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2. 전통과 서양의 혼유: 전통과학인가, 서양과학인가?
  • 싱크리티즘적 천문도, 혼천전도
문중양

고법 천문도의 체계와 서양의 신법 천문도의 작도법을 절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 역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신·고법 천문도의 절충은 아담 샬의 『현계총성도』(1634)와 대진현의 『항성전도』(1744년경)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아담 샬과 대진현은 하나의 원 안에 모든 별을 그려 넣는 것이 불합리하며 천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면서도, 중국 전통 천문도의 체계와 서양식 작도법을 결합한 이 천문도들을 만들어 바쳤던 것이다. 물론 그 의도는 중국인들의 전통적 천문 관념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은 작지 않았다.

서호수(徐浩修)가 1796년에 책임 편찬한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 실려 있는 ‘동국현계총성도법(東國見界總星圖法)’은202) 이 내용은 『국조역상고』 권2, 중성, 42a-43b에 실려 있다. 그러한 사정을 짐작케 한다. 그 내용은 북위 38도 위치에 있는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현계총성도』의 작도법을 『항성역지』에 수록되어 있는 작도법을 통해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이다. 이 기록은 말미에 “영조 20년(1744)에 정한 적도 경위도표에 의거해 세차를 교정하고, 현계(見界)를 조선 한양에서의 위도에 맞추어 천문도를 작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 취지를 적어 놓았다. 이를 보면 고법 천문도의 복제가 아닌 새로운 데이터로 개정된 천문도를 관상감에서 제작할 때에는 서양식 작도법을 채용한 『현계총성도』를 제작할 것을 정식으로 정해 놓은 셈이었다.

신·고법 천문도를 절충하려는 시도는 서명응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신법혼천도서(新法渾天圖序)』에서 관상감에 전해지고 있는 개천도(蓋天圖)인 고법 천문도가 천체의 형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매우 고민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서 두 개의 상(象, 渾天象과 蓋天象)을 상호 참작해서 혼천도와 개천도를 절충하는 천문도를 만들려고 시도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들 서호수에게 천문역산을 가르치고 있던 관상감 관원 문광도(文光道)가 자신의 고민을 듣고 기꺼이 절충하는 천문도를 제작해 주었는데, 그 천문도를 「신법혼천도」라 이름하였다고 한다.203) 『保晩齋集』 권7, 『新法渾天圖序』.

이 때 문광도가 제작해 준 「신법혼천도」는 「현계총성도」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던 듯하다. 서명응이 적어 놓은 『신법혼천도설(新法渾天道說)』을 보면, 적도 이북과 이남의 양반구로 이루어진 적도남북양총성도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도에 그려진 별자리가 300좌 3,083성이었던 것으로 보아 『의상고성』에 있는 대진현의 성표를 이용해 작도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04) 이러한 내용은 『保晩齋集』 권9, 『新法渾天圖說』, pp.25∼26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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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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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천방원도(先天方圓圖)>와 같은 도상(圖象)에 담긴 원리를 통해서 서양 천문학이 설명하고 있는 여러 과학적 사실들을 상수학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였던 서명응으로서는 개천도의 체계와 혼천도의 작도법을 절충하는 천문도를 만들고 싶어 하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명응은 문광도가 그려준 양반구형의 혼천도에 만족해야만 하였던 듯하다.

그런데 서명응이 이루지 못한 신·고법을 절충한 천문도의 제작이 19세기에 이르러 기묘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혼천전도(渾天全圖)」라 이름이 붙은 독특한 천문도이다. 이 천문도는 19세기 중엽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10여 점 이상이 국내외의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205) 현재 「혼전전도」를 소장하고 있는 기관으로는 규장각, 장서각,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전주대학교 박물관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이 동일한 목판에서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206) 이 중에 장서각 소장의 것은 초간본이 아니라 後刷本인 것으로 보아 여러 번에 걸쳐 다량으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목판 인쇄본뿐만 아니라 필사되어 보급되기도 하였으며,207) 필사본으로는 「退川世稿」에 실려 있는 「혼천전도」를 들 수 있다. 나무에 새긴 것으로는 전주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것이 있다. 심지어 나무판에 새긴 것도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듯하다. 아마도 현존하는 것의 수량으로 보면 고법 천문도보다 적지 않은 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혼천전도」는 종래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1848년에서 1876년 개항 이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208) 吳尙學, 『朝鮮時代의 世界地圖와 世界認識』,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pp.252∼262을 참조. 오상학의 분석에 의하면 「혼천전도」와 세트로 제작된 「여지전도」가 김정호에 의해서 1845∼187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혼천전도」도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사회 말기의 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되었던 대표적인 천문도가 「혼천전도」인 셈이다.

「혼천전도」는 독특한 성도의 작도와 함께 여백에 적힌 설명문도 흥미롭다. 먼저 도면의 상단에 있는 설명문을 보면, 일월오성의 그림과 함께 크기와 주기 등의 데이터를 적어 놓은 칠정주천도(七政周天圖)가 있다. 데이터들은 모두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乾坤體義)』의 것이다. 그러나 일월오성의 그림은 토성에 5개의 위성을 그리고, 목성에는 4개의 위성을 그리는 등 대진현의 『황도총성도』(1723)의 그림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칠정주천도 옆에는 일월식의 원리를 기하학적 그림으로 도시하고 간략하게 설명해 놓은 일월교식도(日月交食圖)가 있는데, 이 그림은 『역상고성(曆象考成)』의 『교식총론』 관련 기록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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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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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월교식도 옆에 도시되어 있는 24절기 태양출입시각도는 1783년(정조 7) 계묘년의 『경위도중성기』 데이터를 도식으로 적어 놓았다. 도면의 하단에는 칠정신도(七政新圖)와 칠정고도(七政古圖), 그리고 현망회삭도(弦望晦朔圖)와 설명문이 각각 적혀 있다. 칠정신도 는 티코 브라헤의 우주구조를 도해(圖解)한 것, 칠정고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구조를 도해한 것, 그리고 현망회삭도는 달의 위상 변화를 도해한 것으로, 모두 1723년에 완성된 『역상고성』의 관련 기록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209) 칠정신도는 「역상고성」 권9, p.412, 현망회삭도는 「역상고성」 권5, p.192에 각각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도면의 여백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모두 서양 천문학이 알려준 지식 정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혼천전도」의 제작자가 서양 천문학의 최신 정보를 도면에 담아내려고 노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가운데에 위치한 성도(星圖)를 분석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이 보인다. 먼저 외형적인 형태는 하나의 원 안에 모든 별을 그려 놓는 현계총성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별자리는 고법 천문도보다는 서양식 신법 천문도의 별자리에 가깝다. 성도의 외곽은 12차와 12궁, 그리고 24절기를 표시해 놓았다. 중심에서 외곽으로 뻗은 방사선의 직선은 28수의 구획이 아니라 12개로 등분한 시각선과 절기선이다. 그런데 시각선과 절기선이 합쳐져서 하나로 되어 있다. 서양식의 적도남북양총성도나 황도남북양총성도에서는 적극(赤極)에서는 시각선이, 황극(黃極)에서는 절기선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외곽으로 뻗어나갔던 것인데, 「혼천전도」에서는 이 두 방사선이 적도와 황도가 분리되어 있음에도 기묘하게도 하나로 합쳐져 있다.

적도와 황도는 둘 중에 어떤 것도 기준이 아니고 각각의 중심이 성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직경의 길이가 동일한 두 원의 교점, 즉 춘추분점이 성도의 중심에서 정확히 대칭을 이루도록 황도와 적도를 그렸다. 별자리의 전반적인 방향도 서양식을 따라서 춘추분점을 남북 방향으로, 동하지점을 동서 방향으로 맞추었다. 극 둘레의 작은 원은 조선의 위도 38도의 주극원(週極圓)이 아니라 황적거도인 23.5도를 반경으로 하는 원이다. 왜 23.5도의 작은 원을 중심원으로 하였는지 이해 못할 일이다. 이러한 반경의 중심원은 서양의 적도 남북양총성도와 황도남북양총성도의 반구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황도와 적도의 극이 동시에 표시되면서 그 각 거리의 차이인 23.5도 반경의 동심원을 적극이나 황극 주위에 둘러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묘한 성도(星圖)의 작도는 천문학적으로 비과학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과학적인 성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지 성도의 제작자가 양반구로 나뉜 서양 천문도의 체계를 따르려는 의도가 컸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천문도의 큰 틀인 현계총성도의 체계 안에 양반구로 나뉜 서양식 천문도의 체계를 담아 내려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작자의 천문학적 소양이 전혀 따라주질 않아 천문학적으로는 가치 없는 오류로 가득 찬 천문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혼천전도」의 성도는 한마디로 말해서 천문학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복잡한 구도를 무시하고, 기하학적으로만 완벽하리만큼 균형있고 통일된 구도를 지닌 체계를 구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혼천전도」가 『여지전도(輿地全圖)』라는 김정호가 만든 세계지도와 함께 세트로 19세기 중반에 목판으로 인쇄되어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것은 이 천문도를 접한 19세기 조선의 수많은 식자층들이 천문도에 담긴 천문의 상(象)을 수용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심지어 목판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필사해서 자신의 문집에 포함시켜 놓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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