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1. 서양과학의 도래: 얼마나 새로운가?
  • 지구 관념의 등장과 세계관의 변화
문중양

천문학적으로 지전설·무한우주설·다우주설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이 구형(球形)이라는 지구설(地球說)은 사정이 판이하게 달랐다. 지구설은 전적으로 서양과학이 가져다 준 새로운 관념이었고, 조선 후기 새로운 자연지식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181) 조선 후기 지구설 수용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논문이 참조된다. 구만옥, 「朝鮮後期 ‘地球’說 受容의 思想史的 의의」, 『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河炫綱敎授停年紀念論叢, 2000, pp.717∼747가 유용한 참고가 된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래 둥근 땅이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관념이었던데 비해, 동아시아인들이 지닌 땅의 형태에 관한 관념은 평평하다[方]는 것이었고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표현에서 그러한 관념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대의 개천설(蓋天說)과 혼천설(渾天說) 모두 천원지방에 입각한 우주론으로서182) 중국 고대의 개천설과 혼천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논문이 참조된다. 李文揆, 「漢代의 天體構造에 관한 논의—蓋天說과 渾天說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18권 1호, 1996, pp.58∼87. 땅의 평평함에 대한 반론과 의심은 17세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에서 처음으로 소개되기 이전에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183) 동양과 서양에서의 전통적인 땅의 형태에 관한 이러한 관념에 대한 논의는 다음 논문이 참조된다. Chu Ping Yi, 1999 “Trust, Instruments, and Cultural-Scientific Exchanges: Chinese Debate over the Shape of the Earth, 1600 ∼1800,” Science in Context, 12∼3, pp.388 ∼389를 참조할 것.

마테오 리치는 고대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의 우주구조에 입각한 지구설을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설득의 논리와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 고대 장형(張衡)의 혼천설(渾天說)과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나오는 증자(曾子)와 선거이(單居離)의 문답을 예로 들면서 자신이 소개하는 지구설은 중국의 고대 전통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지구설이 비문화인인 서구인들만의 주장은 아니며, 그래서 믿을 만 하다는 논리이다. 이와 아울러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증거들을 제시하였는데, 남북의 이동에 따른 북극고도의 변화, 동서간의 이동에 따른 시간 차이,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지구 반대편의 서양에서 중국에 오면서 항해하였던 경험들이었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논의는 그의 『건곤체의(乾坤體儀)』(1605)·『천지혼의설(天地渾儀說)』에서 그대로 재정리되어 널리 알려 졌다.184) 마테오 리치가 지구설을 소개하면서 제시하였던 이와 같은 설득의 논의에 대해서는 Chu Ping Yi, 앞의 논문을 참조할 것. 이후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지구설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면 마테오 리치가 말하였던 논리와 증거들을 흔히 거론하곤 하였다.

그런데 마테오 리치가 전한 지구설은 엄밀하게 말해서 근대과학이라기보다는 서양 고대의 과학내용에 불과하였고, 아전인수식으로 지구설의 동양적 전례를 중국 고대의 문헌에서 제시하였지만,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지구설은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특히, 지구설은 구형의 지구 위에서 고정된 하나의 위치를 중심으로 지정할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지구설을 수용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곤여만국전도」가 1603년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 등 사신 일행에 의해서 조선에 전래된 이후 17세기 동안은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을 제외하고 지구설을 수용한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185) 지구설이 전래되기 시작한 초기 17세기 동안의 지구설 수용 상황에 대한 논의는 구만옥, 앞의 논문, pp.725∼729를 참조할 것. 심지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한우주와 다우주론을 들어 서양 천문학의 한계를 비판하였던 최석정조차도 지구설에 대해서는 그 진위를 모르겠다고 토로하고 있다.186) 『明谷集』 권8, 序引, 「西洋乾象 坤輿圖二屛總序」, p.33.

이와 같이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지구설을 수용하는데 지식인들이 주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의외로 쉽게 지구설의 수용이 이루어진 통로가 있었다. 그것은 천문의기와 역법을 통해서였다. 즉, 서양식 천문학에 근거를 둔 천문의기와 역법의 계산법을 보다 정밀한 역법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로 수용하였다면, 그러한 서양식 천문의기와 역법 계산이 전제로 하고 있는 지구설을 결국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문의기와 역법의 계산법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패러다임 하에서 상호 연결이 될수 있는 통로였던 것이다.187) 서양식 천문의기와 역법의 계산법이 두 세계관 사이의 연결통로였다는 논의는 Chu Ping Yi, 앞의 논문, p.385, pp.393∼395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의 역법은 조선 후기에 정부 주도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중국에서 서양식 역법으로의 개력 작업 이 한창 진행 중이던 1644년에 김육은 벌써 시헌력(時憲曆)의 수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일부 세력의 약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적극적으로 서양식 역법의 수용을 추진해 결국 1653년에는 서양식 역법(시헌력)에 의거해 역서를 편찬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에도 이해가 미진한 부분과 중국에서 새롭게 채택된 최신의 천문학 이론과 계산법들을 계속 수용해 나갔다.188) 17세기 이래 조선에서의 정부 주도의 서양역법 도입노력에 대해서는 주33)을 참조할 것. 결국 땅이 구형이라는 기하학적 구조에 기반한 서양 천문학의 이론과 계산법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실무에서 수행한 사람들은 전문적인 천문역산가들인 관상감 관원들이었고, 그들은 동․서양 모두에서 실재하는 우주의 구조와는 별개로 역법 계산을 위한 우주의 모델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해 고도의 수학적 계산법을 이해할 리 없는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서양식 역법의 채택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관념을 수용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문학 이론과 고도의 계산법을 이해할 수 있는 유학자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김석문은 서양식 천문학을 이해할 수 있었던 바로 그러한 유학자였다. 그의 『역학이십사도해』(1726)에는 『항성역지(恒星曆指)』, 『오위력지(五緯曆志)』, 『시헌력법(時憲曆法)』, 그리고 『칠정력지(七政曆指)』 등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에 수록되어 있는 서양 천문서들이 인용되었다. 김석문은 그 책들에 실린 서양 천문학의 상수들과 계산 체계들이 정확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우주론 형성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서양 천문학의 구체적인 상수들과 계산들이 전제로 하고 있는 구형(球形)이라는 땅의 기하학적 구조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기하학적 구조를 자신의 전통적·상수역학적 우주론의 한 구성요소로 채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김석문은 그의 『역학도해』에서 태허천의 일주(一周) 주기와 궤도의 거리를 구하고 이어서 같은 방식 으로 모든 천체의 회전 주기와 궤도의 거리를 각각 계산하고 있다.189) 구체적인 논증은 문중양, 「18세기 조선 실학자의 자연지식의 성격-象數論的 우주론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21권 1호, 1999, pp.36∼37을 참조할 것. 그런데 그러한 계산은 태허천이 하루 움직이는 거리를 일허(一虛)라 하고 그 일허의 거리가 땅이 하루 동안 회전운동하는 거리 9만리와 같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였다. 김석문이 이 가정을 증명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태허천과 지륜천(지면)의 운동을 구면체인 지구의 지심을 중심으로 한 중심 부분과 지면의 회전운동과의 비유를 통해서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90) 김석문은 부동의 태극천으로부터 생성된 太虛天과 地輪(地面)의 운동을 地心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라는 구면체의 회전운동에 비유하였다. 지심은 부동이지만 지심에서 약간만 벗어난 곳은 미동하기 시작해서 지면에서 가장 빠르다. 地心은 부동이고 따라서 태극의 부동에 비유된다. 태극이 부동이지만 미동의 태허를 그 안에 함축하고 있고 나아가 태허로부터 생겨난 모든 천체들의 움직임을 함축하고 있듯이, 부동인 지심도 움직임의 시작인 1을 함축하고 있고 더 나아가 지심에서 떨어진 모든 부위의 운동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지면의 9만리 운동도 함축하고 있다. 결국 지심에서 처음으로 떨어져 움직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1의 운동과 지심에서 가장 멀고 그래서 가장 빠른 지면의 하루 9만리 운동은 같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김석문의 논증은 『大谷易學圖解』, pp.495∼496을 참조할 것. 결국 천체의 운동과 구조에 대한 고도의 상수역학적 이론의 구성에 지구설이라는 서양 천문학의 개념이 한 몫을 한 셈이다. 지구설이라는 사실의 응용이 없었으면 김석문의 우주론 구성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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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신법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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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후반 아들 서호수와 함께 조선의 관학계에서 천문역산의 대가로 인정받았던 서명응도 역시 지구설을 천문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었다. 『비례준(髀禮準)』과 『선구제(先句齊)』, 그리고 『선천사연(先天四演)』 등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구체적인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들어서 지구설을 자세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191) 서명응이 지구설을 천문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은 다음 논문이 참조된다. 박권수, 「徐命膺(1716∼1787)의 易學的 天文觀」, 『한국과학사학회지』 20권 1호, 1998, pp.67∼68.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명응이 지구설을 입증하는 것을 살펴보면, 마테오 리치가 「곤여만국전도」에서 제시하였던 두 가지 방식, 즉 장형의 혼천설이나 『대대례기』의 기록과 같이 고전적 기록을 아전인수식으로 재해석해서 이미 지구설의 전거가 중국 고대에 있었다고 주장하거나192) 이 방식은 서양과학의 중국기원설로 발전되었는데 梅文鼎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Chu Ping Yi, 앞의 논문, p.390, pp.400∼402를 참조할 것. 지구설을 입증하는 실증적·경험적 천문학 지식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명응은 지구설과는 지적 맥락(context)이 판이하게 다른 상수역학적 인식체계를 이용해서 지구설이 타당함을 완벽하게 증명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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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하도(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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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복희의 선천방원도
<그림 2> 복희의 선천방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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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이 지구설의 근거로 제시하였던 상수역학적 인식체계는 바로 하도중궁(河圖中宮)과 선천64괘방원도였다. 즉, 하도의 가운데 5점은 십자가 모양으로 종횡으로 각각 3점을 이루는 모양(<그림 1>)을 갖는 데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부터 땅의 구형이 도출되었다는 것이다.193) 河圖中宮의 5점이 圓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것은 다음 논문이 참조된다. 孟天述 譯, 『易理의 새로운 解釋(先天四演)』, 중앙대학교 출판부, pp.100∼101. 그렇지만 사람들은 선천방원도의 내도(內圖, <그림 2> 가운데 사각형 모양)가 정방형(正方形)인 것에 구애받아 지방(地方)으로 잘못 알고 말았으며, 고대 이래 당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가들마저도 계속해서 지구설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194) 『先天四演』 方圓象箋七(地圓眞傳), p.50. 그래서 서명응은 지구의 형체와 정방형인 선천방원도의 내도의 모양을 부합시키기 위해서 내도를 45도 기울여 정방형이 아니라 마름모꼴로, 즉 대각선이 상하좌우로 똑바르게 교차하도록 수정하였다(<그림 2>와 <그림 3>을 비교). 마름모 모양으로 세워진 새로운 내도는 하도중궁 5점의 형상과 부합해지면서 그러한 내도로부터 땅의 구형이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이자 상수역학의 대가였던 서명응이 지구설을 증명하려는 과정에서 보여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종래 조선의 유학자들이 절대적인 진리와도 같이 믿었던 복희(伏羲)의 선천방원도를 서명응이 수정하였다는 점이다. 종래 알고 있던 선천방원도가 전설적인 성인 복희가 원래 그렸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사실 처음으로 선천방원도가 제시되었던 것은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였기 때문에 그동안 원래의 참된 선천방원도, 즉 복희가 의도하였던 도상을 잘못 알고 있었을 수가 있다. 결국 서명응은 송대 신유학자들, 즉 채원정(蔡元定)과 주희가 제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천방원도를 수정해 새로운 천문학 지식과 보다 잘 부합하는 새로운 선천방원도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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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서명응의 선천방원도
<그림 3> 서명응의 선천방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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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복희의 선천방원도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잘못된 도상에 의존해 지방(地方)의 관념에 얽매여 있었던 고대 이래 유가들의 잘못된 생각을 비판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래 참이라고 믿었던 고대의 경전 주석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판적 논의의 출발점이 서양 천문학이 전해준 지구설이라는 외래의 이론이 정확하고 타당하다는 인식 하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지구 구형의 관념이 유가들이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있다고 믿었던 선천방원도라는 도상에 구현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던 것이 원래의 도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셈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전개된 상수역학적 우주론 논의 속에서 서양과학의 영향 하에 비판의 방향이 상수역학적 자연인식으로 향하는 단초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헨더슨이 지적하였던 바의 ‘회귀적’이고 ‘엉뚱한’ 우주론이 내부에서 발전적으로 극복되는 모습이 아닐까.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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