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2. 전통과 서양의 혼유: 전통과학인가, 서양과학인가?
  • 조선적 세계지도, 천하도
문중양

천하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만 존재하는 매우 독특한 세계지도이다. 천하도는 판본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운데 내부에 가면 네모 모양의 중앙 대륙(내대륙), 중앙 대륙을 감싸고 있는 안쪽의 바다(내해), 안쪽의 바다를 감싸고 있는 바깥 대륙(외대륙), 그리고 외대륙 밖의 바다(외해), 그 바깥에 해가 뜨고 지는 곳이 있는 구성이다. 나라 이름과 산천의 이름 등 140여 개가 넘는 고유 지명들이 지도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와 산천은 대부분이 중앙 대륙에 분포해 있으며, 나머지 나라와 산천은 모두 상상의 것들로 『회남자(淮南子)』, 『산해경(山海經)』, 그리고 추연(鄒衍)과 같이 정통 유가 전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도가적이고 신비적인 전통의 문헌들에 나오는 것들이었다. 또한, 지도의 여백에 적힌 설명에는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가 4억2천리라거나 동서남북은 2억3만리 떨어져 있다고 적혀 있 기도 하다.195) 전상운, 『한국과학사』 사이언스북스, 2000, p.299. 실존하는 몇 개의 나라와 산천을 제외하면 천하도는 전적으로 상상의 세계를 그려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유가적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도가적이고 신비적인 상상의 세계였다.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던 유학자들이 즐겨 소지하고 있던 지도첩 대부분에 이러한 세계 지도가 첫머리에 또는 끝부분에 끼워져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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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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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배우성은 이러한 신비적인 상상의 세계지도인 천하도의 지적인 기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장하는 내용이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서양식 세계지도를 접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것에서 받은 이미지들을 동양의 고전들을 활용해 동양적 세계관과 언어로 표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었다.196) 배우성, 「서구식 세계지도의 조선적 해석(천하도)」, 『한국과학사학회지』 22권 1호, 2000, p.69.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처음으로 중국의 조공(朝貢) 권역인 직방(職方) 세계를 벗어나는 확대된 세계에 관한 지식을 전해준 것은 땅이 구 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곤여만국전도」라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서양식 세계지도였다. 이 세계지도가 1603년에 들어온 이후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가 1604년경에, 「만국전도(萬國全圖)」가 1630년경에 전래되는 등 많은 서양식 세계지도가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197) 서구식 세계지도의 유입에 대한 논의는 앞의 논문, pp.55∼58을 참조할 것.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는 앞에서 살펴본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의 형태가 구형이라는 것과 함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권 지역 바깥의 확대된 지역들의 존재에 대한 정보였다. 그러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내용은 그야말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소한 세계였다. 게다가 문화적·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어야 할 중국이 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은 대부분의 지식인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세계관의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다.

땅의 형태가 구형이라는 설은 마테오 리치가 변명하였듯이 장형의 혼천설이나 『대대례기』에서의 증자와 선거이 문답의 예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조공권인 직방 세계를 벗어나는, 특히 세상의 끝 지점을 묘사하는 듯한 「곤여만국전도」의 내용은 사정이 달랐다. 중국 고전에서 직방 세계 바깥의 세계를 묘사하고, 특히 세상의 끝을 묘사하는 전례는 추연(鄒衍)이 말한 구주(九州)의 세계나 수해(竪亥)가 걸어서 쟀다는 신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198) 竪亥는 『회남자』에서 유래한다. 배우성, 앞의 논문, p.66.

그것들은 유학자들에게는 신뢰하지 못할 것들이었던 것이다. 1708년 최석정이 관상감에서 공식적으로 모사해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를 왕에게 바치면서 “그 내용이 심히 불경스럽다.”고 평한 것은199) 『明谷集』 권8, 序引, 「西洋乾象 坤輿圖二屛總序」, p.33. 정통 유가에서는 의심해왔던 추연이나 수해와 관련된 도가적·신비적 내용이 지도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석정이 서양식 세계지도를 보고 불경스러운 추연과 수해의 세 계를 떠올렸듯이 조선의 다른 지식인들도 유사한 연상을 하였다. 예컨대 이종휘(李種徽, 1731∼?)는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추연의 세계관에 준해서 해석하고 있다. 즉, 아시아를 둘러싼 소양해는 추연이 말하는 비해(裨海) 중 하나이며, 대양해는 추연의 영해(瀛海)라는 것이다.200) 이종휘의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한 논의는 배우성, 앞의 논문, pp.67∼68.

배우성은 이와 같이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본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 동양적 전례를 찾아 재구성한 것이 천하도라고 파악하였다. 동양적 전례는 바로 추연의 세계관, 『회남자』에 나타난 세계, 그리고 『산해경』에 표현된 지리지식 등이었다. 그는 이렇게 서양식 세계지도를 보고서 동양적 전례를 연상하는 것은 지구설을 접하고 『대대례기』의 기록을 연상하는 것과 마찬가지 차원의 논리라고 보고 있다.201) 배우성, 앞의 논문, p.68. 물론 이러한 주장은 천하도의 구성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동양적 전례는 없다는 사실, 또한 약간씩 차이가 나는 매우 다양한 천하도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 후기에 구성되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점 등 명확하게 입증되어야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하도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전적으로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기이한 세계지도’인 천하도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즐겨 소지하였던 지도책의 첫머리를 장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종래 유가에서는 금기시 되던 『산해경』·『회남자』, 추연의 전통에 기반을 둔 세계지도가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의해서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수많은 조선 후기의 유가 지식인들이 천하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비유가적인 기이한 방식으로 직방 세계 바깥의 확대된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방 세계에 국한되었던 전통적인 유가적 세계인식이 ‘기이한 세계지도’ 천하도에 의해서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세계인식이 서양식 세계지도 가 전해준 새로운 정보에 의해서 유발되었다는 점이다. 서양식 세계지도는 구형의 지구 관념과 그 지구 안에 중국 중심의 직방 세계를 넘어서는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전해 주었다. 구형의 지구는 대다수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방 세계 바깥의 넓은 세계는 서양의 세계지도가 묘사하듯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인정해야 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서양의 세계지도가 묘사하는 방식으로 직방 세계 바깥의 넓은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인식, 즉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상충된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은 직방 세계를 넘어선 확대된 세계인식을 서양의 방식이 아닌 동양적 전통에서 찾았고, 그 동양적 전통은 유가의 전통에서는 애초부터 직방 세계 바깥의 세계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해경』·『회남자』,추연의 전통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서양식 세계지도의 유입으로 독특하고 기이한 세계지도 ‘천하도’가 구성된 것은 지구설을 접하고 『대대례기』의 기록을 연상한 것 이상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김석문과 서명응이 서양 천문학의 정밀하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하여 고도의 ‘엉뚱한’ 상수역학적 우주론을 펼쳤던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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