통력으로 환원된 역법이 현종 11년(1670)부터 다시 시헌력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전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성격을 띠고 있다.

송형구의 시헌력 비판은 크게 다섯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五大段差誤處], 그것은 결국 치윤법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치윤의 간격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전통적으로 윤달을 두는 간격은 “三歲一閏, 五歲再閏, 十有九歲七閏”으로 설명될 수 있는 19년 7윤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33개월마다 윤달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형구는 바로 이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시헌력 도입 이후의 윤달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 었다.

두 번째는 전년에 입춘이 없었을 경우 그 다음해에 윤달을 두어 두 번의 입춘이 있게 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관례였는데[複立春年], 시헌력 도입 이후 이러한 관례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입기시각의 순서에 대한 문제였다. 예전에는 1년 동안 24기의 입기시각이 12시의 차서에 따라-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순서로-질서 정연하게 분포되었는데, 시헌력 도입 이후에는 같은 시각에 입기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 이다.

네 번째는 역시 세 번째 문제와 마찬가지로 입기시각에 대한 것이었 다. 예전에는 앞의 절기와 그 다음 절기의 입기시각은 반드시 6을 기다린 후 교체해서 들어갔다[待六而遞入]. 예컨대 앞의 절기의 입기시각이 술시였다면 그 다음에 오는 절기의 입기시각은 그로부터 6시간 이후인 묘시에 배당된다는 것이다[戌-亥-子-丑-寅-卯]. 그런데 시헌력에서는 이러한 규칙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24기의 일진에 대한 문제였다. 윤달의 절기 일진과 윤달 이전 달의 절기 일진은 10간에 있어서 연속되어야 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예컨대 윤달 이전 달의 절기 일진의 10간이 ‘癸’였다면 윤달 절기의 10간은 ‘甲’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헌력에서는 이 순서에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송형구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은 대통력(수시력)의 평기법과 시헌력의 정기법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의 문제에서 송형구가 지적하고 있는 대통력의 정확성은 평기법에서 각 절후 사이의 간격을 15일 2시 5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 경우 절기와 절기, 중기와 중기 사이의 간격은 30일 정도가 되어서 60진법을 사용하는 당시의 시간법이나 일진법과 주기적으로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정기법을 사용하는 시헌력의 경우에는 각 절후 사이의 시간 간격이 일정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력이 보여준 것과 같은 규칙성을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송형구는 왜 이렇게 대통력 체계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그의 출신 성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직위가 ‘전 관상감 직장(前觀象監直長)’, ‘전찰방(前察訪)’, 또는 ‘안동거진사(安東居進士)’, ‘안동사인(安東士人)’ 등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관상감에서 구체적으로 맡았던 일은 삼학 가운데 명과학 분야였다. 명과학은 성명·복과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으로, 길흉을 점친다 는 그 학문의 특성상 시헌력 도입 이후에도 시헌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통력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송형구의 상소에 대한 계사에서 “송형구는 음양에는 밝지만 역법에는 정통하지 못하다.”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나 송형구의 상소에 대해 관상감에서 천문학 분야를 담당하였던 송이영이 논란을 벌여 결국 송형구의 주장이 틀렸다고 한 것은 음양학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천문역법을 담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시헌력에 대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자연 이해가 그 과학적 성격을 상실하게 되면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본래 음양이나 오행은 자연계에 대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형성된 개념이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화하면서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이 음양·오행으로 환원되어 설명되기에 이르렀다. 평기법을 고수하는 주장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간취하게 된다. 본래 평기법은 태양의 운행을 통해 1년의 길이를 관측하고 편의상 그것을 균등하게 24등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 음양설의 각종 내용이 분식되면서 명과학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란은 자연현상을 해석함에 있어 종래의 음양론적 자연이해를 고수하느냐, 아니면 자연 그 자체에 즉해서 자연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냐 하는 자연인식의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문제였다.

김석주(金錫冑, 1634∼1684)는 송형구의 주장이 시헌력의 정기법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김석주가 시헌력의 정확성을 옹호하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천절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으로, 평기법에 대한 정기법의 우수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태양의 운행 속도는 지속의 차이가 있어 일정하지 않으므로 평기법처럼 세실을 24등분하여 절기를 배당하는 방법은 천상과 어그러짐을 면할 수 없었다. 결국 평기법은 천상의 참된 절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계산상의 편의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태양의 궤도에 따라 절기를 정하는 정기법은 비록 태양의 운행 속도에 따라 절기 사이의 시간 간격이 14일이 되기도 하고, 16일이 되기도 하는 등 구력(대통력·수시력)과는 차이가 있지만, 천행과 합치하는 천절(하늘의 절기)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천지에 대한 관측을 통해 파악된 천체의 운행과 보다 정밀하게 합치되는 역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었다.

또 하나의 논리는 시헌력 반대론자들의 대통력(수시력) 옹호를 겨냥한 ‘후법선어전법론(後法善於前法論)’이었다. 시헌력 반대론자들은 허형이라고 하는 명유(名儒)가 참가하여 작성한 수시력을 고법(古法)을 준수한 만고불변의 역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석주는 이에 대해 역대 중국의 개력의 역사를 개관함으로써 후대에 나온 역법들이 전대 역법의 문제를 보완하면서 발전해 왔음을 증명하였다. 곽수경(郭守敬)의 수시력이 역대의 역법을 절충하면서 가장 탁월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부족한 점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헌력에서 이전의 평기법을 부정하고 정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수시력에서 평삭법을 극복하고 정삭법을 사용한 것과 같은 경우라고 주장하였다.

즉, 삭망월의 평균값으로 초하루를 결정하는 평삭법보다 실제로 해와 달이 만나는 날로 초하루를 정하는 정삭법이 천상에 부합하는 것이듯, 정기법도 천상에 부합하는 진보된 방법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대에 나온 역법이 전대의 그것보다 정교하다는 객관적인 반증이었다. 요컨대 하나의 역법이 영구히 폐단없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세차·세여 등 역법의 제요소에 대한 끊임없는 가감변통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헌력을 반대한 것은 송형구만이 아니었다. 소론 계열의 학자로 분류되는 김시진(金始振, 1618∼1667) 역시 시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김시진은 구력과 신력의 차이를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시각법의 차이였다. 구력이 1일 100각 체제인 데 비하여 신력은 1일 96각 체제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24기의 입기시각의 차이였다. 구력에서는 절기와 절기 사이의 시간 간격이 30일 5시 2각으로 일정하였는데, 신력에서는 하지를 전후한 시기에는 31일 가량, 동지를 전후한 시기에는 29일 가량으로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1년의 길이를 계산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구력에서는 금년의 입춘으로부터 대한절의 마지막 날까지가 365일 3시간이었는데, 신력에서는 금년의 입춘에서부터 다음 해의 입춘이 시작되는 시점까지가 365일 3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산법에 따르면 신력의 경우 1년의 길이가 매년 1각씩 짧아지게 되는 것이었다.

시헌력에 대한 김시진의 비판은 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는 기존의 ‘평기법’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시헌력의 정기법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하여 태양 운행 속도의 지속 문제를 하루의 길이의 변화로 오해하고 있었다. 하루의 길이 변화가 없는 한 여름에는 더디고 겨울에는 빠를 이치가 없다는 것이 김시진의 주장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상용력의 일반적 상수에 근거하여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려고 하는 방식이었다.

세 번째 문제 역시 임진년(1652, 효종 3) 입춘의 입기 시각을 일반화시켜 이해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예컨대 전년의 입춘이 정월 갑자일 자초 초각이었다면, 구력에서는 여기에 365일 1/4일을 더한 을사일 인정 4각까지가 일년이고, 그 다음 묘초 초각에 다음 해의 입춘을 두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시헌력에서는 인정 4각에 입춘을 두었다는 것이다. 김시진은 이것을 시헌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파악하여, 이와 같이 입춘이 매년 1각씩 빨라진다면 그 결과는 “사시역·인사폐·육갑문·천도괴”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남극관(南克寬, 1689∼1714)은 시헌력의 입장에서 김시진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 역시 평기법이 계산상의 편의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먼저 365 1/4일이라는 것은 태양과 하늘의 회합주기이며, 24기는 태양의 운행 도수에 따라 구분한 것이라는 전제를 확인하였다. 춘분과 추분이 2분이 되는 까닭은 주야의 길이가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력에서는 춘분 2일 전에, 추분 2일 후에 주야의 길이가 같아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것은 계산상의 편의만을 따르고 천시의 오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24기를 설정하는 기준은 천체의 운행 그 자체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 남극관 주장의 요점이었다.

남극관은 김시진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한 입춘의 입기 시각에 대해서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있었다. 24기의 차서에 문제가 있다면, 예컨대 신력에서 입춘을 동지 앞에 설정하였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해에 입춘의 입기 시각이 1각 빠른 것은 그 해에 한정될 뿐이고, 입기 시각의 지속은 해마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하늘의 절도와 비교해 보면 어그러질 것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나아가 남극관은 김시진이 시헌력을 서양역법이라 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구법준수론자들이 그토록 받드는 수시력이라는 것도 원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몽고족과 여진족을 가릴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남극관의 주장이었다. 나아가 남극관은 역법상의 ‘불이지리(不易之理)’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수십 번에 걸친 역대 개력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일법불변(一法不變)’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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